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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김우현 |2009.05.21 20:25
조회 44 |추천 0

한 남자가 어떤 노점상의 주인과 흥정을 하고 있다. 남자도 주인도 꽤나 적극적이다. 둘 다 양보할 마음이 없는 듯 하다. 하지만 흥정이 길어지는 걸 보면 주인은 물건을 팔 것이고, 남자는 물건을 살 것이다. 거래를 할 마음이 없다면 흥정을 할 필요가 없을테니.

 

"너무 비싼 것 아닌가요?"

남자가 말한다.

"자, 곰곰히 생각 해 보라고. 이게 어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인 것 같아?"

주인도 지지 않고 말한다.

"아저씨 말을 어떻게 믿어요? 증거도 없는 물건이잖아요."

남자의 대꾸가 이어진다.

"확실하다니까? 못 믿으면 사지 말어."

주인은 단호하다.

 

노점상은 굉장히 평범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바닥에 돗자리인지 비닐인지 알 수 없는 것을 깔아놓고 그 위에 물건들을 진열해 놓았다. 하지만 진열된 물건들은 독특했다. 칫솔도, 라디오도, 공구도, 불법DVD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하면 또 쉽게 말할 수 없는 게 진열된 물건들은 모두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생김새를 하고 있다. 재질도 다양하다. 나무, 돌, 금속, 유리. 하지만 싸구려는 또 아닌 듯 모서리도 바닥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따. 노점상의 주인 또한 이상하다. 아니, 굉장히 정상적이다. 하지만 덕분에 노점상과의 완벽한 불협화음을 이룬다. 정장을 깔끔하게 입은 젠틀한 모습의 노점상 주인. 게다가 낚시 의자를 펼쳐놓고 앉아있다. 하지만 말투는 영락없는 장사꾼이었다.

 

"아니, 아니. 너무하잖아요. 아저씨 설명만 믿고 덥썩 사기에 10만원이라는 건 너무 비싸잖아요."

"아, 제 값은 한다니까? 아니 제 값에 몇 배는 하지! 이걸 고작 10만원에 산다는게 복받은거야."

"고작 이런 손바닥만한 유리조각을 무슨 10만원이나 주고 사요!"

"어허! 내가 그렇게 설명했잖아. 이건 평범한 유리세공품이 아니라고."

 

둘 사이의 팽팽한 신경전은 점점 주인이 우세로 변해갔다. 평범한 유리세공품이건 아니건 남자는 그것을 갖고 싶어했따. 남자가 흥정하고 있는 물건은 유리로 된 나무모양 장식품이었따. 책갈피처럼 얇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품은 안전하게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불안정함을 가지고 있었따. 손으로도 기계로도 쉽게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복잡하면서도 아슬아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이, 남자를 사로잡았다. 사실 남자의 감성은 값이 얼마건 간에 어서 사라고, 손에 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이성은 오늘 있을 데이트를 생각하라며, 값을 깎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쨋건 이성도 감성도 '사'라고 말하고 있었기에 문제는 가격이었다. 이를 눈치 챈 주인이 집요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3만원이요."

"어허, 알고보니 이거 순 도둑이네?"

"그렇다면 3만 5천원."

"이게 그렇게 만만한 물건이 아니라니까?"

"음, 3만 8천원."

"이보게 학생."

갑자기 주인이 말투를 바꾼다. 톤이 한 층 낮아지고 울림이 깊어진다. 무게를 가진 설득력 있는 목소리가 된다.

"내가 한 말이 장난 같은가? 이 유리로 된 꿈나무를 가진 사람은 단 한번, 자신이 원하는 꿈을 꿀 수 있다는 게 거짓말 같은가?"

 

남자는 유리로 된 (나무) 장식품을, 깨지지 않게 작은 상자에 담아 주머니에 넣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결국 10만원을 모두 내고 구입했다. 상대의 말빨에 넘어간 게 아니라 불쌍한 사람을 도운 거라 애써 자신을 달래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노점상 주인이 입고 있던 양복을 싸구려로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날은 하루종일 일이 풀리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로 화가난 여자친구를 위해 준비한 데이트였다. 하지만 10만원이라는 예상 외의 지출에 계획했던 데이트 코스에서 모든 것이 한 단계 내려가 버렸다. 생각했던 곳보다 조금 가까운 극장,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복잡한 이동수단, 생각했던 곳보다 조금 저렴한 식당,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저렴한 메뉴. 결국 그것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저렴한 서비스를 제공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덜한 감동으로 돌아왔다. 결국 나름대로 큰 맘 먹고 준비했던 고백은 여자에게 하지 못했다.

"제길."

여자를 집 앞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오며 남자는 혼자 중얼거린다. 이 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던가. 그리고 또 이런 자리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할까. '즐거웠다.'며 '다음에 또 만나자.'고 여자에게서 문자가 날아왔지만, '나도 즐거웠어.'라고 '다음에는 더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답장을 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허전한 마음이 조금 달래질까 싶어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자 딱딱한 상자가 손에 닿았다. 걷다 말고 상자를 꺼내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 놓인 장식품은 가로등 불빛을 아름답게 반사했다. 앙상한 가지가,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 속에서 불고 있던 모래바람이 멈춘 것 같았다. 까실까실한 찝찝함이 사라졌다. 다시 상자를 닫고 집으로 향했다.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어 문이 열릴 때마다 내렸다가 다시 타야했던 만원 전철도, 타기도 힘들지만 카드를 찍는것도 힘든 만원버스에서도 짜증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남자는 집에 도착했다.

 

남자는 옷을 갈아입고, 씻고, 일기를 적고, 컴퓨터를 하다가,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이불속에서 뒤척이다가 문득 일어나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상자를 집어온다. 나뭇가지를 꺼내 한동안 바라보다가 상자에 담은 채로 머리맡에 두었다. 뚜껑은 닫지 않았다.

"좋은 꿈 좀 꾸게 해줘. 제발."

남자는 잠이 들었다.

 

남자는 원하는 대로 좋은 꿈을 꾸었다. 아니, 좋은 꿈이라는 조잡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꿈을 꾸었다. 꿈 속 세상에서 남자는 세상의 주인이면서, 세상의 중심이었다. 남자는 이것이 나무의 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멋진 꿈을 꾸게 해준 나무에게 감사했다. 꿈은 길었다.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부자는 아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사람은 아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친절했으며, 그를 존중했다. 세상은 남자를 필요로 했으며 남자 또한 세상이 좋았다. 그녀는 남자의 정중한 고백에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고, 남자는 그녀에게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었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됐다.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보고싶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남들에게 인색해 보이지 않을 수 있었고, 베풀고 싶은 만큼 베풀 수 있었다. 세상은 아름다웠고 남자는 세상에 감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꿈이 길어질수록 남자의 마음속 어딘가에선 불안이 자라났다. 어쨋건 그것은 꿈이었다. 그리고 꿈은 언젠간 끝이 난다. 그 간단한 문제가 남자에게 점점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그녀가, 자신의 지위가, 자신의 재산이, 자신의 명예가, 자신의 삶이, 이 세상이 지금 당장이라도 끝날 수 있다는 것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동시에 그 누구에게도 이 고민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꿈을 꿈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남자를 알지 못하는,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눈을 뜨면 현실이 아닐까 싶어 잠에 드는 것이 무서워졌다.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꿈속이기에 피곤하거나, 건강이 나빠지는 일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한 긴 밤을 혼자 지내는 것이 점점 무서워졌다.

"여, 괜찮은가?"

어느 날 불안에 가득 차 홀로 깨어 밤을 보내던 남자에게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장을 차려입은 노점상 주인이 남자의 앞에 서 있었다.

"좋은 꿈이지?"

남자는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막연히, 이제 꿈이 끝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가 원하는 꿈이라고 했지 행복한 꿈이라고 하진 않았잖아?"

남자는 그 말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남자가 유리 조각을 부숴버리기 위해 머리맡을 보았을 때, 유리로 된 나무조각은 이미 깨져있었다.

 

GEM. by Woo Hyeon / 09.05.21 /

오늘 새벽 꾸었던 꿈입니다. 일어나자마자 현실인 줄 알고 깜짝 놀랬더랬죠. 조금은 내용을 덧붙여 저의 꿈을 적어보았습니다. 꿈은 현실을 대체한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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