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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제의를 강요받는 사회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관하여

장은석 |2009.05.23 19:08
조회 74 |추천 0

이와 같이 개인중심의 사고가 극단화될 때 영웅은 필요하지도 않고 사회적으로 요구되지도 않는다. 야만적인 형태의 집단적 폭력이 이미 사라진 사회에서는 더 이상 ‘희생제의’가 필요하지 않다. 십 년 전 혹은 이십 년 전의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은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지금 그렇게 이야기 할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될지 한번 조사해보라. 지금 우리의 사회는 영웅을 중심으로 한 권위적 왕권 상징의 사회로부터 비로소 수많은 개인의 모인 집단적 공동체로 구성된 별자리와 같은 상징의 사회로 급속하게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하이퍼텍스트라는 인터넷 매체의 급속한 전파와도 일맥상통한다. 국부임을 자처했던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소위 세 명의 김씨 정치인들의 시대까지 우리의 대통령은 왕의 상징에 가까운, 적어도 나라의 큰 어른에 해당하는 일종의 봉건적 영웅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정부는 이미 모든 권위를 상실하거나 포기하고 출발하였다. 현재 우리 사회의 언론과 문화적 움직임은 더 이상 신하로서 군림하는 왕에게 복종하며 섬겨야 할 의무가 없다. 비판은 모든 분야에서 가능하며 그로 인하여 남산 밑으로 끌려가는 따위의 폭압을 겪지는 않는다. 

 

과도기에는 늘 과거를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영웅을 상실한 시대의 자유는 무한대로 확장되지만 또한 책임의 초점도 분명해진다. 수동적인 의사결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갑자기 부여된 주체성은 감당하기 힘들만큼 벅차고 어색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익숙한 것들은 낯설어지고 마치 사람들은 커다란 혼란과 위계질서의 붕궤를 경험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명확하게 나아갈 좌표를 설정해 줄 지표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자유는 혼란을 넘어 두려움의 감정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와 같이 불분명한 시대에 과거의 억압은 온데간데없고 그들을 명확하게 컨트롤해 줄 강력한 영웅에 대한 소망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정당성 없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여 독재를 유지하고 인권유린과 탄압을 일삼으며 국가를 거대한 군대로 만들었던 무법적 지도자에 대한 향수가 다시 고개를 드는 괴상한 현상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 닿아 있다. 갑자기 소설과 드라마에서 30년대 역사소설에나 등장하던 영웅-이순신과 같은-들이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라의 가장 큰 어른이어야 하며 모든 면에서 귀감이 되는 거의 ‘신적 존재’이어야 할 대통령이 탄핵을 받는 사태는 사람들의 무의식에 커다란 충격과 혼돈을 야기했다. 이제 자신들을 이끌어 줄 나라의 ‘어른’이 없어지자 억지로 그런 존재를 만들려는 노력이 도올 선생과 같은 학자를 이상한 텔레비전 스타로 변모시킨다.

 

정확히 2004년 11월 20일에 나는 인용한 글을 썼다. <페이퍼>코너의 '[07호]영웅의 탄생과 소멸: 거룩한 희생자에 대한 그리움'을 참조하라.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당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한 표를 행사하면서도 그가 당선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아직 그런 일이 가능할 만큼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용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미디어의 변화는 다른 측면에서의 변화를 가속했고 그는 그런 변화의 격랑 속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그의 정치 행보를 보면서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또 우리 사회가 변모해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과거의 대통령들과 같은 '영웅적 성향'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시 어깨를 겨뤘던 이회창 후보가 그런 성향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가난 때문에 정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그는 '사법고시'라는 이상한 제도적 관문-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시험에만 합격하면 단번에 5급 공무원에 될 수 있는 마치 봉건시대의 '과거제도'와 같은 대한민국의 독특한 제도다-을 통해 단숨에 자신의 조건을 극복해냈다. 거기에도 만족하지 않고 그는 다시 나락으로 스스로 걸어내려간다. 사법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길 중에서 그는 '인권변호사'라는 방향을 선택한다. 여기서도 그의 '영웅적 성향'은 유감없이 드러난다. 어쩌면 더 쉽고 더 '평범'할 수 있는 여러 다른 방향으로 난 문을 닫고 그는 스스로 자기만의 길을 만들기를 소망했다. 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최루탄을 맞으며 그는 자기 자신만의 새로운 '변호사'를 만들어간다.

 

정치에 입문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역주의 타파'라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슬로건은 아주 멋있는 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앞서 변호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슬로건이나 이념보다 인간 행동을 더 직접 이끄는 것은 결국 자기 정체성, 자기 자신만의 성향이라고 나는 늘 믿는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당선될 수 없는,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곳에서 당선되기를 고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걸 해낸다. 영웅적 신화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일이 불가능해 보이면 보일수록 그것을 뚫어낸 사람은 더욱 신화적이 되게 마련인 것이다.

 

재임 중의 모습도 그의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탄핵'이라는 극한 상황이 조성되기 전까지 그에게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여러 가지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나는 여기서 어느 방법이 맞다 틀리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분명한 성향에 관해 언급하고 있을 뿐. 어느 면에서 그가 다소 강도가 높은 '말'들을 불쑥불쑥 할 때도 똑똑한 보좌진들이나 그 외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면서 손해보는 점에 관에 그에게 조언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감내하려는 것처럼 보였고 오히려 '가난'이나 '최루탄'처럼 일종의 쾌감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한 인상까지 받았다.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일반인들에게는 대단히 이상하고 극단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점들을 모두 고려해본다면 오히려 지극히 그의 성향에 부합하는 해결방식으로 여겨진다. 여러가지 만만치 않은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는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매번 문제의 정가운데를 돌파해나가려 했다. 그 와중에 인식했건 그렇지 않았건 여러 가지 잘못된-그 자신이 판단하기에도 명백할 정도로- 일들도 일어났다. 그는 입버릇처럼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을 낮추고 싶어했지만 내부에 감추어진 근본적인 성향은 전혀 그것과는 달랐다. 노동자와 같이 최루탄을 마시면서도 그는 '인권변호사'이지 노동자 그 자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명백한 오류와 책임들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을 것이다. 속속들이 밝혀지는 조건들은 그의 영웅적 면모에 중대한 훼손을 가했기 때문이다.

 

진중권 교수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인물들도 낯을 펴고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들어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나도 그 점에 관해서는 일부분 공감한다. 그가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던 어떤 신념들은 아주 분명하게 한국 사회의 발전과 성숙에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노무현 정부의 복지정책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질적으로 한국 사회를 더 세련되게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더불어 그가 저지른 잘못과 실수도 똑같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것의 크기를 다른 사람들과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누구보다도 평범한 사람이라고 그 자신이 역설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영웅적 정체성'은 명백한 오류들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검찰 소환 과정을 아침부터 생중계 해대는 -그렇게 방송할 거리가 없나,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의 괴상망측한 태도도 고통을 증폭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을 것 같다. 모든 것을 무화시킬 수 있는 일종의 '희생제의'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런 일이 여전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봉건적 분위기와 세련되지 못한 정치 문화적 양태가 그저 여전히 아쉽고 쓸쓸할 뿐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영웅'을 원하고 '별자리와 같은 상징의 사회'로 내딛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도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의 대통령도 영웅적 성향에서 벗어나는 인물이 아니다. '신화는 없다'라는 그의 자서전의 제목이 너무도 반어적으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사회 각계각층의 신중론에도 불구하고 취임 1주년에 맞추어 문화적 가치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청계천을 완성시키는 모습이나 마찬가지로 오랜 계획 없이 백두대간의 젖줄기인 강들을 뒤집으려는 모습은 여전히 여지없다. 더 우아하고 세련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여전히 시기상조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한 개인적으로도 쓸쓸하고 우울하지만 이와 같이 더 답답한 우리 사회의 일면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 같아서 부끄럽고 안타깝다.

 

격동의 현대사와 길고 치밀한 식민통치의 탄압을 겪으며 형성된 우리의 무의식적 정서가 나는 종종 무서울 때가 많다. '恨'이라는 글자로 대변되는 감정과 행동 양식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수줍음'이나 '무뚝뚝함'과 같은 말들이 금방 떠오른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종종 이 두 단어로 우리들을 표현하곤 한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미처 자기 정체성이 갖추어지기 이전의 남자 아이들은 군에 입대하여 마치 스펀지처럼 봉건적 질서와 영웅적 계보를 무의식속에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여러 개의 빛나는 별이 아니라 단 한 개의 별 아래 개별 빛을 모두 감추게 될 수밖에 없는 군대의 폭압적이고 말살적인 경험은 민감한 때의 아이들에게 무지막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군대를 없앨 수도 없다. 나는 지금 군대의 체제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전쟁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집단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군대는 토론하는 곳이 아니다. 실제 뜨거워진 소총에 새로 총알을 넣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몸에 박아넣는 연습을 하는 곳이다. 다만 나는 우리 나라의 현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자기 표현과 주체적 자립성을 민감한 시기에 윽박질러 차단된 우리의 청소년들이 자라서 봉건적인 왕권의 형태의 사회적 체계에 익숙함을 느끼게 되는 사태가 초래될 수밖에 없는 것이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여전히 우리의 형제들은 핵무기를 만들고 있고 전방에서 근무하는 우리의 아들과 동생과 조카들은 자의든 타의든 사고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시간에도 목숨을 잃고-어느 연예인이 군사령부 군악대에 가서 군대가 많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인터뷰를 보고 그야말로 고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호텔에서 군대를 논하다니 기가막힐 노릇이다- 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고 또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조건이다.

 

수줍고 무뚝뚝한 사람들이 평소에 억눌려있던 것들을 표출하면 극단적이 되기 쉽다. 평소에는 소심한 것 같은 사람들이 화가 나면 무섭게 돌변하는 장면을 우리는 자주 목도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나는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에 담겨 있는 정서. '역겨운'데도 불구하고 '말없이' 보내겠다는 말의 질감, 그 말의 내면이 참으로 두렵고 무섭다. '역겨워'하는 사람에게 '말없이'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뿌리겠다는 말에 숨겨진 다른 뉘앙스들이 마치 한국 사람인 우리들의 자화상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놀랍고 두렵고 쓸쓸한, 기묘한 어감을 남긴다.

 

─ 몽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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