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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김새롬 |2009.05.23 22:43
조회 5,852 |추천 266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침에 일어나 평소처럼 뉴스를 틀었다. 순간 내 귓가에 들린 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어쩌고 하는 말이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뉴스에서 나는 소리의 뜻을 이해할 만큼 나는 이성적이었다. 나의 이성은 뉴스를 보며 흔들렸을 뿐이었다. 지금도 뉴스를 보고 있다.

     노무현, 그는 누구인가? 필자는 이 글에서 필자가 기억하는 노무현 이라는 사람을 떠올려 보고자 한다. 사실 글을 쓸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도 아니고, 싫어했던 사람도 아니다. 필자는 20대의 절반을 그가 대통령일때 보냈다. 애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차분하게 떠난이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악플과 비아냥 글, 개인정보 유출/사생활 침해 유도글을 올리는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오늘 하루만큼은 조용히 보내라.  그리고 광장 게시판은 이슈에 민감한것이 본질적인 특성이다. 지금 텔레비전을 켜 보라. 앞으로 며칠간 신문을 보라. 이런 태풍급 이슈에 광장에 서거에 관한 글이 도배되는건 당연한 일이다.



     46년 김해 봉하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학업성적이 뛰어났지만 집안 형편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한다. 이후 그는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고 다시 변호사가 되었다. 81년 부림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그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노무현 변호사는 승소율 9할을 넘는 유능한 변호사였다. 

     1987년 파쇼독재 정권은 시민들의 저항으로 무너지게 되었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 하였으나 야권분열로 파쇼정권의 본질이 유지된 6공정권(노태우 정권)이 탄생했다. 당시 야권은 DJ(평화민주당), YS(통일민주당)으로 나뉘어졌는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는 13대 총선(88년)을 앞두고 민주화 인사인 그를 영입하여, 민주화 인사 몫으로 당선 안정권인 지역구에 그를 추천했다. 그러나 그는 당선 안정권인 지역구를 버리고 5공실세 허삼수와 붙었고 당선했다. 

     비록 5공과 본질이 같은 6공 정권이었으나 13대 총선 결과 사상최초로 여소야대 국회가 성립이 되고 시민들의 민주화와 5공청산의 열기로 인해 이른바 `5공청문회`가 열렸다. 노무현 의원은 장세동 등 5공실세와 정주영 등 거물들을 강력하게 공격하며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이후 김민석(97년) 조경태(08년) 등 청문회 스타가 많이 나왔지만 노무현은 그 원조이다. 

     90년 여소야대를 원하지 않았던 민정당(노태우)과 정국주도권을 제1야당인 평민당에게 빼앗겨 심기가 불편했던 YS의 통일민주당, 원래 민정당과 성향이 맞았던 JP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민자당-한나라당의 전신)이 창당하는 사건이 발생 한다. 지금 사람들은 모르거나 기억에서 잊혀졌겠지만 당시 `3당합당`은 작년 촛불시위 보다 더 큰 저항을 맞았다. YS를 따르지 않으면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YS와 함께 민정당에 `투항` 한다. 

     그러나 노무현 의원은 단호하게 거부 했다. 민정당, 5공 파쇼독재세력에게 투항 하는것을 거부 했다.(위 사진) 92년 14대 총선이 되자 노무현 의원은 민주당 소속으로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 하였고 5공실세 허삼수는 민자당 소속으로 다시 출마 했다. 4년전 노무현 의원을 영입했던 YS는 이번에는 허삼수를 지원하는 `이상한 유세`를 했다. 허삼수는 당선했고 노무현은 낙선했다. 

     노무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방자치제가 부활 하여 95년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렸을 때 그는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 한다.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노무현은 낙선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존경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95년 지방선거는 YS정권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강했다. 92년 대선에서 DJ를 누르고 당선한 YS는 93년 개혁드라이브 까지는 잘 했으나 94년 조문파동과 성수대교 붕괴,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등으로 민심을 완전히 잃었다. 95년 선거에서는 정계를 은퇴 한 김대중 아.태 평화재단 이사장이 귀국하여 민주당에 대한 지원 유세를 하였다. 필자는 아직도 기억하는 당시 DJ의 유세가 있다. "이번에서는 저를 봐서라도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주십시오" 

     유권자들이 김대중 이사장을 보고서 표를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선거에서 민자당은 참패했다.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이인제가 당선된것을 제외하고 거의 전국에서 패배했다. 강원도와 TK지역에서는 자민련에 완패 했으며 제주도에서도 무소속의 신구범 후보가 당선했다. 그 선거에서 부산시장 선거에 노무현 후보가 나와 낙선했다. 

     여하간 이 선거에서 자신감을 얻은 김대중 아.태 평화재단 이사장은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그 해 9월 5일 `새정치 국민회의`를 창당한다. 그 이듬애 15대 총선(96년)이 있었는데 민주당은 야권분열의 항의하며 서울에 유명인사들을 대거 출마 시켰다. 

     서울에서는 독재세력을 견제하고 민주화세력을 지지하기 위해 유권자들이 전략적으로 유력정당에 표를 몰아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로 보면 이 선거에서 유력한 당은 국민회의였다. 하지만 성북에 이철, 종로에 노무현 등이 출마 함으로서 민주당은 상당히 많은 득표를 한다. 이때 신한국당(민자당/한나라당)은 건국 이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승리 한다. 종로 선거에서는 이종찬과 노무현이 표를 분산시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이기택)은 신한국당과 합당하였다. 이 당이 바로 현재의 한나라당이다. 노무현은 이 합당에 당연히 거부하고 결국 DJ의 대선을 도우며 국민회의에 입당 했다. DJ는 97년 대선에서 당선하였다. 이후 98년 노무현이 출마했던 종로에서 이명박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 했다. 

     98년 재선거. 국민회의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나왔다.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 총재의 출마를 권유했다. 그러나 이회창 총재는 노무현과 만나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회창 총재는 출마를 포기했고 노무현 국민회의 후보가 이 선거에서 당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과 이회창은 이후 02년 대선에서 만났고, 이회창은 노무현에게 패배했다. 

     종로에서 재선거로 당선된 노무현 의원은 안정된 지역구가 있었고 신망받는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00년 16대 총선에서 그는 당선 유력한 서울종로 지역구를 버리고 부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고 낙선했다. 비록 낙선했지만 그는 어느 당선자 보다 박수를 받았고,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는 이때 생겼다.

     이후 그는 해양수산부 장관을 하였고 민주당의 고문을 하였다. 필자는 01년초 100분토론 방청 갔던적이 있었는데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이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애석하게도 출연이 취소되어 못 보았지만. 민주당 고문으로 있을 때는 정동영 의원 등 재선 의원들의 정풍운동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01년 10월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하자 민주당에서는 조순형/김민석을 주축으로 하여 시민참여경선을 기획해 내었고 노무현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출마 한다. 02년 3~4월 전국을 돌며 치러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그는 새정치에 대한 열망을 안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 되었다. 하지만 반대파들의 반발과 6.13 지선에서 패배 하면서 후보로서의 지위가 흔들리는 황당한 경험을 한다. 한일월드컵의 열기를 안고 대통령 후보로 뛰어든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를 시도하고 노무현 후보가 단일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정몽준이 단일화를 취소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는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02년 그해 여름과 겨울은 그 어느때보다 길었다. 그리고 잊을 수가 없다. 필자는 축구팬이 아니기 때문에 월드컵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축구경기를 보며 6월을 보냈다. 그 6월의 13일. 지선이 있었다. 바로 그날 경기도 양주에서는 조양중학교 학생 신효순과 심미선이 미군에 의해 살해 되었다. 이 소식은 고등학생 단체인 전고협과 경기고협에 의해, 그리고 언론에 의해 많이 알려졌고 그 해 여름을 뜨거운 여름으로 만들었다.

     사건은 6월 13일이었다. 하지만 축구때문에 많이 알려지지 못하였다. 6월과 7월,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꾸준하게 효순이와 미선이의 곁을 지키고 미군의 처벌을 요구했다.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여름 부터는 서서히 이슈가 되었고 가을에는 촛불을 들고 추모 하자는 한 시민의 제안으로 광화문에서 촛불시위가 시작 되었다. 이후 촛불시위는 지나치게 평화적인 시위의 전형이 되어 탄핵, 광우병쇠고기 수입개방 등의 문제에 맞서 시민들이 모여 보편적으로 활용하는 시위 형태가 되었다.

     계절이 변하고 날씨가 추워질무렵 촛불시위는 살인미군의 처벌과 소파 개정을 요구하는 거대한 항쟁으로 변하고 있었다. 12월 7일 토요일. 종묘에서 시작된 집회는 가두를 하며 광화문까지 갔고 그곳에서 촛불을 들고 집회를 이어갔다. 필자는 당시 대학생들 대오에 있었다. 시민들이 미대사관 앞으로 가기를 원했고 미대사관 방향에 있던 사람들. 특히 대학생들은 여학우들을 안쪽으로 보내고 남학우들끼리 모여 미대사관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거대한 시민들의 항쟁 앞에 경찰 저지선을 열렸고 시민들은 미대사관으로 뛰어 갔다. 필자는 아직도 이날을 잊을수가 없다. 촛불을 들고 미대사관 방향으로 가고자 했다. 그리고 길이 열렸다. 처음에는 경찰들이 열어준 느낌이었다. 시민들이 많고 경찰은 숫자가 적었다. 집회공간이 좁아 경찰이 공간을 더 만들어준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뛰었고 필자도 넘어진 여학우들을 일으켜 준 뒤 뛰었다. 그리고 미대사관 앞에 도착했다. 대규모의 한국 시민들이 미대사관 앞으로 가 집회를 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12월 14일. 5만명이 모였던 일주일 전과는 달리 이때는 10만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시청에서 시작한 집회는 길을 돌고 돌아 광화문으로 갔는데 닭장차가 미대사관 방향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미대사관으로 시민들이 가는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인데 필자를 비롯한 시민들은 참 황당해 했다. 필자를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닭장차 위로 올라가 미대사관을 보기도 하고 경찰을 비난 하기도 했다. `닭장차 바리케이트`는 이렇게 시작 되었지만 이후 대규모 집회때마다 보편화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노무현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하지만 연말이 지나도록 시민들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나라 여학생들을 살해한 미군 워커와 니노는 무죄 평결을 받고 미국으로 도망갔으며 소파 개정도 흐지부지.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는 촛불시위는 03년이 되어도 계속 되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1년 정도는 진행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순히 여중생 2명이 죽어서 벌어진 항쟁은 아니다. 2002년의 시민들의 항쟁은 결코 감성적인것도 아니며 단순한것도 아니다. 02년 2월 SaltLake City에서 동계 올림픽이 있었는데 쇼트트랙 경기에서 한국선수가 금매달을 획득 하였음에도 미국선수 오노의 헐리웃 액션으로 금매달을 강탈 당하였다. 이 때 시민들의 반대가 심해 반미정서가 강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 부시가 방항을 하였고 많은 시민들이 부시 방한을 반대했다. 몇몇 대학생들은 미국 상공회의소를 일시 점거하는 등 격렬하게 부시 방한에 반대하였고 특히 고등학생 자치조직인 전고협에서도 부시 방한을 반대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많은 시민들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 한 것이다. 당시 종묘에서 경찰의 폭력진압이 CNN보도에 의해 전세계로 보도 된 적이 있었는데 한국 경찰이 국제적으로 망신 당했으며 시민들의 반미정서만 부추기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그해 6월 한국과 미국의 월드컵 축구경기를 앞두고 수원 월드컵 경기장 근처에 있는 월드컵 문화의 거리에 월드컵 참가국의 국기들이 계양 되어 있었다. 당시 필자는 성조기가 계양되어 있는 계양대에 올라가 성조기를 철거 했던 적이 있었다. 2002년의 어느날. 사람들에게 반미는 자연스런 정서였다.


     다른 장면 하나를 더 보자. 02년 하반기, 최고 인기 연속극은 `야인시대`였다. 안재모 이세은 등이 출연한 야인시대는 김두한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속극이었다. 조선의 주먹 김두한이 일본 깡패들과 싸워 이기는 장면은 시청자들의 스트레스를 해소 해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역사왜곡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크게 노출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김두한이 장년의 나이가 되어 배우가 안재모에서 김영철로 바뀐 이후 부터이다. 03년 초 부터 배경은 해방 이후가 되었다. 그리고 시청률은 크게 떨어졌고 내용은 적나라한 정치적 내용으로 변질 되었다.

     야인시대 2부는 좌우대립과 한국전쟁 등을 그리며 심각하게 편향된 역사왜곡을 내용으로 하였다. 서북청년단 같은 정치깡패들이 좋은 집단으로 그려졌으며 모스크바 3상회의 등 역사적 사실들도 모두 왜곡 되었다. 정진영이 "우리는 신탁통치에 찬성한다! 찬성한다!"라는 구호를 외칠때 너무 웃겨서 텔레비전을 끈 기억이 난다.

     연속극은 픽션이고 허구일 뿐이다. 하지만 연속극을 시청한 일부 시청자는 현실과 드라마를 구분하지 못한다. 야인시대는 그러한 시청자들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결정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야인시대 시청자들은 40년대 유행하던 좌익, 우익 등의 표현을 쓰며 서북청년단이라도 된 듯 욕설과 막말을 하며 인터넷에 `악플`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는 지금까지와 좌파정권 어쩌고 하는 형태로 남아 있다.

     단순히 연속극만의 문제가 아니다. 친일파가 친미파가 되었고 역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옹호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하면 불안해 한다. 당연한 일이다. 98년 사상 처음으로 정권교체가 되자 친일파(친미파)들은 벌벌 떨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5년만 버티자고 했다. 그러나 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재집권은 실패했다. 뿐만 아니라 그 바탕에는 반미정서가 강한 02년 겨울의 시민항쟁도 있었으니 친일파(친미파/기득권세력)들은 근본적인 `위기감`을 느꼈을것이다.

     사실 92년 대선은 어쩌다 한번 내준 5년이었다. 정치구단 DJ는 언젠가는 한번 대통령을 할 인물이었고 97년쯤에는 `비토론`도 많이 사라진 뒤였다. 그래서 5년 뒤에 재집권 할거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02년 대선 결과 한나라당은 재집권에 실패했다.

     이러한 흐름과 야인시대의 시청자들은 이성을 상실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03년 3.1절,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직후인 이날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3.1운동 기념일이다. 그런데 친일파들과 야인시대 시청자들은 바로 이날에 미국의 국기를 들고 시청 앞에서 데모를 했다. 이런 황당한 일은 이후 몇차례 더 있었다. 미국 국기를 들고 한국에서 데모를 하는, 스스로 한국을 미국의 한 주가 되기를 바랬던 이들은 현재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 그 이름도 한국말이 아닌 new right이다.



     여하간 노무현 대통령은 03년 2월 25일 취임 하였다. 하지만 그 5년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민주당 개혁이 필요했는데 아예 민주당을 탈당하고 신당을 만들었다. 미국에 가서 정상회담을 했는데 그 결과가 좋지도 못했지만 무엇보다 결과에 대해 시민들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03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필자는 당시 토요일 낮에 광주로 내려가 5.18 전야제에 참가하고 조선대에서 하루 잔 뒤 아침에 망월동으로 갔다. 일행과 함께 구묘역에서 참배를 마치고 신묘역으로 가려는데 경찰이 막았다. 보통 정부 공식행사는 18일에 하고 다른 지역 참가자들이 망월동을 찾는것은 18일과 가까운 일요일이니 날짜가 다른 날이 많았는데 이때는 18일이 일요일이어서 노무현 대통령이 참가하는 공식행사와 날이 겹쳤다.

     당시 한미 정상회담 이후인데 11기 한총련은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대통령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구묘역에서 신묘역 정문 방향으로 갔는데 당연히 경찰이 막고 있었다. 이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은 출입이 늦어져 공식행사의 시작도 늦었다고 한다. 나중에 가족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생중계를 보는데 대통령이 지각해서 이상하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여하간 당시 신묘역에서 대치하던 대학생들과 경찰은 서로 충돌하지는 않았다. 필자는 당시 항쟁군에 결합해서 신묘역 정문쪽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체대오가 옆 쪽으로 뛰기 시작한다. 경찰도 뛰었고 항쟁군 등도 뛰었다. 서로 잡고, 도망가는게 아니라 그냥 뛰었다.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필자도 전력질주 하며 뛰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곳이 신묘역 후문이었다. 그리고 진입하지 않고 경찰과 대치만 했었다. 물론 경찰이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쭉 대치를 했다. 필자는 경찰과의 대치선에 앉아서 끝까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크게 다칠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이후에 조중동과 언론은 한총련이 노무현 대통령의 진입을 고의적으로 막았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애당초 신묘역 정문 앞에서 경찰이 자리잡고 있었고 한총련은 경찰과 충돌이 거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늦게 도착 한것은 한총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한총련과 경찰이 뒤에 대치한곳은 후문이고 노무현 대통령은 정문으로 들어갔다. 남총련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전남대 강연을 막겠다고 했지만 폭력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개혁을 한다는 목표아래 신당이 창당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노무현의 사당이 되었다. 그 문제의 본질은 정체성이다. 겉으로는 개혁세력이라는 휘황찬란한 포장을 했다. 그러나 04년 총선 승리 이후 국가보안법 폐지 같은 `미국 국무부도 원하는` 기초적인 개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의원들 다수가 신자유주의에 찬성했다. 노무현 정권이 원하는 개혁의 방향은 그의 지지자들이 원하는것과 정 반대방향이었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당시 신당은 당명을 공모 했다. 필자는 지금도 기억한다. 홈페이지를 보면 `참여민주당`이라는 당명이 우세했다. 그런데 공모 해 놓고서 결국 당명은 상부 멋대로 열린우리당이라는 당명답지 못한 이상한 이름으로 지었다. 공모는 왜 했는지 모르겠다.

     04년 총선을 앞둔 3월 12일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인데 그 전 03년 4월 3일 제주도에 간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민 앞에 고개숙여 사과 했다. 4.3항쟁의 정부의 폭력에 대해 사과 한 것이다. 4.3항쟁 당시 경찰을 이끌었던 사람은 조병욱이다. 조병욱의 아들이 조순형(현 자선당 소속 국회의원)인데 조순형이 당시 민주당 대표였다. 탄핵소추를 하려면 2/3이 필요했고 조순형의 민주당이 가담하여 탄핵 된 것이다.

     노무현을 안티한다는 이유만으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힘을 합쳤으니 민주당은 04년 총선에서 망했다. 문제가 더 있다. 03년 대북특검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이다. 민주당이 그렇게 하니 지지층이 떠나는건 당연한 일이다.

     04년 하반기 4대 개혁입법에서 한나라당의 저지에 밀린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는 힘을 잃고 고생한다. 정세가 좋았지만 한나라당과 대연정까지 생각했던 노무현 정권은 맥이 없었다.

     06년을 기점으로 참여정부는 시민들의 지지를 잃게 된다. 98년 어렵게 정권이 교체 되었지만, 독재/친미/반민주 세력에게 재집권을 허용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평택 미군기지의 확정이전을 두고 대추리/도두리 주민들과 충돌이 있었고 대추분교도 붕괴 시켰다. 당시 필자도 평택에 여러번 갔다. 경찰의 폭력은 너무 지나쳤다. 그해 가을에 사회대 학생회장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후배를 만났는데 평택지킴이라고 한다. 당시 평택은 반미운동 하는 사람들만이 아닌 다수의 시민들이 반대했다. 미군기지 확장이전이 연기 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반미운동 하는 사람들만이 저항해서 미군이 물러설만한 집단은 아니다.

     또 하나. 한미 FTA 또한 많은 시민들의 저항을 받았다. 06년 7월 12일 필자는 비가 내리는 와중에 비옷을 입고 집회에 참가하여 사수대에 결합하여 시내를 뛰었던 기억이 있다. 시민들이 지지해 준 싸움은 패배하지 않는다. FTA는 아직도 국회에서 비준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와 비준이 어려운 지형을 시민들이 만든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완패 한 열린우리당은 사실상 와해되는 과정을 겪는다 결국 임종인 의원을 시작으로 천정배, 김한길 의원 등이 연속 탈당 하면서 힘없이 와해 된다.

     07년 10월초,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나 정상회담을 하였지만 한나라당의 재집권은 이미 확실해 진 다음이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후보의 범죄사실이 명확해졌음에도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변하지 않았고 득표력으로 연결 되었다. IMF로 퇴출 당한뒤 10년만의 재집권이었다.

     이명박 정권의 구조적인 문제가 명확한데도 집권을 한 배경은 노무현 정권에게도 문제가 있다.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강부자-고소영 내각, 광우병 쇠고기 수입개방, 말도 안되는 대운하 같은 문제와 수도와 방송의 민영화 같은 문제는 당연히 나오는 것이다. 지금 시민들은 정권을 비난하고 있다. 07년 대선에서 투표만 잘 했을 쉬울 일을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든 것일까?



     08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을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싶다며 김해 봉하마을로 갔다. 역대 대통령들과 비교할 때 퇴임시 나이가 젊어 퇴임후 고향에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것 같이 보였다. 심지어 그가 사는 봉하마을은 관광명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Happy ending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지후 총선에서 친박 의원들을 대거 낙천 하였다. 오죽하면 `친박연대`라는 정당명이 나왔을까. 공기업과 정부 요직은 측근들로 채우는 황당한 인사를 했다.(위클리경향 참고) 이명박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르겠다. 최근에는 친박연대 의원 3명이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뿐인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대결했던 민주당 김민석 전 서울시장 후보를 구속했다.

     정치인 뿐만 아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개방에 항의하며 촛불을 들었던 수만은 시민들의 저항에 밀려 자신이 스스로 사과를 해놓고 분위기가 잠잠해지자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있다.

     이런 정치보복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까지 이어갔다. 08년 4월 18대 총선에서 김해에서 민주당 소속의 후보가 당선되었다. 민주당은 부산에서도 당선하여 영남에서만 2석을 얻었고 낙선자들의 득표력도 낮지 않았다. 민주당은 제주도와 강원, 충청도에서도 두루 당선되며 완패한 선거임에도 전국정당만큼은 지켰는데 한나라당은 호남과 제주에서는 당선자도 없고 충청도에서도 참패했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 모양` 못지 않은 정적이 될 법도 하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터넷을 통해 정치적 의견에 목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결국 대통령의 정치보복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까지 이어졌다. 측근들을 수사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사법 처리 하려고 했다. 지난 12월 주간신문인 일요신문에는 `박연차 리스트`를 보도 하며 4월 재보선을 앞두고 그때가서 터뜨릴 계획이라는 보도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족들의 수사는 이미 4.29 재보선을 앞두고 예정되어 있었다. 물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환이 확정되고도 4.29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완패 했다. 모든 선거구에서 낙선했고 광진구의 시의원 선거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표분산으로 얻은 어부지리였다.

     측근들이 구속되고 친형도 구속되었다. 오늘은 부인 권양숙 여사의 2차소환이 예정되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결국 정신적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오늘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이번 문제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간략하게 적어보고자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돈을 받거나 부패 했다는 의혹에는 동의 할 수 없지만 돈이 오간것은 분명해 보인다. 권력에 돈은 꼭 따라다니는 문제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것도 문제이며, 어떻게든 연계가 되었으니 그것은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더 큰 부패, 범죄를 하는 사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죄를 묻는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치보복은 한동안 많이 줄어들었다. 정치보복의 가장 큰 희생자인 DJ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것을 없애려고 했기 때문이다. 정치보복은 우리 정치에서 반드시 없애야 한다. 70~80년대에 보던 정치보복을 21세기가 된 지금도 보아야 하는 것은 슬픈일이 아닐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너무 지나치게, 너무 대놓고 정치보복을 하고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반성해야 한다. 이번 서거를 계기로 정치보복을 이 땅에서 없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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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플최지나|2009.05.23 22:58
인터넷에 추모리본이 처음 나왔을때 ▶◀(검은색 리본)이 ▷◁(하얀색 리본)으로 바꼈다가 ▩(삼배)로 최종 결론 났는데.. 대부분 검은색 리본을 계속 쓰네요.. '세로짜기 삼배'를 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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