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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재와 문화미래포럼에 한예종 학생이 묻는다.

김도훈 |2009.05.30 01:38
조회 208 |추천 0

변희재 씨와 문화미래포럼에 한예종 학생이 묻는다

 

당신들의 문화는 ‘진화’ 하는가.

 

글이 길지만 끝까지 읽으면 다 ‘공부’ 되는 글이다.

 

모색이란 ‘일이나 사건 따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실마리를 더듬어 찾음’ 이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 더듬어 찾는 행위는 문제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들어 있고 이 행위 자체가 전망을 내포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와 관련한 악소문은 익히 들어왔으나 그 상황이 이처럼 심각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사실 그러한 상황에 대해서도 한예종 학생인 나는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글은 한예종을 둘러싼 모함에 대한 나의 적극적인 공부의 결과물이다. 2008년 12월 16일 있었던 문화미래포럼의 대토론회 문서를 읽고 공부한 결과이고 이 글을 시작으로 계속 작성 될 것이다. 한 가지 바랄 것은 한예종을 ‘좌파 양성소’ 라 매도한 문화미래포럼 혹은 변희재 씨가 이 글을 ‘공부’ 하여주길 바란다. 원래 공부란 나를 위한 것이지만 문화미래포럼의 ‘깨달음’ 을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럼 대토론회 문서를 보면

 

‘문화미래포럼 2008 매니페스토’ 를 보면 ‘한국문화미래포럼은 문화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추구야말로 인간의 삶을 규율하는 근본 원리’

 

라는 신념을 밝히고 있다. 포럼 회원 일동이 동의한 내용이고 이 문장 하나가 문화미래포럼의 문화에 대한 태도나 자세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민주주의’ 와 ‘시장’ 이다. 민주주의가 현존하는 가장 좋은 체제라는 것에는 백번 동의한다. 분명히 밝혀두지만 한예종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 적은 없다. 투표로써 학생회장을 임명하고 자신의 의견을 떳떳하게 나타낸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관련된 이론은 수도 없이 많고 문화미래포럼 매니페스토의 글 등을 미루어 보자면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대중이 방관자에 머무는 체제’ 라 해석될 수 있다. 문화미래포럼은 이 문단에서 침착해 지길 바란다. ‘대중이 방관자가 되는 것’ 은 공식화 된 민주주의와 관련된 이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서 한시름 놓자. 한예종은 문화미래포럼으로부터 ‘좌파’ 라 불릴 이유가 없다.

‘시장 경제’ 란 단어를 살펴보자. 대개 민주주의에 따르는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 라 했을 때 문화미래포럼 일동은 ‘문화예술에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적용’ 해야 함을 주장한다. 한예종의 매점은 권장소비자 가격에서 50원 정도를 할인해준다. (왜 할인 하냐고 따질 것이면 E-마트에 가보길 바란다.) 담배는 예외 없이 완전 경쟁 시장을 따른다. 장학금을 받지 않는 이상 학비를 전부 내고 수업을 듣는다. 역시 한예종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허나 문화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를 따라가게 된다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문화의 질적인 성장과 다양성 보다는 양적 확대만이 존재 할 것이며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는 문화만이 수용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 것이다.

 

실제로 복거일 문화미래포럼 전 대표가 쓴 ‘문화의 진화와 자유주의’ 라는 글을 보면

 

‘진화의 관점에서 살펴야 문화의 본질이 비로소 드러난다.......서로 경쟁해서 보다 나은 것들이 살아남아서 널리 퍼질 수 있어야.......강조되어야 할 것은 자유주의가 문화의 진화에 가장 어울리고 호의적인 이념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만이 진화에 필요한 변이들을 충분히 공급하고 그것들 가운데 가장 나은 것들을 골라서 전파시킬 수 있다.’

 

문화에 ‘적자생존’ 의 원리를 적용시키는 것은 결코 다양성을 위함이 아니다. 사실 문화에 진화론을 적용시키는 것은 ’보다 나은 유전자‘ 로 살아남기 위해 ’자기 규제‘ 를 전제로 하는 입장이다. 자기 규제 혹은 자기 검열이란 스스로가 자연 상태에 더 잘 어울리도록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선택의 주체란 결코 대중이 아닌 ’자본주 혹은 권력 주체‘ 이며 이들의 겸열에서 통과해야만 ’보다 나은 문화‘ 로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문화 진화론은 현실에서 이미 두 가지 오류를 내포한다. 첫 번째가 자연 선택(적자생존)의 결과가 다양성을 향하는 쪽으로만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현실을 ‘자연 상태’ 라 규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문화미래포럼에서 열린 토론회의 문서( 강봉석 - 새 정부 문화 비전과 중점 과제) 를 보면

 

‘창작 작품의 지원은 하되 정부는 지원의 책임이 있는 것이고......’

 

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부의 힘보다 자본의 논리, 즉, 대기업의 논리가 더 정당화되는 시대이다. 실제로 초국가적 기업이 국가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우리는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단지 ‘문화의 지원’ 이 ‘정부’ 에만 국한 될 것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다. 대기업들은 앞 다투어 문화에 투자할 것이고 예술가들은 창작의 지원을 받기 위해 줄을 설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정부 혹은 기업의 지원을 받으려면 이들의 선택을 받아야 하고 ‘자기 검열’ 을 해야 한다.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가 거세된다.

 

즉, 복거일 전 문화미래포럼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풍부한 밈(meme)들이 공급되어도 자본의 활발한 선택 과정으로 인해 예술의 실험정신이 제한된다.’ 는 것이고 ‘시장의 선택에서 살아남은 문화는 효율적 전파’ 가 이루어진다. 자본주 혹은 기업은 대중의 눈이 가는 모든 곳에 선전(propaganda)를 제공 할 것이고 수용자는 별다른 노력 없이 선전에 노출된다. 수용자로써 선택의 권리도 박탈당한 채 틀어주는 음악에 춤을 춰야 한다. 이런 현상은 나치나 독재에서 흔히 발견된다.

 

사실 이러한 ‘진화론’ 적인 입장을 가장 완벽하게 수용한 사람은 히틀러이다. 그는 거의 부정 없이 세계적인 악마로 불리고 있고 사람간의 우열이 있음을 주장하며 열등한 민족의 말살을 자행한 인물이다. 그 결과는 5백만 유태인의 학살이였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입장은 문화를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것으로 나누는 입장이다. 자연 선택에서 살아남은 문화는 ‘우월한 것’ 이고 ‘탈락한 문화는 ’열등한 문화‘ 라는 주장이다.

 

‘밈(meme)들과 밈들이 경쟁하며 성공적으로 적응 한 것들이 선택되어 널리 퍼진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자유주의만이 진화에 필요한 변이들을 충분히 공급하고 그것들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을 골라서 전파시킬 수 있다.’

 

라고 문화미래포럼의 문서에 적혀있다.

 

문화란 역사와 공간에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들은 결코 개별적인 것으로 취급 될 수 없고 근원적으로 땔 수 없는 하나(one)의 끊임없는 변화(되기) 이다. 그 변화의 과정이 ‘진보적’ 이였다고 해서 그 전 단계의 예술이 가치 없거나 ‘열등한 것’ 은 결코 아니다. 문화에서 ‘변화’ 란 보다 나은 것을 찾는 행위가 아니라 ‘보다 새로운 것’ 을 찾는 행위이다. 끊임없는 ‘되기’ (becoming) 를 반복하며 ‘진보’ 하는 것이다. 쓸모가 없어졌다고 ‘퇴화’ 하는 유전학적 근거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이다.

 

문화미래포럼이 주장하는 문화의 ‘진화’ 는 다양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백 번 좋게 말해도) ‘보편성’ 을 향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의 담론 속에서 예술가는 주체적인 생산자가 아니라 ‘하청 받는 공장‘ 으로 전락한다. 앤디 워홀의 공장(factory)는 적어도 ’하청‘ 을 받아 ’캠벨 통조림‘ 을 찍어내지는 않았다.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신자유주의( 이런 단어는 개인적으로 정말 싫어한다. 하지만 글의 전개를 위해 사용한다. 손, 발이 오그라드는 사람이 있더라도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의 담론에서 문화의 ‘식민화’ 가 이루어진다. 쉽게 얘기해서, 대한민국에 A 라는 기업은 총 자산 100원으로 국내 기업 1위이다. 하지만 미국에는 B 라는 기업의 자산이 한화로 10000원에 이른다. 이 두 기업은 각자의 자본으로 예술가를 지원해 준다. 결국 A 기업의 ‘문화’ (선전)은 B 기업에게 밀리게 되어있다. 그 이유는 자본의 힘이다. 앞서 예기한 듯이 문화 공급의 주체는 예술가가 아니라 자본이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이란 우열이 확실한 분야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막을 수는 없다. 콤플렉스가 있는 단어라 사용을 꺼리지만 ‘식민화’ 를 면치 못한다.

 

‘자유로운 환경에서만 문화는 풍요로워진다. 개인들이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그래서 문화의 지속적 진화를 보장한다. ’ <복거일 - 문화미래포럼 2008년 12월 16일>

 

자유로운 환경이 제공해 주는 가능성에는 동의 하지만 과연 문화미래포럼이 이야기하는 ‘자연 상태’ 가 자유로운 환경인가. 개인들의 자유로운 실험을 지향하는 그들이 왜 교육의 ‘자유성’ 은 지향하지 못한 채 아리스토텔레스의 외침을 부정하며 ‘정치는 교육에 간섭해야한다’ 를 주창할까. 사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무엇인가.

 

문화미래포럼 대토론회의 문서를 보면

 

‘오늘의 대토론회 이후 다시는 좌우 이념 논쟁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입니다......우리가 먼저 이념논쟁의 불씨를 집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2008년 12월 16일

 

불과 4개월 만에 27일 날 예정되었던 포럼의 발제를 맡은 변희재 대표가 한예종에게 ‘좌파 일색’ 이라며 원색적인 발언을 하였고 이후 정진수 성균관대 교수는 ‘좌파 양성소’ 라는 발언을 하였다. 금붕어 기억력이 3초다.

 

이 글은 한예종의 일개가 쓴 것이다. 어떠한 대표성도 지니지 않는다. 문화미래포럼은 이 글을 읽고 자신들의 정체성과 관련지어 한예종을 ‘좌파’ 라 비난한 이유를 제공해 주었으면 한다. 공부란 계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기에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나보다 더 많이 공부하길 바란다. 결론에 이르러서야 제목에 답한다. ‘문화는 진화가 아니라 진보한다.’

 

예술과 교육이 공존하는 자리에서 이념을 벗어라. 바벨탑에 이름을 새겨도 너희들의 신(神)은 면죄부를 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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