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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봉쇄된 광장, 연행되는 인권]을 보고...

박민재 |2009.06.05 13:21
조회 125 |추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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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입니다.

정도를 넘어서 행사되거나 남용될경우에는

국민들에게 미칠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책임은 일반 국민들의 책임과는 달리

특별히 무겁게 다루어야 하는것입니다.

이점을 국민여러분과 함께 공직사회 모두에게 다시한번 명백히 하고자합니다.

 

부마(釜馬)민주항쟁 투입 해병대의 ‘아름다운 휴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


-당시 제 7해병 연대장 '박구일' (후일 17대 해병대 사령관 역임)


맞아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

이처럼 공수부대의 활동상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려진 반면

해병대가 어떻게 시위진압을 했는지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해병대 1사단 7연대가 부산대학교를 주둔지로 삼았다는 사실만이 공개됐을 뿐이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병대의 진압과정은 충정훈련으로 단련되고 최루탄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와는 매우 달랐다.

당시 군 작전상황에 대한 기록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기록물 존안(存案) 당시인 1980년 ‘향후 30년 동안의 기밀’로 분류돼

2010년에 빛을 볼 예정으로 육군 문서보관소에서 먼지만 들이켜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학술과장인 이동일씨는

“광주 민주화운동과 달리 부마항쟁에 대한 군 관련 기록은 전혀 공개된 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한 해병대 관계자들과

현장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3공수여단의 대규모 병력과 달리 해병대는

7연대 73대대라는 소규모 병력이 계엄 1진으로 투입돼 시위진압에 나섰다.

7연대 71대대와 72대대는 10월26일 수영비행장 투입 직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맞아 지역 관공서와 부산대로 이동했다.

해병대는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는 달리

시위진압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던진 벽돌과 돌멩이에 맞아 피를 흘려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으로만 시위대를 밀어냈다.

제일 앞줄은 간부와 병장이,
두 번째 선은 상병이,
그 뒤로 일병, 이병이 서서 총기 멜빵끈으로 서로 팔을 동여맨 채 시위대에 대응했다.
앞줄이 돌에 맞아 쓰러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섰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등병은 앞에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소대장으로 현장에 투입됐다는 김동일(53)씨는

“전경은 말할 것도 없고 육군도 시위진압훈련을 해왔지만,

우리 해병대는 한 번도 진압훈련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런(몸으로 때우는) 방식이 최선이었다”면서

“총기를 뺏기지 않기 위해 멜빵끈을 최대한 늘려

옆 동료와 팔을 동여매고 무조건 전진만 했다”고 회고했다.

학생시위대의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해병대원들이 계속 전진하자

나중엔 주변의 시민들이 나서서 시위대를 말리기까지 했다.

당시 박구일(뒷날 해병대사령관 역임) 7연대장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구일 연대장이 장병들에게 직접 정신교육을 했던 내용은 해병대 예비역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박구일씨는 후에 14대 국회에 진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거쳐 1992년 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박 전 의원은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도 당시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거부했다.

대학생으로 시위대에 참여했다는 김현숙(48)씨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맞기만 하는 해병대와는 재미가 없어 시위를 포기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고 전했다.

 

 


독일에 계신 분이 이런 글도 적어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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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긴장'사건

지금으로부터 약 47년 전 1962년 5월 31일에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처형이 있었습니다.


나치 친위대의 중령이었으며 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학살한 장본인 중의 하나였던

칼 아돌프 아이히만’ (Karl Adolf Eichmann)은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나는 전쟁 규칙에 따라야만 했다”를 말했습니다.  


재판 당시 아이히만의 변호사들도 아이히만은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법정에서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구형한 검사는 아이히만의 범죄는 바로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상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었던 아이히만은 결국 사형을 당했고,

역시 상관의 명령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학살’했어야 했던’,

나치 전범들은 아직까지도 용서받지 못하고 추적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런 영혼 없는, 개인의 양심을 저버린 ‘인간’들의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에 대해서

'상부의 명령이었다' '그 당시엔 합법이었다'라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전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나치 전범들에 대해서는 공소 시효가 없습니다.



아주 최근, 최후의 나치 존 뎀얀유크(89)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2009년 5월 12일 재판을 위해 독일에 이송되었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시킨다고 시키는대로만 한다면

우리가 기계들과 다를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인간이다.

-존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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