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거룩한 전통이란 성서를 의미하며, 신조를 의미하며, 세계 공의회의 교령과 교부들의 저서를 의미하며, 교회법과 예식서와 성화상을 의미한다.
정교회는 과거로부터 유산을 존중하는 한편 과거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 모두 똑같은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성전의 다양한 요소 중에 독특한 탁월성은 성경에, 신조에, 세계 공의회의 교의적 결정들에 속한다. 이는 절대적이고 바뀌지 않는 것으로 누락되거나 개정될 수 없는 것으로 정교회는 받아들인다. 성전의 다른 부분은 같은 권위를 갖지 않는다. 제이씨나 예루살렘 교령은 니케아 신조와 같은 수준에 있지 않고 아타나시오의 저서들이나 신신학자 시메온 신조와 같은 수준에 있지 않고 아타나시오의 저서들이나 신신학자 시메온의 작품이 성요한 복음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지도 않는다.
성전은 성령의 증언이다. 성령의 끊임없는 혁명과 기쁜 소식의 선포이다. 성전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교회 안에서 생활해야 하며 그 안에서 은총을 주시는 주님의 현존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성령의 속삭임을 느껴야 한다. 성전은 보수적인 원리만이 아니다. 즉 그것은 우선적으로 성장과 쇄신의 원리이다. 성전은 성령의 지속적인 머무름이다. - 플로로프스키
성경은 교회안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과 성전을 구분해서는 안되는 이유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경의 권위는 교회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책들 중에서 성경으로 확정한 것은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을 권위있게 해석할 수 있는 것도 교회뿐이기 때문이다. 정교회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정교회로 받아들여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약속은 ' 나는 자모이신 거룩하고 정통적이고 보편적인 교회에 의해 취해졌고 지금도 취해가고 있는 해석에 따라 성경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겠다.' 라고 한다.
전체 공의회의 교의적 결정은 틀림없는 반면 지역 공의회나 개별적 주교들의 교의적 결정은 언제나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들이 전체 교회에 받아들여진다면 그들은 보편적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 교부들' 에 관하여 완전히 과거에 속하는 작품들의 좁은 창구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 자신의 세대는 새로운 바실리나 아타나시오를 배출해 내지 않을 것인가? 더이상 교부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이 교회를 버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교회법과 교회교리 사이에는 본질적인 연관이 있다. 교회법은 단순히 각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실질적인 상황에 교리를 적용하기 위한 시도이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교회법은 성전에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16세기의 서방 그리스도계의 문제점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은 신학과 신비주의, 예배와 개인봉헌 사이의 분열이었다. 정교는 각 부분대로 그러한 분열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다. 진실된 정교회 신학은 신비스럽다. 신학에서 분리된 신비주의가 주관적이고 이단적이 되듯이 신학은 신비적이 아닐 때 그 말의 나쁜 의미에서 '학구적'인 건조한 스콜라주의로 떨어진다. 교의는 기도하지 않고 이해될 수 없다. 신학자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아는 사람이며 성령과 진리 안에서 기도하며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에바그리오는 말했다. 성 막시모스가 표현했듯이 행동이 없는 신학은 악마의 신학이다. 신조는 그것을 살게 하는 사람에게만 속한다. 믿음과 사랑, 신학과 생활은 나눌 수 없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진정한 고백을 할 수 없으며 성전의 내적 정신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그분을 아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정교회는 육신이 성화되며 영혼과 함께 변모될 것이라고 이해하였기에 성인들의 유해에 대하여 상당한 공경을 하는 것이다. 로마가톨릭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일생동안 성인들의 몸 안에서 보여진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이 죽었을 때 그들의 유해 안에 살아있다고 믿으며 하느님께서 거룩한 힘의 통로로 그리고 치유의 도구로서 유해들을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어떤 경우에는 성인들의 몸이 부패되지 않고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으나 그렇지 않은 곳에서도 정교회는 유해에 대하여 똑같이 상당한 공경을 한다. 유해에 대한 공경은 무지와 미신의 결과가 아니라 육신에 대한 고도로 발전된 신학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진정한 목표는 하느님 성령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금식과 성무, 기도와 자선, 그리고 다른 선행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러한 것들은 하느님의 성령을 받는 도구일 뿐인 것이다.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가져다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사랑의 행위뿐이라는 것을 잘 명심하라.
로마가톨릭 신학이 불일치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점에서이다. 로마신학에 따르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성부께서 신격의 고유한 근원임을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자 역시 하나의 근원이기에 신격에 있어서 유일성의 원리가 더 이상 성부의 위격일 수 없기 때문에 로마는 신성에 있어서 셋 모두의 위격이 공유하는 본성에 있어서 유일성의 원리를 발견한다. 정교에 있어서의 하느님 유일성의 원리는 위격적이다.
성령은 성자에 의해서 나타나지만 성자로부터 발하지는 않는다. 성부는 유일한 기원이자 근원이며 신성의 원인이다. 성부처럼 성자도 원천이며 원리이거나 신성의 근원이라면(정교회는 그렇게 묻는다) 두개의 독립적 근원과 삼위일체에 있어서 두 개의 다른 원리가 있다는 것인가? 분명히 아니다... 성부와 성자의 위격은 합병되고 혼돈된다. 가파도키아 교부들은 '유일성' 을 성부의 뚜렷한 특징으로 여겼다. 그분만이 성삼위 안에서 원리이며 근원이시다. 그러나 서방의 신학은 성부의 뚜렷한 특징을 성자에게로 돌리고 두 위격을 하나로 혼돈케 한다. 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은 일체의 위격적 원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서방은 하느님의 본성에 있어서 일원론의 원리를 발견한다. 라틴 스콜라신학에서(정교회에도 그렇게 보이지만) 위격들은 공통 본성에 의해 가리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하느님은 구체적이고 위격적인 면에서는 그 정도로 생각되지 않으며 다양한 관계들이 구별되어진 하나의 본성으로 생각되어 진다. 하느님에 대한 사고 방식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풍부한 발전을 하게 되는데 그는 위격들을 관계들과 동일시하기까지 이르렀다. 정교회 사상가들은 위격에 대한 빈약한 사상을 발견한다. 관계들은 위격들이 아니라 성부,성자, 성령의 위격적 특성이라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레그리오 팔라마스가 표현했듯이) '위격적 특성은 위격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위격을 특징짓는 것이다.' 관계들은 위격들을 가리키는 한편 각자의 신비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인간이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은 천사보다 낮게 하는게 아니라 높게 한다고 그레고리오는 주장한다. 사실 천사들은 '순전한' 영이지만 인간은 지능적일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성질이 천사의 성질보다 더 완전하며 더 풍부한 잠재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의 소우주이며 다리이며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의 교차점이다.
정교회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같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은총의 교리도 거부한다. 하느님은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정교는 협동 또는 공동작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선악 사이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인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래서 앞에 놓인 소명을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었으나 아담은 거절했다. 하느님께서 제시한 길을 따라가는 대신 아담은 옆길로 갔고 하느님께 불복하였다. 아담의 타락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불복에 있다. 아담은 자신의 의사를 성스러운 뜻에 대치시켰고 자신의 행동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결과적으로 존재의 새로운 형태가 지상에 나타난 것이다. 즉 질병과 죽음의 형태이다. 불멸하시며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을 외면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본성에 반대되는 상황에 몰아넣었고 부자연스러운 상황은 자기 존재의 부득이한 붕괴로 이끌었고 결국은 육체적 죽음으로 이끌었다. 아담의 불복의 결과는 모든 후손들에게까지 뻗쳤다. 성바울로가 결코 주장을 멈추지 않듯이 서로가 일원이며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전체 몸이 고통을 겪는 것이다. 인간의 이 신비한 일치의 덕행안에 아담뿐 아니라 온 인류가 죽음에 종속되었다. 타락에서 따라온 붕괴는 단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아담과 후손들은 죄와 악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새로운 인간은 죄가 어느 곳에서나 우세한 세상 안에서는 악을 행하기 쉽고 선을 행하기는 어려운 세상에 태어난다. 인간의 의지는 '욕망' ,' 욕정' 이라 부르는 것 앞에 희미해지고 약화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 즉 원죄의 영적인 결과에 모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정교는 타락 이전의 인간의 상황에 대해 덜 강조된 사상을 가지고서 타락의 결과에 대한 관점에서 서방보다 덜 가혹하다. 아담은 지식과 완전함의 위대성에서가 아니라 개발되지 않은 단순성의 상태에서 타락했다. 하느님의 모습은 죄에 의해 왜곡되거나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정교회는 대체로 사람들은 아담의 타락과 죽을 운명을 자동적으로 물려받았으나 그의 죄는 물려받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아담을 모방하는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유죄일 뿐이다. 많은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타락하고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엇을 하든지간에 원죄에 의해 더렵혀져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정교회는 세례를 받지 않은 아기는 원죄로 덮여 있으므로 정의로우신 하느님에 의해 지옥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길 속에 들게 된다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정교회가 타락 후의 인간이 아직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아직도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분명 인간의 죄가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 인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깨드릴 수 없는 장벽을 쌓았다고 믿는데는 서방에 동의한다. 죄는 하느님과 일치에 이르는 길을 막았다. 인간이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었기에 하느님이 인간에게 오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는 하느님의 자비의 행위이며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행위이시다. 많은 동방의 작가들은 육화를 이러한 관점에서 보고 있으며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인간성에 대한 그분의 사랑 안에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육화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로 여겨져야 하며 단순히 타락에 대한 응답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 '동방정교회' 라는 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