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와 시민에게 주는 삼촌의 교양편지(1)
민주야, 넌 이제 한 학기면 대학의 울타리를 떠나 학생에서 일반인의 신분이 되는구나. 시민아, 넌 이제 몇 달이면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대학의 품으로 돌아가겠구나. 너희들에게 장가도 못 가고 예금통장은 텅 빈 채 나이만 먹은 삼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자칫하면 ‘실패자의 넋두리’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다만 그래도 너희 사랑하는 조카들에게 줄 것이 있다면 아마도 지식인 것 같구나. 그래, 삼촌은 얼마나 길어질 지 모르지만 민주사회의 당당한 시민으로서 알아야 할 교양과 지식들을 너희들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 이 편지들을 모아보면 아마 삼촌의 반세기에 가까운 경험과 배움들을 나눠줄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이 편지들의 모음을 ‘민지’라고 하고 싶구나. ‘민주와 시민에게 주는 교양편지’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따온 것이기도 하고, 민지(民知) 즉 시민들에게 필요한 지식이기도 하며, 민지(悶知) 즉 고민하는 지성인의 편린이기도 하며, 민지(愍知) 즉 세상에 내놓기에는 민망한 작은 앎이기도 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아직 없다면 어서 빨리 갖추어야 할 민지(敏知)이기도 하지. 참, 민지(玟智)는 이 삼촌이 옛적 사모하던 여인의 이름이기도 하니 참 우연치고는 공교롭구나. 사설이 너무 길면 김빠지는 법이니 바로 하고 싶은 이야기로 들어가겠다.
첫째 모듬 현대사회와 대중문화 modern society & mass culture
현대를 살아가는 내 조카들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현대사회와 대중문화’란다. 현대사회와 대중문화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치 물고기와 물의 관계와 같단다. 우리가 싫어하건 좋아하건 그와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주어진 환경을 떠날 수 없지. 물 밖으로 빠져나온 물고기가 그제서야 고통스러워하며 펄떡거리듯 우리도 이 환경을 벗어나면 고통스러울 거야. 고통(苦痛, pain)은 생물학적 통증 외에도 익숙치 않음과 미지에 대한 두려움, 욕망의 좌절, 필수적인 것의 결핍 등이 초래하는 정신적인 이유로부터 오는 부분이 더 많을 것 같다.
현대사회와 대중문화 속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그 환경에 대한 성찰을 한다는 것은 데카르트적 각성과 같은 의미를 갖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원숭이가 비로소 인간이 되는 위대한 진화의 순간과도 같은 거지. 그 성찰은 현대사회와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고민한다는 의미야.
인류가 지난 세월동안 이룩한 기술적 발전과 경제적 생활여건의 개선은 놀라운 수준이란 건 너희들도 인정하지? 지금 미국에서 주어지는 실업수당으로 한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수준은 불과 100년 전 영국의 귀족들이 평균적으로 먹을 수 있었던 음식과 비슷하다고 해. 새벽부터 밤까지 진이 빠지도록 일했던 사람들은 이제 주 48시간의 ILO(국제노동기구) 기준에 근접한 근무조건을 가지고 법적으로 휴식을 취할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어. 여자와 어린이, 빈곤층에게는 투표권도 없던 시절이 불과 100년 이내까지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지. 기술문명의 진보는 쓸 수 있는 개인적인 시간의 증가를 가져다주었어. 물론 아직도 지구상에 사는 65억 인구 중에는 아직 자동차를 한번도 타 보지 않고, 전화를 한번도 써보지 못한 인구가 20억은 될 거라고 하더구나. 그러나 우리가 지금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니 ‘지금, 그리고 여기’ 살고 있는 우리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그래. 물질적, 사회적 조건이 좋아졌지만 그 반면 과연 인간이 진실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변모해 왔는가에 대한 질문 또한 점점 날카롭게 제기되고 있단다. 물질적 풍요는 자체적인 메카니즘을 가지고 소비의 확대재생산을 지향하지. 성찰과 반성을 하기 전에 자신들이 제공하는 경제와 문화의 시스템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와 주기를 원하거든.
반대의견도 많이 있겠지만 인류의 문화는 조장된 상업문화의 보이지 않는 집요한 유혹에 의해 하향 평준화 일로를 걷고 있다고 비판하는 문명비평가들도 많아. 상업문화의 패러다임속에서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대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이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 그러나 현대사회와 대중문화는 오히려 사회의 결속력을 반대하는 측면으로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그 역시 재미있는 역설이야.
대중은 형성과정 자체에서 이미 ‘표준화’라는 이름의 조작되어진 성격을 가졌지. 독립된 개체로 만들어졌으되 정신적 결속력이 약해진 대중에게는 소외라는 문제도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로 다가왔어.
이번 모듬에서는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대중과 대중문화, 소비의 사회가 가지는 메카니즘과 문화적 특성 등을 이해하면서 스스로에게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을 개발해보기를 바랄게.
첫 번째 생각할 거리 = 현대사회는 누구로 구성되어 있는가?
- 대중(Mass)과 대중매체(Mass Media)
대중(mass)이란 누구인가?
대중은 지위, 계급, 직업, 학력, 재산 등의 사회적 속성을 초월한 불특정 다수들의 집합체를 말해.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각종 사회집단에 몸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대중의 일원이지. 칼 만하임은 이렇게 구분해.
公衆(공중)은 자주적-이성적 특성을 가지지만
大衆(대중)은 동질화, 평준화, 정서화, 비합리성의 특성을 지니며, 지배자의 상징(symbol) 조작에 쉽게 움직이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
多衆(다중)은 특정 성격을 부여하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을 지칭하고,
民衆(민중)은 국가나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피지배계급으로서의 대중을 의미하지.
群衆(군중)은 공통적인 규범이나 조직성은 없으나 일시적인 관심에서 우연적 동질성을 가지게 된 집단이므로 익명성, 무책임성, 맹목적 행동성향을 지닌 군중심리에 따라 움직이는 집단이지.
이제 ‘~중’이 어떻게 다른지 접수했겠지? 뭐? 뇌리에 ‘복사하는 중’이라고? ‘김태희나 이민호를 생각하는 중’이라면 큰일 나! 글로벌 키드답게 메간 폭스와 다니엘 래드클리프라고? 민주야, 너 연하남 취향이 있구나?
[해설] 칼 만하임(Karl Manheim 1893-1947) 헝가리 태생의 사회학자. 지식사회학을 처음으로 개척하고 , 등의 저서를 남겼다. 나치 집권 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전투적 민주주의자로 활동하면서 유네스코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리스먼
리스먼은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각기 상이한 인간유형이 탄생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사회적 성격의 유형을 크게 3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원시적 전통사회는 전통과 과거를 행위모형의 주요 기준으로 삼은 전통지향형(tradition directed type)이라고 했다.
둘째, 산업화 사회는 19세기 초기 공업시대까지 가족에 의하여 일찍부터 학습된 내면화된 도덕과 가치관을 인간행위의 주요 기준으로 한 내부지향형(inner directed type)이다.
셋째, 현대사회에서 현대인은 또래집단·친구집단(peer group)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영향에 따라 행동하는 타자(외부)지향형(other directed type)이다.
고독한 군중은 바로 이러한 현대 고도산업화에 따르는 대중사회에 있어서의 특유한 성격유형이다. 현대인은 타자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격리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고독한 군중’은 외관상의 사교성과는 달리 내면적인 고립감에 번민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성격을 말한다. 타자들로부터 인정을 못 받는다는 것이 현대인에게는 가장 심각한 불안이 된다.
리스먼은 이같이 사회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한 다음, 다시 인간을 적응형-아노미형-자율형이라는 세 가지 보편적인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 적응형은 전형적인 전통지향형, 내적지향형 및 타인지향형의 사람들로 사회의 요구에 잘 순응하는 인간형이다.
둘째, 아노미형은 사회의 규범을 깨뜨리는 범죄자와 같이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을 따를 능력이 없는 인간형이다.
마지막, 자율형은 사회의 행동규범에 동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이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인간형이다.
자율형 인간, 멋지게 들리지? 문제는 점차 타인지향적으로 변해 가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자율형 인간이 나타날 수 있는가야. 리스먼은 직장에서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억지로 미소를 짓는 등의 행위(거짓인격화)와 사회가 분업화되면서 교제하는 사람의 폭이 좁아지는 현상(강요된 사생활화) 등이 사람의 자율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정신분석학의 방법을 빌려 지적하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놀이와 여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설파해. 인간의 놀이 속에는 다양한 능력개발의 기회가 있으며 거기서 개발되는 능력은 창조적이면서도 유토피아적인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는 거야. 결국 개인은 여러 가지 놀이 경험을 통해 스스로 선택하고 자기 나름의 성격을 형성할 수 있는 자율성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 이쯤에서 요한 호이징가의 가 생각난다면 1등급 대학생일 가능성이 아주 많아.
리스먼이 을 쓸 당시의 미국 사회가 반드시 타인지향형의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그는 젊은 층과 대도시 그리고 중간계급 사람의 성향을 토대로 타인지향형이 미국 사회 전체에서 주도권을 잡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어. 50여년이 지난 오늘날 고독한 군중으로 구성된 사회는 세계 어디서나, 산업화가 발전한 사회 어디서나 볼 수 있지. 그리고 컴퓨터 폐인이나 히키코모리, 코쿤 족등이 나타난 걸 보면 정보화사회에서도 그의 예상이 통하고 있는 거야.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하여 대중소비문화가 널리 퍼지면서 생활방식도 많이 바뀌었어. ‘타인지향형’이 사회적 성격에서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걸? 리스먼이 해법을 찾고자 고심했던 문제가 이제 시공을 뛰어넘어 고스란히 우리의 문제가 된 상황이지. 우리 역시 서로 비슷해지려고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사회적인 자유와 개인의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야.
[해설] 데이비드 리스먼(David Liesman 1909-2002) 미국 출신의 사회학자. , , 등의 저서를 남겼다. 미국의 대중사회를 잘 분석하였으나 역사적 맥락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리스먼은 명저 에서 이런 식으로 타인지향형의 인간을 설명해.
“타인지향적인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점은 그들의 동시대인이 개인에게 있어서의 지향(志向)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가 직접 아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는 그가 친구나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러한 원천은 생활지침으로서 그것에 의존하는 습성이 어릴 때 심어진다는 의미에서 내면화되어 있다. 타인지향적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그 지침과 함께 바뀐다. 일생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것은 추구하는 과정 자체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신호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뿐이다.”
이제 대중이 뭔가 조금 ‘자율적이지 못하고, 조작되기 쉬운 미성숙하고 연약한 다수’라는 느낌이 좀 오지?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보다 더 다수일 수밖에 없는 무산자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를 대중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우리에게는 인민이라는 용어가 더 친숙해. 히틀러와 파시스트들은 엘리트들의 지배를 받아야 할 피지배 계급을 대중이라고 하기도 했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우리는 대중일까, 군중일까?
대중을 이어주는 媒體(매체) _ media
대중이 타인지향형의 인간집단이라면 그들에게 준거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매체라고 할 수 있지. 매체(미디어)는 상설적인 표현과 의사소통의 유형적 수단이라고 해. 어렵다고? 그럼 신문-방송-영화-인터넷-홍보전단-현수막 등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을 통칭한다고 생각하자구. 하지만 그 전에 우리의 선입견을 한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어.
마샬 맥루한의
1964년 발간되었으나 지금의 시대에 비추어보아도 여전히 그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는 미디어 학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이다. 기술 결정론, 미디어 결정론적 시각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평가되지만, 미디어에 대한 전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준 것은 틀림없다.
첫째, 미디어는 메시지이다. 미디어의 형식과 내용을 분리시킬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이다.
둘째,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 인간의 모든 신체적, 감각적 기능을 확장한 것이 미디어라고 주장한다. 단지 어떤 의미를 담아 전달하는 중개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훨씬 넘어선다.
그는 공간의 소멸을 말하고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전에는 사람이 도구를 만들었으나 앞으로는 도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면서 21세기 현대소비사회의 단면을 예언했다. 그는 미디어를 정보의 정밀도와 수용자의 참여도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핫 미디어는 영화, 라디오, 신문으로 상세하되 일방적인 측면이 많다.
쿨 미디어는 전화, 만화, TV로 적은 정보를 함축하되 수용자의 정신작용이 더 많이 요구된다.
그는 이 책에서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가상인격(persona)까지 언급하고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 온라인 네트워크 상의 ID와 아바타로 현실화되고 있다.
[해설] 마샬 맥루한 (Marshall McLuhan 1911-1980) 캐나다 태생의 미디어학자 겸 문화비평가. , ,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우디 알렌의 영화 에 단역으로 출연하고 발명도 하는 등 개성 강한 학자였다.
첫 번째 미디어 혁명, 신문
최초로 대중의 미디어가 된 것은 신문이야. 근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신분의 장벽을 넘어 뉴스와 오락을 정기적으로 전해주기 시작한 신문. 그 시절 신문이 제공하는 오락은 바로 ‘연재소설’이었어. 그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떤 내용을 접할 수 있었던 매체는 아마도 방(榜)이거나 봉화(烽火), 또는 성문이 열리는 것을 알리는 파루(罷漏)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 이런 것들은 시대극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많이 봤지?
두 번째 미디어 혁명, 라디오(radio) ‘전파에 의한 음성방송 및 그 수신기’
1920년 11월 제29대 미국대통령 선거결과를 보도하면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단다.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 시절이던 1927년, 세계 6번째로 경성방송국(JODK)이 라디오 전파를 띄웠어. 놀랍지? 라디오는 놀라운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속보성에서 신문을 앞질러 나가기 시작했어.
정작 라디오가 매스 미디어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에디슨이 1857년 발명했던 축음기에서 돌던, 에밀 베를리너가 발명한 SP레코드와 만나고 나서지. 라디오와 레코드음악이 결합한 거야. 그러자 음악은 놀라운 속도로 대중과 만나게 돼. 이른바 음악이라는 문화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수백만의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노래를 듣게 되는 기막힌 경험을 하게 되었던 거지. 라디오는 뉴스와 오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유행의 창출이라는 막강한 무기를 들고 세계를 휩쓸게 돼.
대중문화가 성공하기 위해선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간을 넘어서 한꺼번에 그것도 빠른 시간 동안 전파될 수 있어야 해. 그리고 이전의 귀족들이 향유하던 엘리트 문화-고급문화가 인간의 이성(理性)에 호소한다면 대중문화는 대중의 감성(感性)에 호소한다는 거야. 문자를 읽을 줄 몰라도 되는 대중에게 라디오는 대중문화의 환경을 확실하게 제공해줬어.
세 번째 미디어 혁명 Television '멀리 떨어져서도 바로 눈앞에서처럼 볼 수 있다‘
라디오의 전성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지. 1937년 영국의 BBC가 최초로 흑백TV 방송을 송출한 거야. 사람들은 조그맣고 시커먼 상자 안에서 사람이 나타나 말하고 노래하고 먼 데서 일어난 사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했어.
미디어는 라디오에 의해서 진정한 매스 미디어가 되었고, TV에 의해서 눈을 뜨게 된 거야. 그러니까 대중이 미녀공작원 (원제 The Bionic Woman)의 귀를 갖게 되고 의 눈을 갖게 된 거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군. 참고로 우리나라는 1956년 세계에서 15번째로 TV방송국을 개국했어. 경제적으로는 꽤나 비참했던 시절이지만 미디어에서만은 그 시절에도 선진국이었던 것 같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자연히 세계의 주도국가가 되었어. 전후 복구 지원과 함께 서서히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미국식 대중문화를 전 세계에 퍼뜨렸어. '해피엔딩'이라는 할리우드 영화의 공식과 말보로 담배, 맥도널드 햄버거, 코카콜라 같은 미국식의 기호를 풍요라는 메타포(metaphor)로 포장해서 말야. TV가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는 거기 방영되는 프로그램에 담아져 널리널리 퍼지게 됐지.
TV가 바보상자라고?
1939년에 시작된 미국의 TV방송은 RCA라는 TV 제조업체로부터 비롯됐어. 태생부터가 상업적 목적이었던 거야. VTR이 처음 생겨났을 때 제작사인 전자회사들이 영화사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동통신-인터넷 회사들이 연예 매니지먼트사나 영화사를 인수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의 반복이라고 볼 수 있지.
미국의 모든 방송은 상업주의로 시작해서 끝나. 심지어 24시간 뉴스전문 채널인 CNN도 예외가 아니야. 러시아와 캐나다에선 스트립 뉴스까지 등장해서 광고주를 유혹하고 있단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온갖 매스미디어들이 뉴스를 쏟아냈지? 드라마와 쇼로 구성된 오락프로그램과 광고는 그러한 상업주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어.
다채널 시대의 시청자들은 성격이 급하지. 다른 채널로 돌리는데 필요한 시간은 없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도 없이 ‘Zipping, Zapping’해. 리모컨 잡고 잠든 사람들 많지? 이런 사람들을 Coach Potato족이라고 해. 요즘 같은 컴퓨터 시대에는 Mouse Potato족이라며? 우리나라에선 감자칩 대신 컵라면을 먹을까?
TV방송사는 뭘 먹고살까? 광고비가 최대의 돈줄이지. 프로그램도 팔고 부대사업도 하지만, 제일 큰 것은 역시 광고거든. 그런데 광고주는 사람들이 많이 보는 시청률 높은 프로그램에 광고하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그러니 인기 없는 프로그램은 가차 없이 막을 내려야 해. 결국 PD들은 ‘30초 안에 시청자의 시선을 끌고 또 붙잡아놓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했지. 이쯤 되면 결과는 뻔해. 진지하거나 이성적인 메시지는 사라지고 감성적이고 즉흥적이고 말초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게 되어버린 거야. PD들이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지 몰라서 그럴까? TV방송, 아니 대중문화의 메카니즘 자체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바보상자 TV의 반격 : 1960년 미국 CBS TV 사장 ‘프랭크 스탠튼’의 문화적 민주주의론
1950년대 말 미국, 시청률의 노예가 된 TV를 사회학자와 비평가들이 일제히 비난하며 법률적 규제를 가해야 한다며 들고 일어났다. 그러자 CBS TV 방송사 사장 프랭크 스탠튼은 문화적 민주주의(cultural democracy)를 내세워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했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다수의 의사에 따라 지도자를 선출하고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하는 투표제에 의해 가능하듯이, TV도 문화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시청률이라는 시청자들의 투표결과에 따라 프로그램의 내용을 결정하는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는 항변이었다.
문화적 민주주의론자들은 비평가들이 시청자의 수준을 얕잡아보고 있으며, 그런 엘리트주의가 정치에도 적용된다면 보통 선거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 아니냐고 반문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들먹이니 마치 ‘헌법소원’을 한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났다고나 할까?
반격에 대한 재반격: 버나드 베럴슨 컬럼비아대 교수의 선택제한 기만론
베럴슨 교수는 투표권으로 비약된 채널 선택권은 수동화된 시청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송출되어진 프로그램 내에서의 선택일 뿐 실제로 시청자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반박하며 공급이 수요를 조종하는 한 문화적 민주주의론은 교묘한 기만이라고 공격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위와 같은 논쟁은 아직도 유효하지. 조작되기 쉬운 대중이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TV프로는 中學生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제작되고 있어. 너무 수준이 내려가면 나이 많은 시청자들이 외면하고, 너무 올리면 제법 쏠쏠한 구매력을 갖추고 부모세대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틴에이저 세대 시청자를 잃는 거지. 그 적당한 타협이 바로 중학생의 지적 수준이야. 대부분의 드라마 대사는 5천 단어 이내에서 맴돈다고 해. (한때 우리나라의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사로잡았던 는 기껏해야 50단어 이내야. ㅋㅋ 뭐? ‘이제 그만’?)
TV시대를 가져온 또 하나의 요인은 도시화야. 산업혁명 이후에 공장노동이 표준화되면서 '9 to 6'의 근무패턴이 일반화됐지. 직장에서 돌아와 가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는 TV가 되어버린 거야. 배우자나 아이들과 함께 보는 TV에는 진지한 사유가 뭐 얼마나 필요하겠어? 그저 토크쇼, 시추에이션 코미디, 버라이어티 쇼, 미니시리즈 따위가 인기를 끈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
20세기 후반 핵가족화를 넘어 가족이 해체되는 추세 속에서 대도시 독신남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나 , 그리고 은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전 세계 TV에서 방영되고 있어. 뉴스마저 뉴스 자체의 가치보다는 유명 앵커에 의해 브랜드 가치가 매겨지는 시대야. 오프라 윈프리 같은 토크쇼 진행자가 갑부 대열에 오른 건 이상한 일도 아니지.
[해설]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 1954- )
미국의 여성방송인이며, 십수년 동안 낮시간대 TV토크쇼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 쇼'의 진행자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사생아로 태어나 사촌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마약에 빠지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현재 미국 내 시청자만 2200만 명에 세계 105개국에서 방영되는 토크쇼의 여왕, 잡지 케이블TV 인터넷까지 거느린 하포(Harpo, Oprah의 이니셜 역순) 주식회사의 회장이 되었다.
흑인 최초의 보그(Vogue)지 패션 모델이 되기도 했으며 1991년 달리기를 통해 107㎏이던 몸무게를 2년 만에 68㎏으로 줄여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녀의 성공기는 '인생의 성공 여부가 온전히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오프라이즘(Oprahism)'를 낳기도 했다.
윈프리는 2003년초 실시된 해리스 여론 조사에서 1998년과 2000년에 이어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TV 방송인으로 꼽혔으며 흑인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경제 전문지 포브스로부터 재산 26억 달러 이상을 가진 여성부호로 지목됐으며,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여 그가 당선되는데도 영향력을 끼쳤다고 한다.
월드컵 축구, 올림픽 같은 거대한 스포츠제전은 이미 상업주의의 축제가 된 지 오래야. 같은 걸 몇십억 명이 동시에 보니 얼마나 기막힌 광고의 기회겠어? 공식 스폰서를 따내기 위한 경쟁은 거의 전쟁과 같은 수준이지. 현대 자동차 버스가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지단, 호나우지뉴 등 슈퍼스타들을 포함한 각국 대표선수를 실어 나르는 장면, 기억나? 삼성전자는 2004년 아테네에 이어 2008년 베이징에서도 ‘애니콜’을 올림픽 공식 휴대폰으로 지정했고, 영국 프로축구 첼시 구단의 유니폼에도 상호를 올려 광고효과를 톡톡히 보았다는 것도 알 거야. 2009년 봄을 뜨겁게 물들였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대한민국 야구대표 팀의 스폰서로 나섰던 CJ인터넷의 게임 ‘마구마구’는 팀이 결승까지 진출하는 바람에 2억을 스폰서하고 52억이 넘는 광고효과를 올렸다고 신문에 났더구나.
통화보다 문자가 더 편하고 편지보다 이메일이 더 편한 너희들에게 이런 식의 편지가 좀 익숙하지 않을 줄 안다. 하지만 요즘 대학에서는 리포트를 손으로 써오라고 주문하는 교수들도 제법 있다면서? 남의 것 ‘복사하고 붙여넣기’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라고 친구인 교수가 그러더구나. 또 스피드 시대를 살고 있는 너희들에게 긴 글은 좀 지루하겠지. 그래서 이 삼촌도 생각할 거리들을 나누고 또 나눠서 전해주고 싶다. 그럼 다음 편지에서는 대중문화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