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혁명-생명을 더욱 생명답게 하는 힘
의식의 커다란 진전은
'내가 안다'는 착각을 버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닫힌 상자 속으로는
빛이 들어갈 수 없다.
의 저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의식수준 및 진실과 거짓측정'을 주제로 진행하는 워크숍 현장. 워크숍이 시작되자 희 머리에 희 수염의 할아버지가 마치 미끄럼을 타듯 사뿐히 걸어 나왔다. 개인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의식진화를 주창한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다. 그는 두 손을 합창한 채 참가자들을 향해 무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인식의 한계 때문에 (실재를)본다는 것은 어렵다. 보이는 세상엔 신이 없다. '생각'에는 신이 없다. 신은 색각과 생각 사이에 있다." 워크숍엔 대학교수와 심리상담 전문가 등 지성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러나 호킨스 박사와 만나는 순간 이들의 의식은 지성의 영역을 넘어 신성을 향해 건너가고 있었다. "왜 실재를, 신성을, 본성을 보지 못하는가. 남이 운전하는 차에 동승해 거울을 보면, 거울에 비친 모든 물체는 스쳐서 지나갈 뿐이다. 어떤 이미지 잔상도 고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모든 물체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타나고 보이는) 일체의 현상은 자신에 의해 투사된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각자의 마음이 만들어낸 창조물인데,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의 창조물에 집착하기 때문에 실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에고(업 또는 개체심, 이기심)는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새로운 것을 가지려 한다. 끊임없이 생존을 열망한다. 그러나 진정한 힘은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힘은 본질이 갖고 있는 덕성을 뿜는다. 그 힘은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빛을 뿜어낸다. 그래서 신은 심오한 차원에서 평화를 가져온다. 두려움을 가르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에고가 모든 사람의 목을 꽉 죄고 있다"고 하면서도 에고를 증오의 대상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오히려 "에고조차도 사랑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에고 때문에 수치와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 에고를 가지고 있다. 우리 스스로 에고를 자비롭고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 에고를 적대해선 안 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화 잘 내는 자신의 습관이나 성격에 진절머리를 내며, 자신의 그런 성향을 감추고 억압하려고만 했던 이들에게 호킨스 박사의 말은 분명 구원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놀라운 것은 내가 가는 곳 어디에나 육신이 있다는 것이다. 육신은 귀여운 강아지와 같다. 육신을 돌보라. 육신이 먹고 싶어하는 것을 주고, 무엇에 집착하든 두려워하지 말라." 금욕을 강조하는 많은 종교인들과는 상당히 다른 주장이다. 실제로 호킨스 박사는 강연 도중 콜라를 주로 마셨고, 쉬는 시간엔 가장 먼저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였다. 마치 '호킨스 강아지'가 좋아하는 먹이를 주듯 했다. "의식은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식은 스스로 존재한다."
드디어 그가 잠자는 의식을 깨우기 시작했다. 호킨스 박사에 따르면 인간 개개인의 마음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된 컴퓨터 터미널과 같다. 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는 인류의 의식세계 자체이고, 우리의 의식은 단지 모든 인류의 공통된 의식에 뿌리를 둔 데이터베이스의 개인적인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데이터베이스는 실로 비범한 데가 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그 데이터베이스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사람은 탄생하자마자 이 천재적인 데이터베이스를 열람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그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한정된 개인의 의식세계를 초월한 데이터베이스의 발견이야말로 개인과 인류 전체의 삶을 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다. 즉 데이터베이스야말로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여는 보고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뿐만 아니라, 생명을 더욱 생명답게 하는 것과 생명을 낭비하는 것, 더 나아가 진실과 거짓까지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구비되어 있음이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은 과연 우주의 에너지장과 연결된 경이로운 컴퓨터일까? 호킨스 박사는 운동역학 실험을 통해 우주의 모든 진실을 가려낸다. 운동역학 실험은 통상 근육실험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선 오링테스트를 거쳐 사상체질을 감별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우리 몸에 좋은 것과 접촉할 때는 근육이 강해지는데 반해 몸에 해로운 물질이 닿을 때는 근육이 약해진다고 본다. 운동역학 실험을 거듭해 온 호킨스 박사는 물고기떼가 500미터 전방에서도 보이지 않는 적들을 감지하고 방향을 바꾸듯이, 우리 인간에게도 선악을 판단하는 무의식적인 본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운동역학 실험에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우선 피험자가 서서 한쪽 팔을 쭉 편다. 실험자는 피험자와 마주보는 위치에 서서 그의 손목 위에 검지와 중지를 올려놓고 "누를테니 저항하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실험자는 "이 질문을 해도 좋습니까"라고 물으며 팔을 지그시 누른다. 실험자는 매번 일정한 힘으로 눌러야 하며, 피험자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근육에 힘이 들어가면 그대로 저항해서 버티고, 근육에 힘이 바지는 것 같으면 그대로 팔을 내린다. 피험자의 팔이 내려가지 않으면, 실험자는 질문에 들어간다.
호킨스 박사는 능 아내이자 조수인 수잔을 파트너로 운동역학 실험을 한다. 예를 들어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입니다. 저항하세요"라고 말한 뒤 팔을 누르면 팔은 내려가지 않는다. 다시 그가 "서울은 미국의 수도입니다. 저항하세요"라고 말한 뒤 팔을 누르면 그의 말이 거짓이기 때문에 근육이 약해져 똑같은 정도의 압력에도 팔이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런 반응이 나타나는 원리에 대해 호킨스 박사는 "질문이 진실이면 근육에 전류가 들어가고, 거짓이면 근육에 전류가 꺼진다"고 말했다. 실험은 흥미진진했다. 워크숍에 참석한 대학교수와 심리상담가, 의사, 간호사 등도 팔을 누르면서 참과 거짓을 가려낼 때는 모두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했다.
물론, 처음에는 실험에 익숙하지 않아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실험자는 질문을 던진 뒤 피험자의 팔을 일정한 강도로 눌러야 하는데, 한 번은 세게 눌렀다가 다음번엔 너무 약하게 누르기도 했다. 팔을 뻗은 피험자도 어느 정도의 압력에서 팔을 내려야 할지, 아니면 억지로라도 버텨야 할지 잘 가늠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했다. 실험이 잘 안 될 때는 자신이 증오하는 인물이나 혐오하는 상황을 떠올리면서 "이 사람은 의식수치가 200 이상이다"라고 선언하고 팔을 눌러본다. 의식수치 200은 호킨스 박사가 '표준'으로 설정한 수치다. 실험자가 입으로 선언하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측정 대상을 떠올려도 결과는 같다고 한다. 증오하는 인물이나 싫어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팔을 눌렀는데도 내려가지 않는다면 실험자가 지나치게 약하게 눌렀거나 피험자가 팔을 내리지 않으려고 너무 강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 때는 자연스럽게 팔이 내려가는 게 정상이다. 우리 몸은 좋지 않은 감정에는 약한 반응을 보이는 반면 좋은 감정에는 강한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이런 실험을 통해 화나 증오와 같은 나쁜 감정이 우리 몸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사랑과 평화와 같은 긍정적인 느낌은 다름 사람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만, 최대 수혜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이번엔 자기가 존경하는 성자나 좋아하는 사람이나 풍경을 떠올리면서 팔을 눌러본다. 만약 팔이 내려간다면 실험자가 누르는 강도와 피험자의 팔 저항이 적당하지 않은 셈이다. 참가자들은 좋아하는 대상과 싫어하는 대상을 떠올려 실험하는 사이 차츰 누르는 힘과 팔 저항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4일 동안 연습을 거듭해도 여전히 호킨스 박사 부부처럼 안정적이지는 못했다. "라마 크리슈나(인도 힌두교의 성자)의 의식은 200이상이다."라고 선언하고 손가락으로 팔을 눌렀는데 팔이 떨ㅇ졌다. 그렇다면 라마 크리슈나의 의식이 200도 되지 못한다는 말인가. 실험자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호킨스 박사가 질문 자체의 잘못을 지적했다. 라마 크리슈나는 이미 사망한 과거의 인물이므로 "라마 크리슈나의 의식은 200 이상이었다"라고 과거형으로 선언하고 눌러야 제대로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험에 조금 익숙해진 후에는 같은 문제를 놓고 참가자 전원이 동시에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지구 외의 행성에도 생명체가 존재한다"라고 선언한 뒤 참과 거짓을 가려냈다. 그 결과 실험자-피험자로서 적당치 않다고 판단된 세 명을 제외하고, 모두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이 존재한다"는 답변에 도달했다. 이들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전생찾기에 들어갔다.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한 말에 대해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이어서 찾아가기 쉽지 않을 듯했지만 실제로 해보니 실험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전생에 여자였다." 이 선언에 참이 나오면 "나는 전생에 아시아에서 태어났다"고 다시 선언한 뒤 참과 거짓을 가린다. 그런 식으로 성별과 나라. 직업 등을 알아간다. 호킨스 박사는 실험을 통해 "나폴레옹이 어느 전쟁에 참가했을 때 몇시에 무엇을 했는지도 알 수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살인범이나 유괴범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참가자들이 미래의 주가도 알 수 있느냐고 묻자 호킨스 박사는 "미래는 측정할 수 없지만, 주가가 오르고 내릴 수 있는 현재의 조건을 정확히 측정 가능하다"고 했다. 주목하는 회사의 주식이 현재 오를 만한 여건에 있는지 아닌지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실험은 개인의 의식수치 조사였다. 이 분야에서 호킨스 박사의 가장 큰 업적은 '의식의 지도'를 만들어 인간이 느끼는 각각의 감정을 수치로 개량화한 것이다. 그가 분기점으로 정한 의식수치 200은 '용기'의 수준이다. 의식수치 200 이하의 수준에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삶의 태도는 '살아남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은 가난과 결핍에서 비롯되는 절망과 우울의 영역이다. 그보다 높은 '분노'와 '욕망'의 단계에 이르면, 개인은 생존을 위해 자기 본위의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자존심'의 수준에 이르면, 살아남으려는 본능이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긍정과 부정의 갈림길이 되는 '용기'의 수준에 이르면, 다른 사람들의 안녕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가 작성한 의식지도에서 수치심은 20, 죄의식은 30, 무기력은 50, 슬픔은 75, 두려움은 100이다. 욕망은 이보다 높은 125이며, 분노는 150, 자존심은 175읻가. 모두 용기(200)보다 낮은 수치다. 용기보다 높은 수준에는 중용 250, 자발성 310, 포용 350, 이성 400이 배치돼 있다. 인류가 자랑하는 지성인인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의 의식수치는 얼나 될까? 499였다. 이성으로는 최고의 수치다. 그러나 그들의 수치가 높긴 하지만 여전히 융통성 없는 뉴턴의 우주관이나 몸과 마음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어서 500을 넘지 못했다고 호킨스 박사는 설명한다.
500이란 수치는 깨달음의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기본 발판이 된다. 이성에서 영성으로, 지성에서 신성으로 변화되지 못하면 500을 넘어설 수 없다. 사랑이 500, 기쁨은 540, 평화가 600, 깨달음은 700~1000이다. 500대의 수준에서는 개인의 생존이 여전히 중요하긴 하지만 모든 행동의 저변에는 사랑의 동기가 작용하기 시작하고, 창조적 능력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특히 다른 사람의 행복을 고려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이 행동하는 필수적인 기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600대에 가까워지면 자기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눈 뜸에 관심을 갖게 되고, 600대에 이르면 선과 깨달음의 추구가 삶의 기본적인 목표가 된다. 700에서 1000까지는 삶 자체가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감정상태를 정확히 볼 수 있다면, '의식의 지도'를 보고 자신의 의식수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보통 평생동안 의식수치를 5를 상승시키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인류의 평균 의식수치는 수세기 동안 190에 머물러 있다가 19880년대 냉전 종식 후 급상승해 현재 207로 뛰었다. 200은 'ㅌ오합'을 상징한다. 200 이하일 때는 부정적인일 도미노처럼 일어난다면, 200 이상일 때는 긍정적인 도미노를 낳을 수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인류에게 이제 희망이 보인다는 것이다.
선동가들이 '민족'이나 '종교'의 이름을 내세우면 의식수준 200 이하의 사람들은 흥분하고, 전쟁이나 살인에 가담하지만, 200 이상의 사람들은 그런 선동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반전 시위쪽으로 관심을 갖게 될 만큼 차이가 있다고 한다. 만약 한반도라면 일부 선동가들이 이데올로기적 적대감을 극대화시키거나 전쟁을 부초길 때 200 이하의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에 쉽게 현혹되지만, 200 이상의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그런 선동가를 가엾게 여기고, 평화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식의 변화는 전쟁의 시대가 지나고 평화의 시대가 오는 신호탄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참가자들은 개인의 의식수치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면서도 자신의 의식수치를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이들은 서로 짝을 지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등 역사적인 인물이나 역대 대통령들의 의식수치를 재보기도 했다.
워크숍을 진행하는 동안 호킨스 박사가 이번 워크숍에서 자신도 주목할만한 발견을 했다며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석가모니와 오ㅖ수의 존재가 지금가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수잔과의 계속된 실험을 통해 의식수치 650이상인 영적 스승들은 몸은 가더라도 인류에게 영감을 주는 영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는 것을 새로 알아냈다고 했다. 호킨스 박사는 종교에 대해서도 의식의 수준을 측정한다. 그는 자신들을 '평화의 사도'라고 내세우는 종교들조차 정의의 깃발 아래 전쟁이나 살생을 일삼는다며 운동역학 실험을 통해 그들의 참, 거짓과 의식수준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수준은 1000이지만, 그 가르침의 실천수준은 2세기에 930, 6세기에 540, 11세기 초 십자군 시대에는 498로 떨어졌다. 부처의 가르침 역시 1000에서 측정되었으며, 6세기의 실천수준은 900으로 떨어졌지만 그 가르침은 다른 종교에 비해 훨씬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다. 소승불교는 850, 대승불교는 950, 선불교는 600에서 측정된다. 힌두교의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1000이었으나 현재의 힌두교는 850이다. 유태교의 아브라함의 가르침은 985에서 측정되었고, 모세는 770이었으나 현대의 유태교는 499, 구약성경은 475에서 측정된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의식수준은 540, 코란은 570에서 측정된다. 반면에 오늘날 호전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믿는 가르침의 수준은 130에 그치고 있다고 밝힌다.
"깨달음에 이르거나 높은 의식수준을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모든 영적 가르침은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곡해와 오해가 항상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전은 어떤 경우에든 '독선적인' 종교인들의 이기심에 맞게 왜곡, 인용될 수 있다. 또 어느 종교에서나 원칙을 고수하는 과격파들은 항상 낮은 의식수치를 보이며, 그들은 많은 경우 범죄자의 의식수준에서 행동하게 된다." 호킨스 박사는 사이비 종교나 거짓 구루(스승)가 판치는 것도 진실과 허위를 구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척도가 없기 때문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모든 거짓 예언자들의 매력은 그들의 설득력에 있다. 운동역학 실험은 그런 거짓으로부터 완전무결하게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복음전도자의 목소리를 줄인 후 근육실험을 해보면 자못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거짓된 구루으로부터 완전무결하게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다. 근육실험을 해보면 자못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거짓된 구루는 모든 사람의 근육을 현저하게 약화시킨다. 마치 이 우주가 여엊ㄱ인 강탕을 아주 심각한 잘못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면 누가 진정한 교사인가. 무엇보다도 진정한 교사는 개인의 삶을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우리가 어떻게 의식수준을 높여갈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호킨스 박사는 종교와 영성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많은 경우 종교는 "물리적인 힘과 연관되었고, 그런 예는 과거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는 반며에 헌신, 자유, 평화 등을 추구하는 영적인 개념은 대립이나 충돌을 초래하지 않으며 이로 인한 전쟁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영성이란 언제나 비폭력과 같다."
그는 또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명상하는 것은 이익이 있지만 올바르게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이익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호킨스 박사의 주장대로라면 인류의 의식수준이 향상된다면 전쟁과 살인이 사라지고 평화의 시대가 더욱 앞당겨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의식향상은 더디다. 왜 사람은 평생 의식수준을 5점도 진전시키기 어려운 것일까? 호킨스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의식의 커다란 진전은 '내가 안다'는 착각을 버릴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기꺼이 변화하려는 태도는 흔히 개인들의 믿음이 다 허물어지고 더 나아갈 수 없는 '밑바닥'에 처했을 때 생긴다. 닫힌 상자 속으로는 빛이 들어갈 수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위기는 높은 의식수준으로 가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회이기도 하다.
호킨스 박사는 의식수준을 향상시키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마음관찰을 권한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의식수준을 높일 수 있다. 마음을 관찰하게 되면 겸손해지고 다 안다는 자만심을 버리게 된다. 이때 앎의 성숙이 시작된다. 겸허한 마음일 때 비로소 마음의 노예에서 벗어나 주인다워질 수 있다." 순수의식에서 나오는 듯한 그의 말이 끝나갈 때 동쪽하늘에 갑자기 쌍무지개가 떴다. 더 이상 호킨스 박사도, 상무지개도 '밖에' 머무르지 않았다. 순수의식 속에선 모두가 그렇게 하나였다.
데이비드 호킨스 공식 홈페이지 : http://www.veritaspub.com
출처: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31가지 수행, 수도, 명상을 통해 행복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한겨레출판-달라이라마,이해인수녀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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