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그가 처음부터 친일 인사는 아니었다고 전한다.
그는 잔반(몰락양반) 출신 이었으나 당시 그 부친의 친척이자
이하응(흥선대원군)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 가면서 부터이다.
이는 이때 부터 남다른 총명함에 뒤따르는 부를 얻게 된것이다.
그가 처음 공식으로 이름을 나타나게 된건 1882년. 이완용이 과거에 급제 한것이었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그에 힘입어 3년후 세자시강원의 겸직사로서 순종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되어 순종과 사제의 인연까지 맺게 된다.
후 그는 육영공원의 미국인 교사의 헐버트의 첫제자로 만나게 되면서 그는 친미 개화파로서의 인사의 길로 들어 서게 된다. 육영공원은 이원제로서 좌원과 우원으로 나뉘었는데 관료 출신 교육생인 그는 좌원에서 교육 받게 되었다.
그 후 1년뒤 대미 외교팀으로 이완용이 발탁된다, 고종이 그를 특별히 천거 했을 정도로 총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주미 조선대사관의 주측 인물로서 가게 되었고, 주재 공사로서 친미 관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가 맡은 직책은 실무 책임 참사관 이었다.
후에 그리고 그는 주한 미국 공사인 알렌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후에 그가 귀국한디 5년후인 1895년.. 여우사냥으로 일컬어 지는 을미사변 이 일어난다. 이때 그는 친미관료로서 일본인의 눈을 피해 친러파와 손 잡고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을 주도 하게된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화 되던 이때 까지만 해도 이완용은 일본에 반대하는 반일 관료로서 고종의 충직한 신하였다.
그리고 그는 청일전쟁이후 영은문이 사라진 자리에 세워진 독립문을 세울때 이완용이 주도하였으니 그는 그리고 독립협회 2대 회장직으로 추대되며 독립문 창립 명예 위원장까지 추대된다.
이런 이완용이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것은 이후 러시아에서 군교관을 보내는것에 대해 거절하면서 러시아의 눈밖에 난것이 화근이 되어 그는 전라북도 감찰사 라는 외직으로 내쳐졌고 후에 직무태만,공금횡령으로 파직될 위기에 까지 처하게된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고종은 이완용을 중앙정계로 불러 들였다. 고종은 그를 통해 미국과 연결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벗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 한다는 조건으로 한반도 영유권을 일본으로 인정 한다는 가쓰라 -테프트 밀약을 성립한 뒤였다.
그 후 그는 미국을 잃고 방황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 의사를 묻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조선이 자초한 일이며 힘없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일본과 상하기 전에 일본과 협약을 맺어 그것을 갈무리 해야한다" 라며 시작된이후.. 이때부터 이완용은 골수 친일 매국노로 변신하게 되면서 을사조약 체결 찬성, 정미 7 조약의 체결, 제 1,2차 한일 협약 찬성 , 1909년 사법 및 경찰권 일본에 이양에 적극 주도, 후에 한일합방조약 찬성까지..
여기까지가 제가 알아본 제가 쓴 이완용의 일제강점 전까지의 행적 입니다. 이완용이 왜 매국노로 갑자기 돌아 섰는지는 아직도 의문입니다. 저의 조심스러운 추측으로는 그는 처음부터 조선에 충성한게 아닌 미국 --> 일본 으로 이양되는 조선에서의 강국 구도에 따라 자신을 맡긴 위선자 였을 것입니다. 일당전기.. 그의 추모서에조차 그가 돈을 몰랐다면 최고의 정치가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써져있다 하니..
현재 이완용 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악한 인물로 그려져 있습니다. 만약 그가 그의 총기를 조선을 독립시키고자 함에 힘을 썻다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매국을 하였고 3.1운동 경고문 까지 쓰는 등의 일제 강점기에도 친일 행위는 멈추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일전에 이완용 변호자들은 이완용이 조선민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친미 개화파로서 고종에 충성했던 이완용과 철저한 매국노로 알려져 있는 그...
과연 어떤 쪽이 그의 진실된 모습 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