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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봄이면 생각납니다

바다와 술잔 |2003.02.27 13:17
조회 430 |추천 0

           한 소녀가 봄이면 생각납니다.

 

1

한 소녀가 봄이면 생각납니다.

는개가 안개처럼 감기는 날이면 가슴 설레어 갈대처럼 흔들리는 소녀였습니다.

오늘 는개 내리니 불현듯 소녀가 생각납니다.

목련처럼 하얀 목덜미에 분홍빛 스웨터를 즐겨 입고 난초처럼 상큼한 해맑은 미소를 짓는 아름다운 소녀였습니다.

가녀린 팔뚝에 실 정맥이 파랗게 보이는 소녀는 릴케를 사랑하였습니다.

나긋나긋 봄을 무척이나 타는 소녀였습니다.

오늘 는개에 마음 적시니 소녀 생각에 젖은 솜처럼 발걸음 무거워 집니다.


2

학창시절 가정교사를 하던 집에 깨끗하고 맑은 눈망울을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내가 입주한 그날부터 오빠라 부르며 무척이나 따랐습니다.

나도 티 없이 해맑은 소녀를 동생처럼 사랑했습니다.

붙임성이  많아 누구나 귀여워 해주는 소녀는 하늘의 시샘인 듯  지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그 병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여 가정교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녀의 나이 열다섯이었습니다.

소녀의 몸에서는 언제나 새콤한 약 냄새가 났습니다.

나는 소녀가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3

참, 잊을 뻔했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광복동에서 꽤나 유명한 양장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이름난 디자이너였습니다.

어느 날 소녀의 어머니가 저에게 부탁의 말과 함께 소녀의 병을 이야기 했습니다.

소녀는 말기의 폐병을 앓고 있다고 눈물 글썽이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수술의 시기도 놓치고 요양만이 최후로 환자를 보살필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이라고…….

마산의 국립요양소에 요양을 시키려 하였지만 소녀는 집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고, 소녀는 자신의 병이 불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엄마와 함께 있으련다. 하며 막무가내라 했습니다.

나는 가슴이 찡하였습니다.

저렇게 해맑은 영혼을 가진 소녀가 가슴앓이 큰 병을 앓고 있을 줄이야……. 

하늘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저에게 소녀를 잘 보살펴 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했습니다.

다른 가르침은 필요 없고 소녀가 하고 싶은 것을 함께 해 달라 했습니다.

소녀는 문학을 꿈꾸며 아름다운 시들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소녀의 가슴은 릴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소녀와 수많은 시를 이야기 하며 함께 낭송하기도 하며 밤을 새우기도 하였습니다.

소녀가 나를 잠들지 못 하도록 했다는 표현이 더 맞는 이야기 입니다.

그렇게 소녀와 나는 오누이 같은 정이 새록새록 쌓여 갔습니다.


4

일년이 지난 봄날이었습니다.

목련이 활짝 피고 개나리 노랗게 담장을 물들이고 있는 봄날 햇볕이 간지럽게 졸음 태우는 날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학교가 가기 싫었습니다.

소녀의 어머니가 집안의 혼사일로 지방으로 내려가서 소녀가 걱정이 되기도 했었지요.

집안에 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만 소녀는 유난히 나만 찾았습니다.

그날 아침 소녀는 “오빠  오늘은 학교 가지 마”하며 쳐다보는 눈망울에 고요하고 슬픈 우수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소녀의 눈망울은 빈 하늘 한점 흐르는 구름의 속살처럼 하얀 맑음이었습니다.

그 하얀 눈망울을 바라보니 애잔한 슬픔에 가슴은 연민으로 메워졌습니다.

나는 소녀의 가녀린 손을 내 손안에 꼭 쥐어주었습니다.

미약한 따뜻한 온기가 내 손에 봄꽃처럼 전달되었습니다.

그 따스함이란 노란 병아리를 손안에 쥐었을 때의 보드라운 온기였습니다.

그즈음 소녀는 눈에 띄게 병이 악화되고 있었기에 걱정이 여간 아니었습니다.

기침에 묻어나는 피가 아니라 각혈의 양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조용하게 소녀의 방에서 문 두들기는 기척이 났습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지나칠 뻔 했습니다.

나는 소녀의 방문을 조용히 열었습니다.

하얀 이불위로 섬뜩하도록 많은 양의 피를 소녀가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소녀의 피 묻은 입술을 훔쳐내며 내 가슴에 꼭 안았습니다.

“오빠 나 이제 죽나 봐”

소녀의 물기 젖은 눈망울엔 가벼운 미소가 보였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미소, 나는 세상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본 적이 없습니다.


5

그날 소녀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내 품에 안겨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꽃도 피기 전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소녀는 하늘나라 가기 전에 소녀의 일기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오빠 나 죽거든 꼭 읽어봐, 읽고나면 불태워버려”

소녀의 일기장에는 내 이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소녀는 나를 사랑의 마음으로 보아왔던 것입니다.

마당의 목련이 송이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따스한 햇살이 방안으로 기어들어와 소녀의 난초처럼 맑은 향을 벼리고 있었습니다.


6

   장미화 곱다기로 꺾어 보니까

   가지마다 가시입니다

   사랑이 좋다기로 따라 가보니

   그 사랑 속에는 눈물이 있어요

   그러나 사람은 세상 사람은

   가시 많은 장미화나 눈물 많은 사랑을 

   좋다고 좋다고 부르는 구료


소녀의 일기장에는 릴케의 눈물젖은 장미가 슬프게 피어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봄날의 아침에 소녀는 그렇게 장미처럼 고운 사랑을 내게 전하며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는 봄날 아침에 갔습니다.

그러나 봄은 무심히 또 왔습니다.


7

한 소녀가 봄이면 생각납니다.

는개가 안개처럼 감기는 날이면 가슴 설레어 갈대처럼 흔들리는 소녀였습니다.

오늘 는개 내리니 불현듯 소녀가 생각납니다.

목련처럼 하얀 목덜미에 분홍빛 스웨터를 즐겨 입고 난초처럼 상큼한 해맑은 미소를 짓는 아름다운 소녀였습니다.

가녀린 팔뚝에 실 정맥이 파랗게 보이는 소녀는 릴케를 사랑하였습니다.

나긋나긋 봄을 무척이나 타는 소녀였습니다.

오늘 는개에 마음 적시니 소녀 생각에 젖은 솜처럼 발걸음 무거워 집니다.

 

          바다와 술잔


       <는개 : 가랑비나 이슬비 보다 가는 비, 세우비, 안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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