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는 포효의 털가죽이 걸려 있는 벽을 향해 시선을 돌리rh 박제된 포효의 두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에 가까운 얼굴을 가진 포효의 박제된 머리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채 주둥이를 쩍 벌리고 당장이라고 덤벼들 듯 그녀를 노려보는 형상이었다.
지난 가을, 사냥을 나선 소예가 새끼를 죽이자 노기에 차 덤벼들었던 바로 그 포효의 가죽이었다. 소예는 그 때 어디선가 나타난 설무랑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방금 소예는 설무랑의 소식을 들었다. 마침내 그가 수라군의 방책 가까이에 도착하여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소예는 그가 출병할 거란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유 모를 초조함을 느꼈다. 뻔히 보이는 죽음의 불길로 뛰어드는 무모한 그 남자의 행동에 화를 내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만치 오래된, 어린 시절의 짧은 추억만을 공유한 그 남자때문에 불필요한 감정을 낭비하는 태도는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설무랑의 출병에 그녀는 의구심이 들었다. 섬뜩하리만치 냉정하고 영리한 그가, 확신에 찬 자신감을 가진 그가 순간 미쳐서 사지로 뛰어들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불가능이 없어 보이던 빛난 그의 눈동자가 떠오르자 소예는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았다. 얼굴이 붉어지면서 소예의 심장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설마......?"
그녀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엉뚱한 생각이 몰아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 만약 그가....기적을 이룬다면?"
가차없이 달려드는 천계 동방군 천칠백 명을 바라보던 수라군은 그들이 가까워지자 무기를 고쳐잡았다. 천계군의 놀라운 투기는 그 수와 상관없이 수라군의 방어본능을 일으켜 온 몸을 긴장시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대장의 지시가 있을때까지 움직일 수 없는 수라군은 동방군이 부딪혀 올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수라군과 수십 걸음 간격을 두고 좁혀가던 설무랑이 돌연 멈추어서더니 칼을 쥔 오른손을 번쩍 들어올려 신호했다. 그와 동시에 스무명의 전사들이 이성을 잃고 달려들던 동방군 병사들을 제지했다. 병사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급하게 멈추어 서야만 했다. 하늘로 솟던 흙먼지가 차차 가라앉으면서 병사들은 너머로 짐승의 눈을 한 수라군의 실체를 직시하게 되었다. 동방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수라군의 형상은 지옥에서 막 나온 악귀와 같았다.
" 마...맙소사!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지?"
누군가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달아날 기회따위는 없었다. 뒤는 스물 전사들이 다섯개씩 긴 화살을 재어 당장이라도 목을 꿰뚫을 준비를 마친 채 병사들을 노려보고 있었고 앞은 수라군의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번뜩이고 있었다. 병사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갑자기 멈추어선 설무랑을 노려보았다. 병사들은 필시 승리할 가망이 없으니 자신들을 버리고 도주할 것이라 여겨 벌써부터 분노로 몸을 떨었다. 같이 죽자는 각오로 이를 가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설무랑은 검을 검집에 유유히 꽂으면서 말에서 내렸다.
동방군 병사들의 눈빛에서 적개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의아함이 자리잡았다. 설무랑이 그대로 등을 돌려 수라군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었다.그런데 그에 따라 수라군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설무랑이 한 걸음 내딛자 수라군은 움찔거리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동방군 병사들은 수라군들 사이에 일렁이고 있는 기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분명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동방군이 등돌린 설무랑의 불타는 듯 붉은 눈동자를 보았을리가 없었다. 설무랑은 막 사라지며 세상을 물들이고 있는 노을보다 더 붉은 피빛의 눈동자를 하고 수라군에게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설무랑이 걸음을 딛을 수록 수라군은 물러섰지만 곧 방책이 막아서면서 그들이 물러날 자리는 더이상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괴로운 신음과 비명 소리가 수라군 가운데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동방군 병사들은 영문을 모른채 그 괴이한 현상을 지켜보면서 단신으로 적장에 뛰어든 젊은 장군의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설무랑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수라군 전체에게로 생생하게 흘러들어가면서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 너희를 이끈 자가 누구냐? 그를 내 앞에 데리고 오라!"
수라군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며 두려움을 표현하였다. 설무랑의 지척에 있던 군사들은 까무라칠 듯 떨고 있었다. 그 때 수라군의 좌측에서 길이 갈라지며 거구의 사내가 말을 몰아왔다.
치켜 올라간 큰 눈을 부릅뜨고 두 개의 단단한 뿔로 들이 받을 듯 남자는 거침없이 달려왔다. 남자의 얼굴에도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군을 이끈 장수의 이름에 걸맞게 그는 능히 그 두려움을 제압하고 설무랑에게 다가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무소처럼 강한 기운으로 달려오던 수라족의 장수가 달리는 말을 멈추었다. 그를 태운 말이 설무랑에게서 뻗어나오는 살기를 감당할 수가 없는지 주인의 명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말은 괴로운 듯 울부짖었고 이에 수라군의 동요도 심해졌다. 장수가 말에서 내려 고삐를 놓아주자 말은 미친 듯이 고개를 털면서 달아났는데 뻣뻣하게 굳어 몸을 뒤틀던 수라군이 미처 길을 트지 못한 바람에 말은 수라군에 그대로 부딪히면서 일대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장수의 상처 깊은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신음을 내뱉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었다. 붉은 태양처럼 모든 것을 뒤덮는 힘을 가진 붉은 눈의 남자가 자신의 앞에 있었다. 그가 가진 피의 본능으로 장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어찌하여 그가 천계군을 이끌고 나타났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바로 앞에 있다는 그것만이 의미가 있었다.
" 당...당신은.....!"
설무랑은 편안한 웃음을 띄고 그를 맞았다. 온갖 감정이 교차하는 장수의 얼굴과 설무랑의 느긋함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 나를 본 적이 있느냐?"
" 하지만...분명...당신은...."
장수는 말을 더듬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무릎이 꺾였다.
" 털썩."
그는 더 이상 설무랑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방금 그를 대면했다는 것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도전이었다.
설무랑의 웃음이 조금더 짙어졌다. 살짝 올라간 입술 사이로 하얀 송곳니가 비쳤다.
" 네 목이 필요하다."
설무랑은 말을 고르지 않았다. 장수는 조금 움찔했지만 거부나 반항의 태도같은 것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 원하시오면 가지소서. 그것이 제 영광이 될 것이옵니다."
설무랑은 구차한 변명따위 늘어놓지 않고 검을 빼들었다. 검을 치켜든 그의 팔에 핏줄이 솟았다.
" 네 이름은 내가 기억하리라."
" 주군에게 속한 자, 영예로이 주군께 목을 바치는 자, '기일'이라 하옵니다."
설무랑의 칼이 한 줄기 빛을 그었다. 기일의 목이 피를 뿜으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두려움에 정신을 잃어가면 수라군사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무기는 이미 그들 손에서 던져진 후였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기상 높은 수라군이 아니라 바람에도 스러질 풀줄기와 같이 나약한 존재, 전의를 상실한 모래더미나 마찬가지였다.
동방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젊은 왕자가 스스럼없이 적을 향해 걸어들어가더니 이 만이나 되는 적군의 무릎을 꺾어버리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치는 바람에 스러지는 풀포기처럼 물결을 이루며 흙바닥에 꿇어앉는 수라군의 대오는 장관이었다.
그런 동방군의 앞에 설무랑이 다시 돌아왔다. 병사들은 잔잔한 웃음을 입가에 띄고 있는 젊은 왕자가 두려워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저 한 명의 남자가 이 만 수라군을 압도하는 공포를 몰고 왔다. 설무랑은 앞서보다 더욱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 검을 쥐고 달려나가 저들의 목을 치라. 이제 너희를 막아설 자 그 어디에도 없으니, 해가 뜨기 전에 다 치지 못하면 너희의 목으로 이 만의 수를 채우리라. 가라!"
슬프도록 창백한 달빛 아래, 동방군 병사 천 칠백은 거부할 수 없는 두려움에 떠밀려 돌처럼 앉아있는 수라군 사이로 흩어져 나아갔다. 그리고 이 만의 수라족은 천 칠백 개의 칼 아래 쓰러져갔다.
" 뚜둑...뚝..."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에 이어 수라족의 머리 하나가 피로 물든 흙바닥 위에서 뒹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수라군이었고 마치 맞춘 것처럼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햇살은 전장이라는 무대에서 벌어진 간밤의 연극이 어떤 참혹함으로 결론났는지 찬란하게 떠 올라 비추어주었다. 어디를 보아도 피빛..또 피빛이었다. 애초에 붉은 땅이었듯.
동방군 병사들은 수라족의 피를 온 몸에 뒤집어 쓴 채 그 눈빛이 제 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그들의 갑옷을 타고 수라족의 피가 비처럼 줄줄 흘러내렸고 마지막 수라족의 머리가 떨어져나가자 그를 친 병사는 다리가 꺾이며 쓰러져버렸다. 동방군 병사들은 다들 넋이 나간 채로 수라군의 시체더미 속에서 주저 앉아있었다. 그들 중에는 정말 실성하여 키득거리며 웃는 이와 실신하여 시체더미 위에 쓰러진 이들도 가득했다. 그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겨우 정신을 놓치않는 이들도 많았다. 누구 하나 그런 현장에서 정상일 수는 없었다.
동방군이 수라족을 도륙할 때 수라군은 누구 하나 반항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저항하거나 무릎을 세우지 않고 운명인 듯 칼을 받았다. 설무랑은 표정없이 그러한 장면들을 맞딱드리고 서서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았고 마지막 수라족의 머리가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말머리를 돌렸다.
몸을 돌린 설무랑의 시선은 전장을 둘러싼 높은 절벽 위에서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절벽 위에서는 막 붉은 색의 형체가 바람에 쓸려가듯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설무랑의 입가에 웃음이 스쳤다.그리고 그는 엉망진창으로 널부러진 동방군을 버려둔 채 말을 달렸다. 이제 그는 할 일을 다 한 셈이었다.
동방군의 승전은 대기하고 있던 제공의 6만의 군대를 무색하게 만들면서 순식간에 제황성의 천제에게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