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택배 물건 배달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위해 현이 다른 직원들과 함께 식당으로 가고 있었다. 검정색 중형차가 경적을 울리자 인도위에 사람들의 시선이 차로 향했다. 현도 가는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김사장이 차에서 내렸다. 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현이 다른 직원들에게 먼저 가라고 말을 한 뒤 김사장의 차가 있는곳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출장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점심식사하러 가는 길인가?"
"네"
겨울답게 날씨가 차가웠다. 세차게 바람이 불자 앙상한 나뭇가지가 춤을 추는 듯 휘청거렸다.
"타지. 점심 식사하면서 얘기 좀 할까?"
현이 묵묵히 차에 오르자 차가 미끄러지듯 출발을 했다.
공단내를 벗어나 외곽지로 나오자 기와집으로 된 대궐같은 한정식 식당이 보였다.
김사장과 현이 탄 차가 천천히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김사장과 현이 식당안으로 들어서자 예약이 된 듯 남자 종업원이 방으로 안내를 했다.
방문을 열자 낯선 여자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김사장과 현을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중년의 낯선 여자분이 현에게 말을 건네었다.
현이 김사장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려다 중년의 여자분에게 인사를 받자 주춤거렸다.
"들어와서 이리로 앉게." 김사장이 현의 자리를 안내하듯 손짓으로 가리켰다.
"네" 대답을 하고 중년의 여자분이 앉아 있는 옆자리에 앉았다.
"식사는 미리 준비했어요." 중년의 여자분이 김사장에게 말했다.
"김현군 인사하게. 여긴 내 안사람일세."
방에 들어설 때부터 짐작하고 있던 일 이었다. 현을 수양아들로 삼는 일을 김사장 혼자서 결정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현은 알고 있었다.
"김현이라고 합니다." 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했다.
"듣던대로 예의가 아주 바르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김사장의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사장의 아내를 현이 처음 봤을 때 눈빛이 무서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릴적 엄마의 품처럼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점심식사가 나왔다. 김치와 밥을 제외하곤 처음보는 음식들이었다. 옛날 궁중에서 임금님이 먹었던 수라상이란다. 김사장 부인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현의 밥 숟가락 위에 올려주었다. 현이 밥을 다 먹을때까지 조기구이를 발라내 주었고, 자신은 배가 부른 듯 먹지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후식이 들어왔다. 수정과와 식혜가 상위에 올려지자 김사장이 말을 하였다.
"결정을 했나?"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여보. 현이 아직 소화도 안됐겠어요." 너무 성급하다는듯한 말투였다.
"아닙니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난주 김사장님과 골프장에 다녀오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김사장님의 말씀을 듣고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어제까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제 복학을 하면 3학년이 됩니다. 하고 싶은게 너무도 많은데, 김사장님께서 제게 주신 첫번째 기회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현이 말을 끝내고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현아. 현이라고 불러도 되지." 김사장의 부인이 현의 양손을 잡으며 말했다.
"네." 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현아. 정말 고마워." 김사장 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부인과 현을 번갈아 보며 김사장이 말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전공을 바꿨으면 하는데, 전자공학보다 경영쪽으로 바꾸면 안될까?"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의아했다.
지금 현의 나이가 스물여섯살이다. 다시 수능을 보고 대학을 졸업하면 아무리 빨라도 서른살을 훌쩍 넘기게 되는데.
"아니다. 다른대학으로 편입을 하던가, 아님 전과를 해도 되고."
"그럼 제가 학교로 가서 알아보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사장의 제안을 받아 들이게 되자, 모든것을 순순히 응할 수 있었다.
"아니다. 내가 알아봤는데, 다른학교로 편입을 하렴. 점심식사 끝내고 현이랑 학교에 다녀올께요. 현이도 시간 괜찮지?"
"전소장님께 전화하면 괜찮을 겁니다."
대화를 끝내고 현이 김사장 부인과 함께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운전기사가 있는 차였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김사장 부인이 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직까지도 눈가에 눈물 몇 방울이 맺혀 있었다.
지은이 조교 사무실 창가에 앉아 겨울 햇살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상우랑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조교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지은의 시선이 문쪽으로 향했다.
"지은이 학교에 나와 있었네." 담당 교수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지은이 미소를 지으며 반가워했다.
"안색이 별로인데, 무슨일 있었니?" 지은이 곁으로 다가오며 걱정스러운듯 물었다.
"아니예요."
"어제 준혁이가 집에 왔었어. 녀석 얼굴이 울상이길래 물어봤더니, 지은이 얘기를 하더구나.
녀석도 힘든 모양이야. 지은이가 결단을 내렸으면 해."
"죄송해요. 교수님. 제가 준혁씨한테 연락해서 얘기 할께요."
"그래주면 좋겠어. 그럼 난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갈께. 남은 방학 잘 보내고." 담당 교수가 손을 들어 인사를 하며 조교 사무실을 나갔다.
최준혁. 지은도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은에게 현이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크게 자리잡고 있었기에 준혁이가 들어 올 틈이 없었던것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존재 김현. 조금씩 비워내고 있는 중이었다. 지은이 핸드폰을 꺼내 준혁에게 저녁에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그 사이 상우가 조교 사무실안으로 들어왔다.
"뭐해? 이제 괜찮아?" 상우가 지은의 핸드폰 액정화면을 훔쳐보며 말했다.
"뭘 훔쳐보는데." 지은이 얼른 문자를 전송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어제 김현이를 만났다. 네 얘기 해 봤는데, 기억하고 있더라. 근데 네가 자기를 그리워하는 줄 모르던데. 현이도 널 보고 싶어 하더라. 널 걱정하던데, 그때 다친 상처가 잘 아물었는지, 지금도 사진찍으러 열심히 다니는지. 너두 같이 갔으면 좋았잖아."
"그래" 시큰둥한 말투였다.
"어라, 네 말투가 이상한데. 뭐야." 상우가 지은의 말투에 딴지를 걸었다.
지은이 상우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 한편으론 기뻤다. 현이 자기를 생각하고 있다는 상우의 말에 잊을려고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제 상우랑 같이 못 간게 후회가 되었다. 잊을려고 몸부림치던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지금 어디있어?" 지은이 궁금한 눈빛으로 상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안 가르쳐 줄래. 아무리 여자의 마음이 갈대라지만 너무 하잖아. 이랬다 저랬다."
"저녁사줄께."
"오케이. 지금 전자공단내에 있는 택배회사에 다녀. 복학 학비랑 생활비 마련한다고. "
"그렇게 어려워?"
"혼자니까. 세상에 자기 혼자니까 그런거지."
상우와 지은의 대화중 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은이 한참을 얘기하다 전화를 끊었다.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지 지은이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무슨일인데, 미안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하니?"
"아무일도 아니야. 나가자 저녁 사줄께. 그리고 내일 나랑 현이씨 만나러 같이가는 거다."
"알겠사옵니다. 공주마마."
준혁이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중 핸드폰 문자 알림이 울렸다. 회의 분위기가 워낙 격해서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반가운 사람에게서 온 문자메시지였다. 저녁에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지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울렸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하려고 통화버튼을 누르는데 준혁의 전화기가 울렸다. 지은의 담당교수로 있는 사촌형이었다.
"최준혁입니다."
"동생. 형이야. 바빠?"
"아니. 괜찮아."
"오늘 지은이 만나서 얘기했다. 저녁에 너 만나서 얘기 한다더라. 잘해라. 마음 아파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전화통화를 끝내고 지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준혁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반가운 목소리가 준혁의 귀를 타고 들려왔다.
"잘 지냈어요? 지은씨 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좋아요."
"네. 저녁약속때문에 전화하셨죠? 죄송합니다. 제가 약속하구선 다음에 만나면 안될까요?"
"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다음에 전화 할께요."
"자꾸 죄송하다고 하시면 저 화냅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네. 담에 꼭 뵙기를 바랍니다."
준혁이 지은과의 통화를 끝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은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방금전에 흥분되었던 마음이 가라앉는듯 했는데, 또 다시 마음이 어지러웠다.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핸드폰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어떤 말이라도 빨리 들어야지 어지러운 마음이 평온을 찾을 듯 했다.
사무실로 들어와 준혁이 사직서를 쓰고 있었다. 몇해전부터 준혁의 집에서 변호사 개업준비를 하라고 했다. 천직이라 생각하고 지금에 일을 하고 있는데, 지은이 준혁의 마음에 들어오고 난 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부서로 가던지, 아님 준혁의 가족들이 원하는 변호사가 되던지 상관이 없었다. 오로지 지금 준혁의 마음속에는 지은이 밖에 없었다. 자기 여자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현이 택배 사무실 직원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이틀 후면 정들었던 이곳을 떠나야한다. 복학하기까지 계속 일을 하려고 했지만, 김사장이 반대를 했다. 편입 시험도 봐야하고 김사장의 일본출장때 같이 가야 한다면서 일을 그만두길 원했다. 이미 전소장에게 김사장이 모든 얘기를 해 놓았던지라 전소장도 현이 일을 그만두는것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없었다.
단지 매주 일요일마다 조기 축구회에 나오라는 말만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술자리가 파했다. 내일도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택배 사무실 이층에 있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현이 방에 들어와 방안을 둘러보았다. 정이 많이 들었던 곳인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책상이며, 옷장이며, 창문조차 이제 영영 이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