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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주기철 목사님

서정민교수의 한국교회 인물 이야기

옥중서 만신창이… 최후엔 승리자돼

“쑥갓을 실컷 흰밥과 함께 먹고 다시 생각이 안 나도록 했으면 합니다.… 따스한 숭늉 한 사발을 마시고 싶소.”

한국교회의 영웅적 순교자로 기록된 주기철(1897~1944)의 마지막 때 가장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절규이다. 이에 따르면 그는 결코 강인하고 용맹스럽게 신앙을 증거하고 죽어간 순교자는 아니었다. 우리의 보통 성정과 참으로 닮은 여린 인간의 풍모를 짙게 보인다. 이것이 오히려 참 순교자의 면면으로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1938년 2월부터 최후를 맞은 1944년 4월까지 모두 네 차례의 구속, 지속되는 고문과 감옥생활은 그의 심신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주님! 저 이러다가 순교 못할 것 같습니다. 순교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주기철은 감옥 내내 불안하였다. 정신적 압박과 육체적 고통으로 인하여 일제의 강압에 굴복할 것 같은 위기감 때문이었다. 결국 최후까지 한 순간 한 순간을 가까스로 이겨낸 주기철은 그토록 원하던 신앙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

1930년대 말부터 일제는 한국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탄압정책을 구체화했다. 대표적인 항목이 신사참배의 강요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로 갈수록 탄압의 강도를 높여 천황제의 종교적 특성과 기독교 신앙이 극한대립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갔다. 곧 ‘현인신(現人神)’ 천황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립시켜, 크리스천에게 “천황이 높으냐 예수가 높으냐”라는 상식 밖의 질문으로 사상과 신념의 자유를 억압해 나갔다. 이 시기 대개 1000여명의 수난자가 발생했고, 50여명의 순교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주기철이다. 주기철은 연희전문학교 상과와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목회를 시작한 복음주의적 목사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는 성서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증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는 보수적 크리스천 지도자였다. 당시 일제는 ‘신사참배’가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단순한 국민의례로 국체를 봉양하는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 내의 모든 기독교회,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에는 한국의 신·구교 대부분의 공교회들이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특히 주기철 목사가 소속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역시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한국교회 주류 전체가 일제의 신앙탄압에 굴복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소수의 저항자들은 ‘우상숭배 불가’라는 신앙적 지조를 지켜나갔다. 이러한 저항자들의 동기가 순수한 신앙적 동기이기는 했지만. ‘현상적’으로 볼 때 일제로서는 강력한 반체제적, 항일 저항의 사례들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 가장 상징적이며, 실질적인 항일저항 주도자의 한 사람은 주기철이었다. 순교자 주기철은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평양감옥에서 절명하였다. (서정민 연세대 교수·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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