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이 되고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확실히 구청에 있을 때보단
시간이 뭉텅뭉텅 흘러가는군요.
모쪼록 세월에 뒤쳐지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 그래서 오늘 뭐 했냐 =============================
= 아빠, 아빠는 직업이 뭐야?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가정환경조사 설문지를 받은 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늘 집에 있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이상한 그림을 그리거나,
조그만 장난감들을 만지는 일 밖에 하지 않았고
내가 아는 한 그런 직업은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 아유, 우리 딸... 아빠 직업? 아빠는 공돌이야.
= 공돌이? 곰돌이가 아니고?
= 응. 공돌이.
= 그게 뭔데?
= 음...... 먼 미래를 가까운 미래로 만드는 사람.
= 먼 미래를.... 가까운 미래로?
어린 마음에도 난 아빠의 그 말이 참 멋있게 들렸다.
그래서 당당하게 아빠 직업란에
=공돌이= 라고 적어서 냈다.
그리고... 선생님한테 혼났다.
= 민아야, 아빠 직업이 공돌이가 뭐니?
공돌이는... 나쁜 말이야.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 소리 못 들어봤니?
아빠는 민아를 위해서 열심히 공장에서 일하시는데....
난데없는 꾸지람에 억울한 마음이 든 나였지만,
그 땐 설움이 복받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책상을 두드려대며
=민아네 아빠는~ 공돌이래요~.
라고 나를 놀려대는 아이들의 반응에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집에 돌아온 난,
곧장 아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소리쳤다.
= 아빠 나빠! 뭐가 공돌이야! 선생님한테 혼났잖아!!
= 응? 선생님한테 혼났다니.... 왜?
난 가방 속에 꼬깃꼬깃 접어 온 생활기록부를
아빠 앞에 내밀었다.
그곳엔 굵은 빨간 글씨로
=아이가 아빠 직업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지게 된 듯 합니다.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 어이쿠 이런.... 아니 난...
이런 데 쓰려는 건 줄은 몰랐지.
이걸 어쩌나?
여보~ 잠깐만 이리 와 줘요.
내가 또 큰 사고를 쳐버렸네.
잠시 후, 엄마가 내게 돌려준 설문지엔
=메카트로닉스 제어 및 구현기술 개발자=
라는 정말 생소한 직업이 적혀있었다.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몇 달 만에 아빠와 집 앞 공원에 놀러 나온 난
신이 나서 아빠에게 물었다.
= 아빠, 지난번에 왜 아빠 직업이 공돌이라고 했어?
선생님이 그거 나쁜 말이래.
= 음? 민아도 공돌이란 말이 마음에 안 드니?
= 아니, 난 좋은 말 같은데,
선생님이 그건 아빠 직업을 굉장히 나쁘게 말하는 거라고...
= 그래? 왜 그런가 모르겠구나.
아빠도 공돌이란 말이 참 좋은데....
공돌이, 공돌이.... 부르기 쉽고 친근하고 얼마나 좋니?
아빠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한참을 웃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나도 같이 웃었다.
우리 아빠는 누가 뭐래도 =공돌이=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우리 집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엄청 큰 자동차를 타고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온 아저씨.
아빠는 그 아저씨를 두 팔 벌려 환영했지만,
날카로운 금테 안경이 왠지 무서워 보였던 난
거실 문 뒤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 이 친구야, 자네 아직까지 이러고 있나?
= 음? 아니 이게 뭐 어때서.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어.
사람들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기 시작했고....
=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외국에선 자네 같은 사람을 혈안이 돼서 찾고 있는데.....!
= 에휴, 밖에서 부른다고 다 나가면 집 지킬 사람이 없잖아.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라도 하나 남아 있어야.....
다른 사람들한테 얼굴 비추는 것도 싫어하던 아빠가
저렇게 마주앉아 웃으며 말하는 걸로 보아
저 아저씬 아빠의 오랜 친구 사이인 듯 했다.
= 요즘은 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나?
= 아, 한 번 보겠나? 제법 반응 괜찮은 것들도 있는데....
아빠가 방에서 가져온 두꺼운 종이뭉치들을
한참동안 살펴보던 아저씨는
놀란 눈빛으로 아빠에게 물었다.
= 이거.... 다른 사람한테도 보여준 적 있나?
= 아니, 이건 아직 관심을 보이는 회사들이 없어서...
= ..... 자네가 해.
= 응? 무슨 소리야, 그건?
= 내가 투자할게. 이거 다른 사람 준다고 될 일 아니야.
자네가 해 봐.
= 에이, 됐어. 자네도 알잖아? 나 사업수완 엉망인거...
= 헤드헌터들한테 의뢰해서
경영인이고 뭐고 필요한 만큼 구해다 줄게.
프레젠테이션 때 쓸 자료만 간단하게 뽑아 줘. 내가 책임지고....
그 아저씨가 다녀간 이후,
아빠는 굉장히 바빠졌다.
하는 일은 평소나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1분 1초가 아깝다는 얼굴로 계속 책상에만 앉아있는 아빠를 보면
정말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단 생각은 들었다.
= 아빠.... 바빠?
= ........ 응, 무슨 일이니, 민아야.
= .... 인형놀이 하자.
= 아..... 저기, 아빠가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안 되겠다.
대신.... 아빠가 다음에 민아 사달라던
그, 뭐더라, 주둥이 인형 사줄게.
= 주둥이가 아니라 주디 인형.
= 아, 그래. 주디 인형.
며칠 후 아빠는 정말로 주디 인형을 사다 주었다.
하지만 인형놀이는 해주지 않았다.
= 아빠....
= ....... 응, 왜?
= .... 산책가자.
= 으응? 뭐라고? 과자?
= ........ 아냐. 아무것도....
책상 앞에만 앉아있던 아빠는
어느덧 내 눈조차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아빠는 바빴다.
내가 학교에 갈 때도, 학교에서 돌아 왔을 때도
아빠는 끊임없이 뭔가를 쓰고 지우는 일을 반복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몇 번이나 쉬어가면서 하라고 말했지만,
아빠는 어깨 너머로 손만 흔들어 보일 뿐 아무 대꾸도 없었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빠가 변함없이 책상에 앉아있는 사이
인형들은 늘어만 갔고,
우리 가족은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기에 이르렀다.
= 민아야, 어때? 새 집 마음에 들어?
= 응, 너무 좋아. 이제 내 방도 생기는 거야?
= 그럼~. 민아 인형들 자는 방도 따로 있는 걸?
새로 이사한 집은 정원에 발코니까지 있는 2층짜리 집이었다.
여덟 개나 되는 방은
침실이며, 서재며, 놀이방으로 꾸며졌고
정원엔 갖가지 꽃과 나무가 자라게 되었다.
= 아빠는? 아빠 방은 어디 있어?
= 아빠 방은 지하에 있어.
지금은 일하시니까, 나중에 보러 가자.
아빠의 방은 지하에 있었다.
아빠도 거기 있었다.
아빠는 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넓은 집 안에서 아빠의 공간은 오직 그곳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아빠가 방 밖으로 나오는 때는 손님들이 왔을 때뿐이었다.
몇 달에 한 번씩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올 때면
아빠는 초췌한 모습으로 양복을 차려입고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 뒤엔 더욱 지쳐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와
묵묵히 지하실로 향했다.
= 여보.... 제발.... 좀 쉬어요.
= 외국 기업에서 우리 아이디어랑 같은 걸로 특허를 내버렸어.
이틀만 더 빨리 작업해서 발표했으면
막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손도 못 써보고 당했어.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더욱 더 앞서가지 않으면 안 돼.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기발하고 새로운
혁신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빠의 얼굴은 너무 무서웠다.
마치 금방이라도 용암이 흘러내릴 것처럼 붉게 충혈 된 눈은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오면 학교에서 글쓰기로 받은 상장을 자랑하려던 난
이내 그 생각을 접고 인형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를 방해하면 안 된다.
아빠는 바쁘니까....
아빠가 한가해질 때까진 인형들이랑 놀아야 한다.
= 얘들아, 얘들아~.
나 오늘 학교에서 상 받았다~.
무슨 상이냐고? 어버이날 글쓰기 대회 최우수상~.
읽어줄까? 들어봐~.
우리 아빠는 언제나 바쁘십니다.
메카트로닉스 기술을 개발하시는 아빠는
오늘도 외국기업들보다 앞서 나가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난 집 앞에 서있는 구급차들을 보게 되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집안에 들어선 내가 본 건
힘없는 팔을 밖으로 늘어뜨린 채
들것에 실려 나가는 아빠의 모습.
언제나 활활 타오르고 있던 아빠의 눈은
무섭게도 꼭 감겨있었다.
= 아.... 아.... 아빠!!! 아빠아아아!!!
난 정신없이 달려가 아빠의 손을 붙잡았다.
3년 만에 다시 잡아본 아빠의 손가락은
깜짝 놀랄 만큼 가늘고 차가웠다.
마치.... 당장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처럼.
= 민아야, 민아야. 이리 와 민아야. 아빠 괜찮으셔. 걱정하지 말고....
옆에 있던 엄마는 황급히 나를 달래며
아빠로부터 떼어놓으려 했지만,
난 꼭 잡은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
지금 놓으면 언제 다시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한 직감이 온 몸을 엄습했다.
=삐뽀 삐뽀 삐뽀=
하지만 결국 아빠는 떠났다.
점점 느릿하게 늘어지는 사이렌 소리만을 남긴 채....
그리고, 돌아오지 않으셨다. 영원히.
아빠의 장례식 날,
3년 전에 아빠를 찾아왔던 아빠의 친구는
아빠의 관을 붙잡고 오열을 금치 못했다.
= 허.....어어..... 허어..... 이 친구야.....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가나.
몇 달 전만 해도 그렇게 의욕에 불타서 활짝 웃던 사람이.....
내가... 내가 자네를 죽인 건가?
내가... 자네에게 열어준 그 길이...
자네를 죽음으로 내몬 건가? 내가... 내가...
= .... 자책하지 마세요. 그이는....
분명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을 테니까요.
이후 아저씨는 아빠의 장례식과 더불어
아빠가 하던 사업을 정비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9개월 뒤 엄마와 결혼했다.
말은 결혼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살림을 합친 정도였고,
엄마와 아저씨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아마 엄마는 나를 결손가정으로 키우고 싶진 않았던 것 같다.
엄마의 재혼과 더불어
나에겐 한나라는 여동생도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셋에서 둘로, 그리고 넷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