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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복 편 지 27

수호천사 |2006.12.02 12:07
조회 534 |추천 0

 

 

 

 

 

『창틀의 도마뱀 꼬리』 - 장철문(1966~ ) - 개미들이 도마뱀 꼬리를 먹고 있다. 급한 김에 꼬리는 두고 갔는데 그것이 개미들의 식량이 되고 있는 줄 도마뱀은 알고 있을까? 개미들은 알고 있을까? 그것이 벗겨진 신발이 아니라 누군가의 몸이었다는 것을 도마뱀 꼬리에서 걸레 썩는 냄새가 난다. 견딜 수 없는 빵냄새를 향하여 개미들은 떼지어 몰려온다. 햇볕 쨍한 창틀 무심코 창을 닫은 손길이 검푸르게 식어서 뜯겨나가는 몸뚱이 잃은 꼬리를 만들었다. 아니, 빵을. '창틀의 도마뱀 꼬리' 전문

 

 

 

보면,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빵도 원래 누군가의 몸이지 않은가. 들판의 밀이나 벼를 베지 않고, 소나 돼지의 목을 치지 않고, 오늘의 한 끼니가 가능했을 것인가. 그러나 언젠가 땅에 묻혀 벌레들에게 썩어가는 몸을 바칠 수 있으니 그리 불공평한 일은 아니다. '견딜 수 없는 빵냄새'를 향해 몰려드는 개미떼. 죽음의 냄새를 향해 갈 때 삶은 가장 맹렬해지는 모양이다. - 나희덕<시인> -

 

 

 

 

 

 

 

『너는 느낌표』 - 김소엽 - 너는 항상 나에게 느낌표였었네. 네가 떠난 빈자리에도 느낌표 하나 남았네. 만남의 순간 순간 나는 젖었었네. 네 가슴우산에 들어가 젖은 가슴 기대서면 너는 느낌표로 돌아오고 나는 네 가슴속 쉼표가 되었네. 우리 생애 끝나는 날 길동무로 걷다가 신이 부르시면 기쁨으로 함께 마침표 찍어야겠네. '너는 느낌표'전문

 

 

 

 

 

 

 

 

 

 

『바닷가 사진』 - 이시영(1949~ ) -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나오는 '월간 인권' 2003년 10월호 표지엔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장화를 신은 한 성자가 바닷가 뻘밭 외로운 소나무 둥치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얼굴은 해풍에 씻긴 소나무 껍질처럼 일그러지고 키보다 긴 대나무 지팡이를 움켜쥔 손가락은 모두 잘리고 없는 한센병 할아버지 사진이었습니다. '바닷가 사진' 전문

 

 

 

햇빛이 굉음처럼 쏟아지던 어느 오후 나는 소록도를 길잃은 집게처럼 돌아다녔다. 바다가 보이는 소나무 그늘에서 땀을 식히며 앉아 있는 동안 배에서 먹던 모시떡이 생각나 꺼내 들었다. 근처에 한 노인이 등을 돌리고 앉아있기에 다가가 떡 몇조각을 건넸다. 그런데 뒤돌아 보는 그에게는 떡을 받아들 두 손이 없었다. 그 성자의 사라진 두 손이 진흙 같은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 나희덕<시인> -

 

 

 

 

 

 

 

『벌써 사랑이』 - 한영옥(1950~ ) - 벌써 사랑이 썩으며 걸어가네. 벌써 걸음이 병들어 절룩거리네. (중략) 병든 사랑은 아무도 돌볼 수가 없다네. 돌볼수록 썩어가기 때문에 누구도 손대지 못하고 쳐다만 볼 뿐이네 졸아든 사랑, 거미줄 몇 가닥으로 남아 파들거리네. 사랑이 몇 가닥 물질의, 물질적 팽창이었음을 보는 아아 늦은 저녁이여. 머리를 탁탁 쳐서 남은 물질의 물질적 장난을 쏟아버리네. 더 캄캄한 골목 가며 또 머리를 치네. 마지막으로 물큰하게 쏟아지는 찬란한 가운데 토막, 사랑의 기억 더는 발길 받지않는 막다른 골목까지 왔네. '벌써 사랑이' 부분

 

 

 

신록의 시절은 잠깐, 무성한 잎사귀에서는 벌써 풀비린내가 풍기기 시작한다. 무성하다는 것은 절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순결한 사랑의 기울기가 꺾이기 시작했음을, 저무는 일만 남았음을 알리는 신호다. 사랑이 한낱 '물질적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저녁, 막다른 골목을 걸어가는 슬픈 등이 보인다. - 나희덕<시인> -

 

 

 

 

 

 

 

『소화(消化)』 - 차창룡(1966~ ) - 차내 입구가 몹시 혼잡하오니 다음 손님을 위해서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승객 여러분 봄 여름 가을 입구에서 서성대고 계시는 승객 여러분 입구가 몹시 혼잡하오니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갈 봄 여름 없이 가을이 옵니다 다음 손님을 위해서 조금씩 겨울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정류장은 봄입니다. '소화(消化)' 전문

 

 

 

아침마다 우리는 어디론가 실려간다. 꾸룩거리는 배속의 밥알처럼. 좀 더 안으로 들어가라고, 그래야 좀 더 태울 수 있다고, 운전기사는 소리친다. 그래야 봄이라는 정류장에 내릴 수 있다고 말이다. 만원 버스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밟히는 동안 갈 봄 여름 없이 가을이 오고, 겨울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아, 내리려고 보니 어느새 소화가 되어버렸다. - 나희덕<시인> -

 

 

 

 

 

 

 

『쨍한 사랑노래』 - 황동규(1938~ ) -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줄 처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쨍한 사랑노래' 전문

 

 

 

먼 강가에 혼자 하염없이 앉아 있으면 이런 마음자리가 보일까. 그러나 삶은 한나절의 적요(寂寥)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이 우리를 게처럼 꽉 물고 놓아주지 않는 것인지, 우리 마음이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쥐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마음을 방생하러 강가에나 가야겠다. 마음을 비우겠다는 마음조차 없이. - 나희덕<시인> -

 

 

 

 

 

 

 

『돌과 시』 - 강인한(1944~ ) - 햇빛이 부서져서 그물눈으로 일렁거리는 물 속 고운 빛깔로 눈 깜박이는 돌빛 건져올리면 마르면서 마르면서 버짐꽃이 피고. 내가 쓰는 글도 물 속 깊은 생각 치렁한 사념의 물빛에서 건져올리면 햇빛에 닿아 푸석푸석 마른 돌꽃이 피고. '돌과 시' 전문

 

 

 

도(道)를 말로 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라고 했던 노자의 말처럼, 물 속에 노닐고 있는 물고기를 잡기에 언어라는 통발은 거칠기 짝이 없다. 물 속에서 건져올린 돌이 이내 신비한 빛을 잃듯이, 일렁이는 생각의 물결에서 말을 건져올리는 순간 그것은 곧 시들어 버리지 않던가. 그래서 어떤 날은 싱싱한 생각 한 자락 입에 물고 끝내 내놓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 나희덕<시인> -

 

 

 

 

 

 

 

『장미의 날』 - 양애경(1956~ ) - 장미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가지 위에 솜털 같은 가시들을 세우고 기껏 장갑 위 손목을 긁거나 양말에 보푸라기를 일으키거나 하면서 난 내 자신쯤은 충분히 보호할 수 있어요 라고 도도하게 말하는 장미의 기분 오늘 나는 하루 종일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가위에 잘려 무더기로 쓰러지는 장미꽃들과 함께 축축한 바닥에 넘어졌다. '장미의 날' 전문

 

 

 

가시를 가진 식물은 대체로 다른 무기가 없다. 그래서 더욱 잔가시들을 잔뜩 세우고 있는지 모른다. 호랑가시나무는 잎이 여릴 때는 여러 갈래로 가시가 돋아 있지만 잎이 크고 두꺼워지면 가운데 가시만 남고 둥그스름해진다. 하지만 그 굵은 가시는 호랑이 등을 긁을 만하다고 하지 않는가. 잔챙이 같은 상처만 일으키는 장미의 날들이여, 가시를 품으려거든 호랑가시나무 잎을 보라. - 나희덕<시인> -

 

 

 

 

 

 

 

『떠도는 자의 노래』 - 신경림(1935~ ) -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전문

 

 

 

길을 떠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나를 되찾기 위해서다. 불현듯 옆구리가 허전하게 느껴질 때, 그 존재의 허기를 채우려고 신발끈을 매고, 차표를 끊고, 어두운 저잣거리를 무작정 기웃거린다. 언젠가의 내가 쓸쓸한 간이역이나 나룻가에 앉아 있을 것 같아서. 그러나 거기서 마주치는 것은 낯선 얼굴뿐, 나에게로 가는 길은 너무 멀다. - 나희덕<시인> -

 

 

 

 

 

 

 

『沈香(침향)』 - 박라연(1951~ ) - 잠시 잊은 것이다. 生(생)에 대한 감동을 너무 헐값에 산 죄 너무 헐값에 팔아버린 죄, 황홀한 순간은 언제나 마약이라는 거. 잠시 잊은 것이다. 저 깊고 깊은 바다 속에도 가을이 있어 가을 조기의 달디단 맛이 유별나듯 오래 견딘다는 것은 얼마나 달디단 맛인가 불면의 香(향)인가? 잠시 잊을 뻔했다. 白檀香(백단향)이, 지상의 모든 이별이 그러하다는 것을 깊고 깊은 곳에 숨어 사는 沈香(침향)을, '沈香(침향)' 전문

 

 

 

수백년 동안 물속에 묻혀 있던 침향(沈香)의 냄새를 미당은 이렇게 표현했다. "실파와 생강과 미나리와 새빨간 동백꽃, 거기에 바다 복 지느러미 냄새를 합친 듯한 미묘한 향내"라고. 침향뿐 아니라 고요히 시간을 견디어온 사람이나 작품에는 특유의 향기가 있다. 하지만 헐값에 감동을 사고파는 요즘 세상에 이런 원형질의 향기를 기대하기는 점점 어려워져 가는 것일까. - 나희덕<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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