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병우에 대해 이런 저런 질문을 하시고는 여행 때문에 많이 피곤할테니 그만 자라고 하시고는 지하실로 내려가셨다. 늘 외로울 때면 아빠는 지하실로 내려가 뭔가를 하신다. 문앞에는 이런 글이 있다. 관계자외 출입금지. 사랑이 아빠를 외롭게 하는지 엄마의 죽음이 아빠를 외롭게 하시는지 묻고 싶은 적도 있었다.
“너는 당분간 화진이가 쓰던 저 방을 쓰도록 해.”
“너는 어느 방에 자는데...”
“난 저방이야. (화진이방 맞은편에 있는 방을 손으로 가리키면...) 일어나고 싶을때 일어나 특별히 일어날 시간은 없어.”
"너는 몇시에 일어나.“
“아침잠이 많아.”
“잠꾸러기.”
“잘자.”
환하게 웃는 병우의 얼굴이 좋아졌다. 그 얼굴에 덩달아 나도 웃게 된다. 병우의 웃는 얼굴은 저 얼굴을 어쩜 앞으로도 영원히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일어나서 아침 먹어."
문밖에서 나를 깨우는 병우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린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늘 듣던 무거운 아빠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근사근하면서 달콤하게 나의 이름을 부르면 깨우는 이 목소리는 지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분명 천상의 목소리라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정말 기분좋게 일어났다.
"못생긴 애 빨리 일어나. 밥 먹어야지."
잘나가다가 못생긴 애.... 이런.. 저 놈을... 화영은 미처 자신이 츄리닝에 머리는 부시시하다는 걸 잊고는.. 거기다 입가에 침까지... 최악의 순간을 잊고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순간 환한 빛이 눈을 멀게 만들었다. 너무나 멋있는 남자가 자신의 방문앞에 떡하니 서 있는 모습이 보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키스...
"더러워. 씻고 밥이나 먹지."
헐..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내 머리통을 갈겼다.
"뭐가... 더러워"
"너 원래 침흘리고 자니?"
"침..."
그러고 보니 흘리는 버릇이 있었다. 이런 된장.
"어서 와서 아침밥 먹고 나랑 놀러 나가자."
"어디.."
"한국 구경 시켜줘야지."
"내가... 왜?"
"난 귀한 너의 손님이니까?"
"됐거든."
"어딜부터 갈까?"
일이 자꾸 꼬인다. 저 녀석이랑 이상하게 꼬인다. 더 이상한 일은 저 녀석 말대로 아침밥을 먹고, 저 녀석과 함께 부산 시내를 구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즐겁게...저 녀석보다 더 신나게.. 최면이 말이 아니다.
아무튼 저 녀석과 함께 있으면, 무조건 즐겁다. 또 하나 여자들의 시선이 즐겁다. 이 녀석을 쳐다보는 시선과 날 쳐다보는 시선이 이상하게 겹치면서 질투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게 사람 묘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이런 시선 받아본적도 없었다. 아니 남자의 시선을 끌만큼 외모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못생긴 얼굴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름 괜찮은 얼굴이지만 여자들의 질투 어린 시선은 처음이다. 악마적인 감정이 들었다. 남자친구라는 소리에 아니라고 정색은 했지만 속으로는 좋았다. 하하하... 아닌척 했지만 기분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이 녀석보다 내가 더 즐기고 있는 듯했다.
"못생긴 애, 나랑 다니니까 좋아. 하루종일 실실 웃고 있는 거 알지."
"내가 언제..."
"내숭 떨지마 너랑 내숭은 안어울려. 좋으면 좋다고 해.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 없어."
"그래 좋다. 어쩔래...꼭 확인을 해야겠냐."
"그건 나쁘게 아니야. 서로에게 솔직한게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앞으로 너한테 솔직해 질거야. 사소한거 하나까지... "
"왜?"
"두고 보면 알거야."
"뭘 두고봐."
"오늘은 그냥 즐기자. 앞으로 함께 할 날이 많으니까. 천천히 서두르지 않을거야."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안다. 이 녀석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우린 만나야했고, 그게 운명이든 우연이든 우린 그렇게 만나고 사랑하게 될거라는 걸 알았다. 사랑이... 사랑이... 그렇게 찾아온다는 것도 알았다. 그때 알았다. 그리고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다.
병우와 많은 날들을 같이 보냈다. 늘 보고, 또 보고, 그래도 또 보고 싶었다. 화진이 제대하고, 같은 방을 썼다. 처음에는 화진이 불같이 화를 냈지만 자신이 가고 없는 이 집을 생각해서 병우가 있어준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 다음부터는 아무런 말이 없이 가족이 되었다. 화진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다. 다음학기에 등록을 해야하기 때문에 이 집에 있을 시간도 한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 화진은 서울로 가게 된다. 대학 1학년때 군대를 갔다. 무슨 일로 그렇게 빨리 지원했는지는 모르지만 짐작으로 사랑때문인 것 같았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는데 그 여자가 선배와 사귀는 바람에... 아님 양다리 인지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아무튼 여자 문제로 군대에 지원하게 된 듯한다. 그 해 봄 화진은 죽을 만큼 힘들어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 잊은 듯 예전의 화진으로 돌아와 있었다. 군대에 가면 사랑도 잊을 수 있는가 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점점 나의 감정도 사랑으로 변했다. 매일 보는 병우를 보면 내 심장이 조금씩 두근 거리고 어쩌다 병우가 가까이 오게 되면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엉뚱한 상상도 하게 되었다. 저 입술을 한번만... 한번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런 날이 오게 되었다. 나도 도저히 내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그런 날이 오게 되었다.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내가 미쳤지.. 변태가 보다. 아님 색녀... 아님.. 옹녀... 그것도 아니면 병우만 보면 이상 야릇한 생각이 드는 이유를 아무리 설명을 하려해도 할 수가 없다. 잠이 오지 않아서 마당에 나와 별을 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병우 생각으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도 같은 지붕아래에 있는 이상 힘이 들었다. 이런 젠장 빌어먹을....
"거기서 뭐해."
이 순간 제일 보고 싶지 않는 얼굴이 바로 저 녀석이다.
"그냥.. 너는 안자고 왜 나왔어. 들어가서 자."
"별 보고 싶어서 나왔어."
병우를 피하고 싶은 생각에.. 아니 내가 병우를 어떻게 할 것 같아서 피하고 싶었다.
"그럼 별 구경 많이해. 난 들어가야겠다."
"가지마. 나랑 같이 있어."
헐... 가지마 같이 있어. 라면 말하는 병우의 얼굴을 무심히 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넘지 말아야 선을 넘었다. 분위기 탓이라고 나 스스로 위안을 삼아도 그건 별 도움이 안된다. 이건 명백히 내 탓이다. 병우의 입술을 훔쳤다. 이 순간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병우의 얼굴이다. 어찌나 민망하고 창피스러운지... 죽고 싶은 심정이다. 미쳤어. 정말 미쳤어.
"또 해도 돼. 계속 해도 괜찮아."
이건 무슨 소리인지....
"난...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할 생각은 아니었어. 그냥 나도 모르게... 너만 보면... 나도 모르게..."
횡설수설 내 입에서 나도 어떤 말이 나오는지도 모르게 지껄였다.
"내 말은 앞으로 이런 일 자주 하자는거야. 난 좋았어. 니가 먼저 다가와줘서... 영영 니가 오지 않을까봐 겁이 났거든. 근데 난 니가 이렇게 솔직하게 표현해줘서 좋았어."
"병우야..."
"사랑해."
"뭐... 병우야..."
병우가 날 소중하게 안았다. 안으면서 '사랑해'라고 했다. 날 소중하게 안으면서 사랑해라고 했다. 그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
"사랑해."
"병우... 사.. 랑...해"
이 순간 알았다. 내 마음을... 병우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알았다.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았다. 사랑하는 마음을... 내 심장이 그 동안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확실히 알았다. 그 동안 내 심장은 병우를 향해 사랑하고 있다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고마워 심장아. 고마워.. 사랑아... 그리고 사랑해 병우야. 내 앞에 있어줘서... 내 인생에 이렇게 들어와줘서... 내 손 잡아줘서.. 니가 날 사랑해줘서... 그 동안 날 기다려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