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길 꺼려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눈길을 읽어내는데 아주 능숙하다. 그래야지만 자신에게 접근하려는 상대방의 마음을 쉽게 차단할 수 있으니까.
소장은 분명 내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 평소 나를 보는 눈길이 내 눈 언저리에 아주 오래도록 머물렀고 가끔은 짧은 찰나 내 가슴께를 스쳐가기도 했다.
나를 한갓 매력 있는 중년남자로서 정복해 보고 싶은 독신녀로 보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진지함을 가지고 대하려는 것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아무 쪽이라도 상관 없는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소장은 개인 감정과 공적인 업무를 구분 못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별로 신경 쓸 것이 없다.
내 마음의 닫힌 철문은 열쇠 구멍마저 너무 녹슬어서 아마도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니까.
아침 9시에 간부 미팅이 시작되었다.
참가자는 소장, 행정부장과 재무부장, 그리고 연구업무를 총괄하는 나, 이렇게 네 사람이다.
소장실 옆 회의실에 모여 일주일에 두 차례 소규모 회의를 한다.
소장은 모르겠지만 다른 부장들은 아무래도 본사에서 발령되어 온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연구소 근무를 일종의 한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무사 안일주의가 좀 노골적이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둘 다 과학계통 전공자가 아닌 사무직 출신이라서 그런지 학술적인 얘기가 나오면 거의 입을 닫는다. 그때부턴 소장과 나, 주로 둘이서만 얘기를 주고받는 형태로 흘러간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회의 풍경이다.
소장은 아까 내 사무실에 들렀던 일에 대한 내색은 전혀 없이 요즈음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회의를 마치고 내 사무실로 돌아가 연구 자료를 검토한 후 실험실로 향했다.
요즘 진행되는 실험의 중간 과정을 연구원들과 점검하고 실험에 참여한다.
전산 데이터화가 순조롭게 진행 되는지를 마지막으로 점검한 후 내 사무실로 돌아온다.
벽에 걸린 시계는 벌써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식사시간이지만 나는 식당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한 테이블에 4~5명씩 둘러앉아 음식을 입에 넣는 일이 내게는 왠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12시 40분 정도가 평소의 내 식사시간이다. 텅 빈 식당에 혼자 않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의자에 누워 눈을 감았다. 식사 후의 오수만큼 달콤한 것은 없겠지만 공복의 짧은 잠도 나같은 사람에겐 달디단 것이다.
오후 실험실은 상대적으로 바빴다.
실제 실험치가 예상 치와 크게 차이가 나서 오류를 찾는 검토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실험팀 전원이 녹초가 되어 매달렸지만 만족할만한 결과를 찾지 못하고 다음날로 나머지 실험을 연기하기로 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시간이 벌써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날 연구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내 마지막 일과이다.
오늘 상당히 바빴던 탓에 이 시각까지 한번도 사무실을 들르지 못하고 실험실에서만 시간을 보낸 것이다.
컴퓨터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내달렸다. 급히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전화 벨이 울린다.
소장의 전화일 것이다. 오늘 저녁 식사 약속에 대한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전화한 거겠지.
전화기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멈칫했다.
내선 전화임을 표시하는 불빛이 반짝이질 않고 있었다.
외부전화인 것이다.
내 일터의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어........윤 지희 님 되십니까?”
전화감이 좋질 않았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네.......제가 윤 지희 입니다만.........누구시죠?”
잠시 후에 전화기 속의 남자 목소리는 그 누군가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 마음 속 얼음장이 쩍 하고 갈라지기라도 한 듯이 가슴께에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