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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 6. <그녀의 남자>

스토커 |2007.03.16 19:51
조회 989 |추천 0

그녀의 남자

  장성우는 레코드 가게 앞에서 다리를 꼰 채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이경아의 모습을 최면에 걸려든 사람처럼 눈길을 떼지 못하고 훔쳐보고 있었다. 손님이 없을 때 그녀는 항상 책을 읽고 있었으며, 책을 읽지 않고 있을 땐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장성우는 오늘로써 하루도 빠지지 않은 열흘째 한 시간 가량 이경아의 모습을 가로수 뒤에 서서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그림의 떡이었다. 레코드 가게 앞에 놓인 커다란 스피커에선 사이먼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노래가 감미롭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도 어제처럼, 아니 열흘동안 내내 장성우는 사무실을 나설 때만 해도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이경아에게 시선을 똑바로 주고 당당한 태도로 ‘나는 그대를 죽도록 사랑합니다. 내 사랑을 받아주십시오.’라고 또박또박 분명하게 말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막상 레코드 가게에 도착하면 장성우의 결심은 바닷가의 모래성이 되고 말았다. 다만, 그는 가로수 뒤에 몸을 숨기고 오랫동안 서서 레코드 가게 유리창 너머로 이경아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그녀와 함께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뿐이었다.

  상상 속에서, 장성우는 이경아의 집을 찾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현관의 초인종을 누른다. 그의 손에는 하얀 안개꽃에 둘러싸인 스물여덟 송이의 장미꽃으로 만든 꽃바구니가 들려져 있었다.

  “사랑합니다. 경아 씨…….”

  이경아가 현관문을 열며 반기자 장성우는 꽃바구니를 그녀의 가슴에 안기며 솜사탕 같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 번진다. 지금의 그녀는 그가 보아왔던 그녀의 얼굴 중에서 가장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얼굴이었다.

  이경아의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장미꽃 향기와 그녀의 아카시아꽃 향기가 장성우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거실 한쪽 벽면엔 베토벤의 액자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 놓여 있는 오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6번 전원이었다. 장성우는 이경아와 이렇게 단둘이 앉아 서로 마주보며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면서 유토피아 궁전에 들어온 기분을 느낀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흐르는 이경아의 침실에서 장성우는 그녀와 초콜릿 같은 입맞춤을 길게 나눈다. 입맞춤을 나누면서 그는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낸다. 그녀의 하얀 알몸이 수줍은 듯 홍조를 띠며 드러나자 이번엔 자신의 옷을 허겁지겁 벗는다.

  이경아를 침대에 눕히고 장성우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한다. 낮고 긴 신음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장성우는 이경아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으며 그녀의 몸 속 깊이 성난 성기를 집어넣는다. 그때 오디오에서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이 흘러나온다. 쾅쾅쾅 쾅! 쾅쾅쾅 쾅!, 그는 음악에 맞추어 격렬한 쾌감이 밀려오고 커다란 환희의 물결이 출렁이도록 그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그런 즐겁고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장성우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때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신사가 레코드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그의 시야 속으로 들어오면서, 그는 상상의 나래를 아쉽게 접어야만 했다. 겉모습으로 보아 CD를 구입할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쑥 무언가 모를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그는 불안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레코드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이경아가 활짝 웃으며 반기자 남자가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으며 자기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장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치다 하마터면 차도에 나자빠질 뻔했다. 그녀는 남자가 하는 대로 순순히 따랐고,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상관없다는 듯 가볍게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는 마치 무서운 악몽이 현실로 나타난 것 같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심정으로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면서 너무나도 큰 절망감에 짓눌린 장성우의 몸은 얼어붙었고, 가슴속에 품었던 희망이 눈사태가 나듯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그는 헛발을 내디딘 것처럼 다리에서 기운이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조그만 더 인내심이 부족했더라면 그는 레코드 가게 안으로 뛰어들어가 남자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렸으리라.

  이경아가 타준 커피를 마시면서 얼마 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레코드 가게 안으로 들어섰을 때처럼 그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가볍게 포갰다가 떼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때까지 CD를 구입하기 위해 가게를 찾는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남자를 배웅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이경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재빨리 가로수 뒤로 몸을 숨겼던 장성우는 그녀가 몸을 돌려 다시 레코드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지금 당장 남자의 목을 비틀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질투와 증오에 찬 시선으로 남자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오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지만 그는 그 남자의 등장으로 인하여 머릿속에 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그 남자에 대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행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레코드 가게 건물 뒤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 10분 정도 지나자 그랜저를 몰고 나와 장성우를 비웃기나 하는 듯 오른쪽 방향 지시등을 깜박거리며 도로에 들어서더니 빠른 속도로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장성우는 재빨리 차량번호를 외워 수첩에 옮겨 적었다. 영등포 경찰서 강력계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인 박종수에게 차량조회를 부탁하면 그 남자의 신원에 대해서 알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힌 그로서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독기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장성우는 레코드 가게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면서 힐끗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경아는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있었다.

  장성우의 머리는 빠개질 정도로 지끈거리고 입안이 오뉴월에 논바닥 갈라지듯이 바싹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이경아를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길 건너편에 있는 골든 사우나 간판이 들어왔다. 별안간 그는 사우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어느 정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장성우는 길 건너편 골목 안에 있는 사우나탕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 계단으로 내려갔다. 양쪽 방향에서 지하철이 똑같이 도착했는지 양쪽 개찰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채 사람들 틈 사이에 껴 계단을 이용해 지하철역을 빠져나온 장성우는 거리에 드문드문 있는 먹거리 장사들을 지나쳐서 첫 골목의 사우나탕 안으로 들어갔다. 사우나를 하기에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생각만큼 손님이 많지 않았다.

  탕 속으로 들어가 몸을 푹 담그고 물위로 얼굴만 내밀고 앉은 장성우의 머릿속에서 이경아가 그 남자와 호텔에서 만나 객실로 들어가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두 사람이 침대 위에서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뒹굴며 섹스를 하는 광경이 떠오르자 그는 격분에 못 이겨 상처 입은 한 마리 짐승처럼 머리를 흔들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갑자기 장성우가 질러대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몇몇 사람들이 별 미친 놈 다 보겠다는 듯한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봤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크게 지르고 나서 얼굴을 물 속에 잠수했다 나오는 일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피를 토하고 죽을 거만 같았다.


  골든 사우나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서 곧장 사무실로 돌아온 장성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영등포 경찰서 강력계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 박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이경아의 레코드 가게를 찾아왔던 남자의 차량조회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 말단 형사가 자리에 앉아 있을 리가 없었다. 전화 받는 사람이 몹시 불친절해 그는 메모도 남기지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아야 했다.

  장성우는 박종수가 경찰이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그의 별명은 ‘빈깡통’이었다. 오전 수업은 만화 가게나 오락실 같은데 가서 농땡이 치고, 그곳에서 도시락을 까먹은 뒤 점심시간이 끝나려고 할 즈음에 젓가락이 든 빈 도시락을 쩔렁거리며 등교를 해서 생긴 별명이었다.

  그렇게 망나니짓만 골라가며 해도 학부모 육성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아버지의 후광 덕분에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정학은 물론 퇴학을 당하지 않은 박종수였다.

  당연히 공부를 절대로 잘할 리가 없었던 박종수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재수생이 되었고, 재수생이 되어서도 그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수첩에 여학생들의 전화번호를 자그마치 서른다섯 개도 넘게 적어 다니면서 카사노바 흉내를 내며 공부엔 담을 쌓았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박종수는 군에 입대해 훈련소에서 전투경찰에 차출되었고, 복무기간 동안 정부의 충실한 앞잡이가 되어 데모진압만 하다가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3박 4일의 마지막 휴가를 나온 그 날, 박종수는 몇몇 친구들과 삼겹살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던 도중에 한동안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느닷없이 ‘나 경찰 될래’라고 말하고 나서 진짜 경찰이 되었다. 당시 친구들 모두는 싱거운 농담인 줄만 알았다.

  장성우는 다시 수화기를 들고 박종수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으나 어디서 잠복근무를 하고 있는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통화를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조급한 탓에 바로 통화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실망시켰던 것이다. 그는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중이라면서 메시지를 남기라는 소리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시키고 별표를 눌렀다.

  “쌍놈의 새끼!”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이경아와 가볍게 입맞춤을 하던 중년 남자를 떠올린 장성우가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오게 욕설을 내뱉자 옆자리의 최정호가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이냐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 대신 고개를 저으면서 몸을 일으켜 담배를 피우기 위해 휴게실로 갔다. 이미 휴게실은 담배 피우러 나온 직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장성우는 자판기에서 뺀 커피를 들고 휴게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봤다. 아침에 멀쩡했던 날씨가 그의 울적한 기분을 알기라도 하는 듯 비나 눈이 올 것처럼 잔뜩 흐려 있었다. 눈보다는 비라도 한바탕 쏟아지면 어젯밤 포장마차에서 술안주로 먹은 닭똥집이 걸린 것처럼 답답한 가슴속이 한결 가벼워질 것 같았다.

  커피를 다 마신 장성우는 종이컵을 신경질적으로 구겨 휙, 쓰레기통 속에 던졌으나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퉁겨 나왔다. 그는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밖에 떨어진 종이컵을 주워 다시 쓰레기통 속에다 집어넣고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려다 필터를 거꾸로 문 것을 확인한 그는 담배를 다시 고쳐 물고 불을 붙인 후 연기를 가슴속 깊이 들이마셨다 내뿜었다. 그는 애써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장성우가 사무실로 들어오자 할 일이 없는 듯 옆자리의 최정호는 책상에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박고 오백 원짜리 동전으로 즉석복권을 긁고 있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요행을 바란다기보다는 신림전철역 내에서 복권을 판매하는 여자에게 홀딱 반해 매일 즉석복권을 사서 긁는 그였다.

  최정호는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갇혀 복권을 판매하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새장에 갇힌 한 마리의 새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고 했다.

  장성우와 나이가 같은 최정호는 고등학생 때 교회에서 만난 여자와 8년 가까이 열애하다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해서 두 살배기 아들을 하나 두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보처럼 그 여자에게 한 번도 말을 건네지 못한 채 복권만 구입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아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지만 장성우의 상식으로는 최정호의 그런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얼빠진 짓이었다. 그런 그에게 도덕과 양심을 들먹거리며 충고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장성우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젯밤에 꿈을 잘 꾸더니 만 원짜리가 되었네.”

  최정호가 다 긁은 즉석복권 중 꽝이 된 것들을 손으로 구겨 쓰레기통 속에 버리고 나서 기분 좋다는 표정으로 장성우를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좋겠다. 넌, 매일같이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말야.”

  “사랑은 아무나 하나…….”

  비아냥거림이 담긴 장성우의 말투에 최정호가 태진아의 노래를 부르며 되받아 쳤다. 물론 스물여덟 살이 되도록 애인 하나 못 구하고 있는 그의 신경을 자극시키기 위한 노래였지만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정호뿐만 아니라 사내의 모든 사람들이 장성우와 강민지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 아마, 최정호가 그와 그녀의 관계를 안다면 지금처럼 비아냥거리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장성우가 강민지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가 그녀를 만난다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최정호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은 그와 그녀를 결혼할 사이라고 기정 사실화할 것이 뻔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 버러지 같은 놈아. 네 팔뚝 굵다.”

  장성우가 만 원짜리와 오백 원짜리에 당첨된 서너 장의 즉석복권을 손에 들고 흔들면서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를 흥얼거리며 사무실을 나가는 최정호의 뒤꽁무니에다 대고 욕설을 내뱉었다. 비록 친구이기보다는 입사 동기였지만, 가족보다도 친구보다도 더 얼굴을 대하는 시간이 많은 두 사람은 서로 내뱉는 욕설까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였다.


  뒷걸음치다 똥 밟은 기분으로 오후 내내 사무실에 앉아 있던 장성우는 퇴근하고 나서 술이 마시고 싶어 최정호에게 말을 건넸다.

  “이따 퇴근하고 술이나 한 잔하자.”

  “미안해. 오늘 결혼기념일이라 일찍 들어가 봐야 돼.”

  빌어먹을 놈, 하필이면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야. 장성우는 속으로 투덜대며 다른 몇몇 동료들에게 의견을 제시했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모두 한결같이 이미 선약들이 되어 있었다.

 졸지에 왕따가 된 기분을 느낀 장성우는 마땅히 불러낼 사람도 없고, 혼자 술을 마시기는 그렇고 해서 할 수 없이 강민지와 삼성동 일식집 동해에서 술을 마셨다. 기분 같아서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식집에서 나온 장성우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것 같은 데도 아직 8시 전이었다. 곧장 여관으로 가기에는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마땅히 갈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식집에 좀더 앉아 있다 나올 것을, 그는 시간도 계산하지 않은 채 나온 것을 후회했다.

  “우리 어디 가서 커피 한 잔할까?”

  장성우가 우연히 고개를 돌렸다가 저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커피숍이 눈에 들어오자 강민지에게 물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두 손으로 끼고 바짝 몸에 붙어 있었다.

  “그러지 뭐.”

  장성우는 강민지가 흔쾌히 대답하자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의 분위기가 약간 어두운 커피숍 안은 테이블이 절반도 차지 않아 한산했으며, 사이먼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아까 이경아의 레코드 가게 앞에 있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던 노래였다.

  빈 테이블을 찾아 앉으려고 커피숍 안을 둘러보던 장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멈출 것 같아 급히 숨을 들이켰다. 하필이면 이곳에서 오전에 보았던 중년 남자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경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발걸음을 떼어놓지 못했다.

  “왜 그래?”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엉거주춤 서 있는 장성우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강민지가 물었다. 그가 몸으로 시야를 가로막고 있어 그녀는 이경아를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냐.”

  장성우는 강민지를 의식하면서도 시선이 자꾸만 이경아에게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열일곱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다정다감하게 앉아 있었다.

  장성우가 빈자리를 찾아 앉자 앞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남자 종업원이 다가와서 메뉴판을 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메뉴판을 거들떠보지 않고 커피를 주문하면서도 강민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두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강민지가 계속 자기 얼굴에 머물고 있는 장성우의 시선을 의식하고 무안해진 얼굴로 물었다.

  “민지 씨가 너무 예뻐서.”

  장성우는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평소에 하지 않던 농담까지 해야 했다.

  “언제는 내가 안 예뻤니?”

  종업원이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때 장성우는 강민지의 말을 귀에 흘려들면서 이경아와 남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두 사람의 모습을, 두 사람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나가고 커피숍 문이 닫히는 반동으로 몇 번 앞뒤로 흔들거렸다. 어쩌면 두 사람은 커피숍을 빠져나가는 대로 곧장 호텔로 갈지 모를 일이었다.

  장성우는 두 사람이 뜨겁게 껴안고 뒹구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담배로 손을 뻗었으나 빈 갑이었다. 그는 애꿎은 빈 담뱃갑을 손아귀에 넣고 신경질적으로 우그러뜨렸다. 그러면서 그는 그 남자를 빈 담뱃갑처럼 손아귀에 넣고 우그러뜨리고 싶다는 충동에 주먹 쥔 손에 잔뜩 힘이 가해졌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이경아에게 향하는 마음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저 아름다운 암컷을 보면 차지하고 싶은 수컷의 동물적인 본능일 것이라고, 아니면 오기 또는 집착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장성우는 그렇게 자책을 하면서 그녀의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두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틀어막고 두 눈을 꼭 감고 있어도 이경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녀의 모습이 보였으며 그녀의 향기가 스며들었다. 장성우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 가버린 그녀는 그를 쇠사슬로 묶어 놓은 듯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었다.


  커피숍에서 나온 장성우는 강민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서서 빈 택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구의동에 있는 여관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작년 송년회 때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그녀와 처음으로 섹스를 했던 여관이었다. 그 이후부터 두 사람은 종업원이 알아볼 정도로 가끔 그 여관을 이용하고 있었다.

  기다리던 빈 택시가 와서 멈추자 두 사람은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기사가 룸미러로 장성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구의동 사거리요.”

  장성우는 목적지를 말하고 나서 강민지의 허리 뒤로 팔을 뻗어 코트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그녀의 젖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에 그녀는 민망해 하기보다는 즐기고 있는 듯이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택시가 잠실대교를 건너갈 때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성이 나있는 그의 성기를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자신들의 행동을 나이가 오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택시기사가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장성우는 룸미러에 비친 택시기사의 표정을 보고 알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짓을 멈추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요금을 지불하고 내리는 두 사람의 뒤통수를 향해 택시기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작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제 어미 아비도 모르는 화냥년 놈이라고.

  장성우가 앞장서서 먼저 여관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종업원이 반갑게 맞이하고 침대가 있는 방으로 안내하면서 강민지가 눈치 채지 않게 성냥갑만한 크기로 흰 종이에 싼 물건을 손에 쥐어졌다. 그 안엔 세 개의 콘돔이 들어있었다. 그는 단골손님이라고 크게 인심 쓰는 종업원에게 살짝 미소로 답례를 했다.

  강민지와 섹스를 할 때 콘돔은 필수였다. 만일의 하나 그녀가 임신할 경우 거기에 대한 대책이 없는 장성우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절대 맛보고 싶지 않았다. 취기에 욕정을 억제하지 못해 사랑하지 않는 못생긴 여자를 임신시키는 한 번의 실수로 인하여 해선 안될 결혼을 해서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친구를 보고, 그는 절대로 자신은 그런 실수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을 해둔 터였다.

  그러나 그렇게 다짐 또 다짐을 했어도 장성우 또한 지금까지 딱 한 번의 실수는 있었다. 한 달 전 술에 너무 취해 그는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서 앞에 둔 굶주린 짐승처럼 허겁지겁 강민지의 배 위로 올라가 헐떡거렸던 것이다. 다행히 걱정하던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간이 콩알만해질 만큼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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