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외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학과장이 전화를 했다. 때마침 교환학생 신청한 학생이 휴학하는 바람에 자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다홍은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서 서둘러 학교로 갔다. 8월 23일 출국이다. 일년의 기간이지만 다홍에게는 너무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모든 출국 준비를 끝내놓고, 목동 과외가 끝나는 날 대구로 내려갔다.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더니 아버지는 봉투를 하나 내미셨다.
“이거 가져가서 꼭 필요할 때 써라. 얼마 안되니까 아플때 병원비밖에 안될거야. 혹시라도 아프면 참지 말고 바로 병원으로 가.”
다홍은 아버지의 성의임을 알기에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멀리 가는 딸을 위해 오랜만에 장을 봐서는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리셨다. 다홍은 목이 메어 넘기질 못했지만 어머니가 보고 있어서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어머니는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시며 밥 잘 챙겨먹으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하셨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민경에게 전화했다.
“나 내일 교환학생으로 영국 가.”
민경은 한동안 말이 없다.
“너 지금 어디야? 집이야? 내가 갈게 기다려.”
“지금 서울 가는 길이야. 아직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아.”
“그럼 내가 시간 맞춰 집으로 갈게. 다른 데로 가지 말고 곧장 집으로 와.”
다홍이 지하철을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데 대문 앞에 민경이 서서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홍을 보자마자 민경은 달려왔다.
“니가 피신처로 택한 것이 교환학생이야? 왜 갑자기 그러는건데?”
“나 그동안 너무 오버했나봐. 애인 있는 사람을 좋아하질 않나..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하질 않나.”
“누구? 은수 선배가 애인이 있었어?”
“지리산 갔을 때 너에게 말 안한게 많지. 일단 들어가자.”
다홍은 마음의 정리가 이미 끝난 듯 태연하게 커피까지 타왔다.
“지리산 갔던 거 좀 상세하게 말해봐. 무슨 일이야?”
“그날 뉴스 보고 무작정 월야 보건소로 갔어. 그 전날 은수선배가 지리산 가면서 나 대구까지 태워줬거든. 그때 월야 보건소에 친구가 있다고 했던게 기억나더라구. 보건소에 전화해봐도 연락이 안되고 핸드폰은 계속 안받고 초조해서 미칠 것 같더라. 어렵게 찾아갔는데 은수 선배 차가 보건소 사택 마당에 있는거야. 반가운 마음에 차 주변을 서성이는데 웬 여자가 차문을 열고 나오더라.”
“그 여자가 애인이란 말이야? 넌 어떻게 그걸 알았어?”
“그 여자 입으로 그랬어. 그날 은수선배는 차에다 핸드폰을 두고 비오니까 등산은 못가고 친구랑 가까운 동네에 약재 구하러 갔었나봐. 은수선배가 핸드폰으로 문자를 확인해가는 거야. 분명 내가 보낸 문자도 있는데 그 여자도 봤을 것 같은거야. 그 기분 뭐라고 표현을 못하겠어. 더럽고, 비참하고.. 다리에 힘이 다 풀리더라. 그 여자 나랑은 비교도 안될 만큼 세련되고 예쁘더라. ”
“그래서 바로 다시 대구로 간거야?”
“난 사실 은수선배가 터미널로 나 찾으러 온거 봤어. 너희랑 통화하고 난 뒤였겠지. 그런데 눈이 마주칠까봐 겁이 나서 의자 깊숙이 숨어버렸어. 나를 너무 바보로 볼 것 같아서. 자존심도 없이 남자 찾으러 그 먼 데까지 간 여자밖에 더 되겠냐?”
“그래도 은수선배는 니가 은수선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너무 기뻤다는데..”
“그런 점이 더 기분 나빠. 은수선배는 애인이 있으면서도 나를 놀린거잖아. 누구든지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면 기분 나쁠 사람은 없지. 기뻤을 수도 있겠네. 하지만 내 기분은 너무 더러워.”
“은수 선배 그렇게 안봤는데 웃긴다. 애인이 있으면서도 너한테 집적대고. ”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서겠지. 은수 선배 모두에게 친절하잖아. 내가 착각했던 것이겠지.”
“넌 아직도 선배를 두둔하고 싶어?”
“두둔하는게 아니라 나의 첫사랑이 괜찮은 사람이길 바라는거야. 나중에라도 나의 사랑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민경은 다홍네 집에서 한 이불 속에 들어가 함께 잤다. 민경은 기어코 다홍과 공항까지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공항리무진을 타고 함께 갔다. 짐을 보내고 시간이 남아서 다홍과 민경은 공항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교환학생으로 가는 다른 두 명의 학생들과 함께 들어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민경은 다홍을 꼭 끌어안았다.
“니가 다시 한국에 올 때는 어깨에 놓인 짐 다 벗어버리고 와. 알았지?”
“그래. 니가 싫어하는 무표정, 무뚝뚝도 다 버리고 올게. 보고싶을거야.”
다홍은 눈물을 참고 있는 민경을 뒤로 하고 들어갔다. 다홍의 모습이 사라지자 민경도 공항을 나와 준용이 있는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슬픔을 위로 받고 싶었던 것이다.
준용은 도서관 휴게실에서 은수와 1학년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음료수를 뽑아주고 있었다.
“준용선배, 은수선배 얘기 좀 해요.”
은수와 준용은 민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음료수 캔을 든 채로 민경의 뒤를 따라갔다.
“다홍이 오늘 교환학생으로 영국갔어요. 일년 걸릴 거래요.”
“그걸 이제 얘기해주면 어떻게 해?”
준용과 은수는 남들이 듣든 말든 소리쳤다.
“나도 어제 알았다구요. 계속 다홍이와 있느라 연락을 못했어요. 다홍이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서. 출국 게이트로 들어가는 다홍이 보고 마음이 찢어지는 줄 알았어요.”
“대체 왜 그런거래? 말 좀 해봐.”
은수는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은수선배는 말 할 자격 없어요. 선배도 솔직히 다홍이 좋아한거 아니었어요?”
“솔직히가 아니라 난 원래 다홍이를 좋아했었어.”
“그러면서 애인이 있는 건 또 뭐예요? 그것 때문에 다홍이가 갑자기 교환학생 가는건데.”
“애인? 내가?”
은수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홍이 지리산 갔을때 보건소 사택에서 다 봤어요. 어떤 여자가 선배한테 애인이라고 했다던데. 그래서 연락이 두절된거잖아요.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은수는 민경이 쏘아붙이는 말에 억울하고 화가 나서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벽에다 던져 버렸다.
“그거였어? 그걸 보고 혼자 오해해서 아무 말도 안하고 사라진거야? 민영이 나와 대학 동창이야. 아무 사이도 아니란 말이야. 우리끼리는 학교 다닐때 여보, 자기, 애인 이런말 농담으로 다 하고 살았다구.”
“그럼 애인 아니예요?”
“당연히 아니지. 이다홍, 이런 바보를 봤나. 돌아오면 가만 안두겠어.”
“선배, 그래도 다홍이가 선배 정말로 좋아한거 알죠? 선배는 다홍이 첫사랑이예요.”
첫사랑... 은수는 흥분이 가라앉고 마음이 떨려왔다. 그래서 더더욱 다홍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했나 보다. 그래서 더더욱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척 했나보다. 스터디하는 내내 은수를 보면 마음이 아팠을텐데 태연한 척 했나보다. 지극히 여린 스물 둘 아가씨가 사랑에 당혹스러워서 혼자서 결론짓고 도피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