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스럽게 차근차근 음식을 하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보다 컸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미경은 죄스러운 마음뿐었다.
헉헉거리면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혹시 혜숙인가해서 이름까지 불러보았다.
김미경: 혜숙이니?
이혜숙: 엉...
의아했다. 다른 날도 아니고 혜숙이 오늘 같은 날 집에 있는게 이상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혜숙은 알건데 여기에 있는게 이상했다. 온 집안에서 음식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을 하고 있는 승민이도 있어다.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미경은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혜숙: 난 아니야... 난 여기에 올 생각이 없었는데.. 이 사람이 들어가는 걸보고 혹시나 니가 불렀는지 의심스러워서.. 내가 가라고 했는데...
횡설수설하는 혜숙을 뒤로하고 미경은 계속 승민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냉정한 얼굴로 여기저기 놓여져 있는 음식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최승민: 내가 뭘 잘 못했니? 도와주고 싶었어.
다른 날 같으면 그저 고맙다라고 인사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미경의 얼굴은 차가운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김미경: 누가 도와달라고 했니?
최승민; 그건 아니지만 회사 맞치고 오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그랬어.
김미경: 이런 일 별로 반갑지 않다. 나가줘.
이혜숙: 승민씨는 몰랐잖아.
김미경: 오늘 너 괜한 짓을 했다. 주제 넘은 짓 했어. 부탁하지 않는 일은하지 말아줘.
이혜숙: 나가는게 좋겠어요.
최승민; 널 모르겠다.
김미경: 너무 깊게 알려고하지마. 모르는게 약이 될수도 있어.
너무나 차가운 그녀의 말에 승민은 할 말을 잃었다.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놓고 혜숙이라는 친구와 나왔다.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미경의 모습에 당혹스러웠다. 부모님 제사라는 걸 알았다. 하루종일 장보고 음식하고.. 미경이 오면 기뻐할 모습을 기대했다. 행복해하는 미경의 모습을 사실 기대했다. 차갑게 굳은 미경의 모습이 아니라 좋아서 날 바라보는 미경의 모습을 기대했다. 도저히 모르겠다. 내가 뭘 크게 실수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인데 그걸 정말 모르겠다. 답답하기만 했다. 정말 미로를 걷는 기분이다.
이혜숙: 거봐요. 내가 나가라도 했죠. 미경이 안 좋아할거라고..분명히 내가 말했죠. 혼자 있고, 싶어할 거라고..미경이 저렇게 화내는 모습 정말 오랜만에 봐요.
최승민; 이해가 안돼요. 혼자 있으면 더 슬프고, 아플텐데.. 그걸 전 같이 나누고 싶었어요.
이혜숙: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된거에요. 그래도 미경이 많이 좋아졌어요. 처음 전학왔을때는 사람도 아니었어요. 늘 사고만 치고.. 늘 위험한 일만 했어요. 죽을 사람처럼.. 싸움만했어요.
최승민: 미경이가요. 상상이 안가네요.
이혜숙: 그랬어요. 친구들하고 어울리지도 않고.. 학교에서 말썽만 부리고.. 공부는 썩 잘하는거 같은데 하지 않았어요. 늘 바닥이었죠. 얼굴도 예쁘고, 똑똑한것 같기도 한데...한마디로 이상한 애였어요. 어느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선생님과도 말하지 않았어요. 몇달을 그렇게 지내다보니 내가 궁금하더라구요. 저애는 어떤 애인지 내가 궁금해서 쫓아다녔어요. 아직까지 부모님이 왜 돌아가셨는지 저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더라구요.
최승민: 차 사고였어요. 그것 때문에 아직 미경이 아파하는 줄 몰랐어요. 난 그저...
이혜숙: 미경과 같이 아프고, 마음도 나누고 싶었다구요. 미경을 사랑하세요?
최승민; 10년부터 사랑했어요.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아마 사랑하고 있을 것 같아요.
이혜숙: 그럼 미경이한테 시간을 조금 더 줘요. 내가 알지 못한 미경의 10년전의 시간이 있듯이 그쪽이 알지 못한 미경의 10년의 시간이 있잖아요. 그냥 미경을 기다려줘요.
승민은 옥탑방 미경의 집을 바라보았다. 기다리는건 자신있는데 기다려도 오지 않을까봐 그게 무서웠다. 그게 겁이 났다. 오지 않을 사랑을 기다리는게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기에 승민은 무거운 마음으로 하늘을 보았다.
미경의 손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시계 바늘이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미경의 마음도 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향했다.
승민이 만든 음식을 보면서 그 음식을 정성스럽게 담아서 제사상에 올릴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차갑게 대한 자신이 미웠다. 뒤 늦게 후회하는 바보같은 나한테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지말걸... 날위해 만든건데.. 알면서도 오늘만큼은 참아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을만큼 혼자이고 싶었다. 늘 그랬듯이...나한테 벌을주고 싶었다. 이렇게 만든 나한테.. 부모님을 돌아가시게한 나한테.. 마음이 무너질만큼 너무 아파서 다른 사람이 그 마음을 알까봐 무서웠다. 아니 나의 진짜 모습을 알면 나를 벌레보듯할까봐 그게 겁이 났다. 그럼 또다시 혼자가 될까봐 그게 겁이나고 무서웠다. 이런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몇번이도 몇번이도 지우고 싶지만 그것 또한 잘 되지 않았다.
김미경: 엄마, 아빠 오늘 친구가 왔어요. 이 음식들 그 친구가 다 만들었어요. 제가 해야했는데... 죄송해요.
미경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초에 불까지 붙이고는 부모님앞에 절을 올린다. 한번.. 두번... 미경은 부모님의 사진을 보면 일년동안 참았던 눈물을 보인다.
김미경: 엄마 승민이 아시죠. 그 친구가 이 음식 다 만들었어요. 승민이 정말 많이 변했어요. 남자답다고 해야하나..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애써 미소도 지어보인다. 미경은 그렇게 혼자서 마음의 상처와 싸우고 있었다. 그 미안함을 미경은 말로 표현도 하지 못한채 가슴으로 울었다. 늘 혼자서...
김미경; 너무 죄송해서.. 사랑해서.. 미안해서... 어쩌죠.
10년전 오늘 미경은 출장에서 돌아오는 아빠에게 휴대폰으로 전화해서 갖고 싶은 목걸이를 생일 선물로 사달라고 했다.
학교에서 미경은 바로 회사로 들어가봐야한다는 아빠의 말에도 끝까지 고집을 피웠다.
김미경: 아빠, 안돼요. 그 목걸이 꼭 갖고 싶어요. 내일 아침 눈뜨면서 그 목걸이가 내 방에 있는 걸 보고 싶어요. 신상품이라서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지금 사야해요.
아빠: 그럼 엄마 혼자 가면 안되겠니? 아빠는 지금 회사로 바로 들어가야할 상황이구나.
김미경: 아빠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 목걸이 엄마는 안된다고하세요. 너무 비싸다고.. 고등학생이하기에는 너무 고가라고 엄마는 안된다고하세요. 그러니까 아빠가 엄마데리고 그 목걸이 사주세요.진짜 그 목걸이 갖고 싶어요. 내일 제 생일이잖아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아빠 능력으로 그 정도는 살 수 있잖아요. 아빠... 아빠... 안 사주면 저 아빠랑 말 안할거에요.
할 수 없이 아빠는 '알았다'라고 말하고 바로 백화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백화점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계신 엄마는 미경의 목걸이를 사고 아빠와 같이 집으로 오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게 이별이 되고 말았다. 미경은 그 충격으로 한동안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집에서 쫓겨나도 저항 한번하지 못했다. 부모님을 죽인 그 죄책감에서 아직도 미경은 헤어나지 못했다.
미경은 목에 걸린 목걸이를 한번 손으로 만지작 걸었다.
김미경: 죄송해요. 못난 딸이라서... 두 분한테 기쁨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미안해요.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미경은 비몽사몽으로 회사로 출근했다. 밤새 잠을 못자서 두 분과 얼굴이 보름달처럼 변해 있었다.
최지영: 어제 야동이라도 봤니? 얼굴이 이따만하다.
김미경: 밤새 사장님하고 전화통화 한다고 말이야. 어찌나 말을 많이 하던지... 내 목소리가 섹시하다나 뭐라나..참 내 목소리가 한 섹시하지.
최지영: 정말이야. 정말 재준오빠랑 통화해서 이따만 얼굴이된거야.
김미경: 마음대로 생각해.
최지영:김미경.. 너 .. 너...
김미경: 그렇게 독기 품을거 없어. 너 진짜 좋아하는구나. 붉은 고구마도 아니고... 머리에서 김나오겠다.
지영과 별로 친하지는 않지만 가끔 이렇게 놀러먹어도 재미있다. 순진하다고 해야하나.. 귀여운 악녀라고 해야하나.. 아님 푼수. 사람 마음 갖고 장난치면 안되지만 지영에게 그 재수없는 인간은 쥐약이나 다름없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
서재준: 거짓말도 잘하네. 언제 우리가 밤새 통화한 사이이 된거지. 난 기억 없는데... 야동 본 얼굴로 그러고 싶어.
황당... 무안 .. 민망... 다들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지영은 아예 물만난 물고기처럼 비양거렸다.
최지영: 내가 그럴줄 알았다. 재준오빠랑 통화 좋아하네. 내가 오빠 취향을 좀 아는데 절대 너같은 촌스러운 여자는 아니야. 어딜 넘보니 웃기시네. 정신차려. 너 같이 없이 산 여자들의 심리를 아는데 남자 잘 만나서 신분상승할 꿈꾸지 마시고, 열심히 살아.
지영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아무튼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인간이다. 타이밍이 어찌나 절묘한지.. 나쁜 놈.
아침부터 그 인간 얼굴 볼 생각하니 속이 다 뒤집힌다. 어제 내가 왜 잠을 못잤는지 뻔히 알면서 그것도 지영이 앞에서 사람 무안하게 만들고, 그냥 못 들은척 넘어가주면 엉덩이에 뿔이라도 나는지. 바퀴벌레 같은 놈.
서재준: 내앞에서 앞으로 그런 얼굴하지마.
김미경: 제 얼굴이 어때서요.
서재준: 벌레 씹은 표정이잖아. 억지로라도 웃어.
김미경: 웃게 해줘야 웃죠. 어떻게 사람이 억지로 웃어요. 그럼 사장님은 왜 안웃어요. 인생이 재미없어요. 늘 그렇게 무표정하게 사람대하고, 차갑게 대하고, 그런 사람앞에 어떻게 웃을 수 있어요.
서재준; 내 컨셉이야. 멋있지 않아. 다른 여자들은 뻑가던데.
김미경: 퍽이나.. 거울보세요. 그러고보니 이 사무실에는 거울이없네요. 제가 선물로 드려요. 화장실은 그렇게 돈으로 도배해놓고, 어떻게 사무실에는 거울도 없을 수 있어요.
서재준: 안봐도 멋있어. 나 멋있는 놈이야.
바퀴벌레한테서 이런 말이 나올줄 몰랐다. 심각한 왕자병 수준이다. 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잠시 고민중이다.
서재준: 왜 나한테 반하고 있어.
김미경: 퍽이나...
서재준; 곧 그렇게 될거야. 오늘 밥이나 같이 먹지.
김미경: 왜요.
서재준: 그냥....혼자 먹기 싫어서.
김미경; 가족 없으세요.
서재준: 나에 대해 궁금하기는 해.
김미경: 아니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미경은 그쯤에서 말을 돌렸다. 점심 시간까지 미경은 서류 정리에 집중했다. 생일인데 미역국도 먹지 못했다. 10년동안... 그저 혜숙이와 밥 같이 먹는게 다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생일이다. 반갑지 않은 생일이다. 오늘은 한 사람 더 늘었다. 혜숙이에서 승민이까지 세명이서 그렇게 밥이나 먹으면될 것 같았다.
김미경: 승민아. 오늘 시간있어.
점심시간에 비상문 옆 계단에 서서 전화를 했다.
최승민: 왜.
김미경: 밥이나 같이 먹자구.
최승민: 니가 사는거야.
김미경: 응 사과의 의미로.. 받아줄거지.
최승민: 알았어. 저녁에 회사앞으로 갈게.
김미경: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마음이 조금 놓였다. 더 이상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 승민에게 상처줄 어떤 행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서...고마운 친구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