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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

사림파 |2007.06.08 01:04
조회 181 |추천 0
 

-사림파의 형성과 그 성격.



우리나라의 경우 사림이라는 용어는 여말선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무오,갑자사화를 겪은 후인 중종 때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원래 초기의 삶은 여말선초의 왕조 교체와 그에 따른 변동 속에서 향촌에 은거하여 성리학의 탐구에 몰두하던 성리학자들을 주축으로 하되 , 좀 더 폭 넓게는 약간의 성리하적 소양의 바탕 위에 사장학에 더 깊은 관심을 유사까지를 포괄하는 의미를 가졌다.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대였다. 성종대는 단종대 이래 계속된 정변 하에서 탄생한 각종 공신들이 정치를 주도하였고, 그들이 점차 여러 특권을 향유하면서 권위화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왕권은 약화되고 권력 구조의 구조적 모순이 초래되었다. 성종은 이러한 훈구세력의 일방적인 비대를 막고 권력 구조의 균형을 꾀하기 위해 그 대응 세력으로서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그에 따라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해 온 지방의 사림이 중앙 정계에 등장할 수 있었다. 성종대에 진출한 사림은 영남 출신 사람들이 였다. 김종직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이 중앙 정계에 등장 함에 따라 이들은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주로 삼사와 같은 언관직에 재직하면서 훈구파의 부정, 비리를 공격함에 따라 두 세력의 갈등이 야기되었으며, 이와 같은 사림에게 보복을 가하기 위해 훈구파는 사화를 낳았다. 그것은 무오사화로서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보호막을 상실한 사림파들은 후구파의 반격을 받게 된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는데 , 이것이 성종실록의 편찬을 위한 사국이 열렸을 때 발견되자 훈구파들은 이 조의제문이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글이라고 하여 김일손이 죽게 되고 다수의 사림파들이 귀양감으로서 사람의 세력을 줄어들었다. 그 뒤 연산군을 중심으로 하는 궁중세력과 훈구 대신의 부준 세력간의 갈등이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폐비,사사 사건을 이유로 폭발하여 연산군이 훈구파 및 잔존 사림파를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를 갑자사화라 하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사림은 상당히 도태 된다. 그러나 김굉필 , 정여창은 적거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교육활동을 계속하여 사림파는 다행이 지속 성장할 수 이었다. 이후 연산군의 폭정은 중종 반정으로 종식되고 , 반정을 통해 집권한 공신 집단은 고위직을 장악하여 정국을 그들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이러한 훈구파의 권력을 견제하고 국와 중심 정치 운영을 바랬던 중종은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들을 중용함으로서 사림파는 다시 중앙정계에 재진출하여 급성장하였다. 이러한 사림파는 훈구파 집권 하의 정지척, 사회적 비정을 시정하고 유교적인 도덕 정치를 수립하기 위하여 여악, 내수사장리, 소격서와 같은 전통적 인습과 구제를 혁파하였고, 향교 교육, 향약 보급을 통하여 성리하적 통치 질서를 확립하려 하였으며 , 자파 세력의 확보를 위하여 현량과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통하여 나타난 사림파의 성장은 훈구파의 미움을 받게 되었으며, 그것이 훈구파의 약화를 목적으로 제기된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여 사림파 또 다시 훈구파의 공격을 받아 중앙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이것을 기묘사화라 한다. 기묘사화이후 사림파는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후진 양성에 힘쓰게 되었다. 중종 말년에 김안국, 이언적 같은 소수의 사림파들이 중앙정계에 다시 등장함에 따라 그들에 의해 향약의 실시, 현량과 복설, 조광조의 신원 문제 등이 제기될 정도로 사림파의 성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을사사화 이후 정치세력에 도태되어 사림파는 자신들의 세력 확대를 위하여 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서원의 건립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 수준의 향상과 맞물려 있었다. 척신 정치아래에서 정치적 활동을 통한 성장을 기대할 수 없었다고 판단한 사림파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킴으로서 세력 확대를 꾀하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이황과 이이에 의해 어느 정도 결실을 맺게 되었으며, 이것이 사림의 학파 성립으로 까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척신 정치가 장기화되자 척신정치 아래에서 ㅈㅏ신들의 아상인 도학 정치를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황은 명종의 잦은 징송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기피하였으며 , 결국 척신 정치아래에서 공론을 유지하려는 사림파의 활동은 척신 세력 조차도 이들의 공론을 의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척신 몰락이후 사림이 집권세력으로서의 가능성을 높였다. 사림파의 정치적 영향력은 척신의 몰락 이후 을사 피하인에 대한 신원이 이루어 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파는 새 정치질서를 수립하고 과거정치를 청산하기 위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과거 정치 청산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명종대 이전부터 정계에 등장하여 선조대에는 이미 고위직에 진출한 구신과 명종 후반 이후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류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과거 정치의 청산과 새 정치 질서의 수립이라는 구체적인 면에서 구신과 신진사류의 분화는 결국 이후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으로 출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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