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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수염] 사랑 밀어내기 (10)

말글눈 |2003.05.28 22:26
조회 503 |추천 0

10. 도둑고양이

 


문영은 자기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정한 예술가, 훌륭한 예술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겸손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미대를 나오고 미술대전에 입선도 했지만, 그 정도는 아무나 하는 일이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반 고호처럼 자신의 귀를 자르지는 못할망정 어느 정도의 광기와 집념이 있어야 한다. 자신한테는 그것이 없다. 호구지책에 급급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10년 세월을 허비하는 건 예술가가 할 짓이 아니다. 또 눈먼 돈이 생겼다고 해서 당장 산속에 들어가 농사나 지으며 살겠다고 하는 것도 예술가가 할 짓이 아니다. 사람이 싫어서, 세상이 싫어서 도피한다는 것은 정면대결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에게는 남다른 용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자신은 예술가가 아니다. 그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속물일 뿐이다.
신애의 누드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문영은 이 속물 근성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모델이 모델로 보이지 않고 여자의 나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나체 모델을 앞에 놓고 실습을 할 때의 충격이 그랬다. 난생 처음 여자의 나체를 보는 문영한테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이 모델로 보이지 않고 여자로만 보였다. 그러나 신애의 나체가 주는 충격은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몰래 만져 보았던 아이, 간절하게 그리워했던 아이가 옷을 벗고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신애의 말대로 아직 발육이 덜 된 빈약한 나체에서는 엽기적인 아름다움, 엽기적인 성적 유혹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문영은 두 번째 날에도 자위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첫 번째와 다른 점은 상대방의 충분한 양해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신애가 돌아간 다음 문영은 바지 벨트를 뽑아 두 가닥으로 접은 다음 자신의 등을 피가 나도록 후려쳤다. 그렇게 등을 학대하고 난 후에야 겨우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꿈틀거리는 욕망이 완전히 숨을 죽인 것은 아니었다. 잘못했다가는 신애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잠시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신애가 돌아가고 밤이 되면 문영은 조금씩 윤곽을 잡아 가고 있는 신애의 누드를 보며 술을 마셨다.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신애가 오지 않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술이 취해 잠을 청하다가 벌떡 일어나 밤거리를 헤매기도 했다. 완전히 상사병에 걸린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젊은 시절에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없어 뒤늦게 홍역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밤거리를 헤매다가 하루는 신애네 집 앞까지 가 보았다. 그리고는 골목길에 서서 하염없이 2층을 올려다보았다. 신애의 방이 2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텁게 커튼이 가리고 있는 불꺼진 창문으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그때부터 창문을 훔쳐보는 일은 새로운 버릇이 되었다. 그리고 신애의 방이 어딘지 확인도 할 수 있었다. 커튼을 통해서 그림자만 본 것이지만, 문영은 그 윤곽만으로도 신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언젠가는 커튼이 열리고 생생하게 신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신애의 누드는 조금씩 조금씩 아주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룻밤 새에도 완성시킬 수 있겠지만 되도록 오래 오래 신애를 잡아 두고 싶어서 시간을 끄는 것이다. 그렇게 늑장을 부리는 동안 여름이 다 가고 9월이 되었다. 이제 작품을 제출해야 하는 날짜가 2주밖에 남지 않았다. 누드는 거의 다 완성되어 사실상 사인만 그려 넣으면 끝나게 돼 있었다. 그러나 마감 직전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지웠다 다시 그리고 하면서 잔손질을 하는 척하고 있었다. 누드가 끝나고 나면 또 무슨 핑계로 이 아이를 붙들어 놓을 것인가. 대상은 못 받는다 해도 특선은 꼭 해야겠다는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문제고, 문영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신애를 계속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때 복덕방에서 연락이 왔다. 충청북도 옥천에 좋은 집터가 나왔으니 한번 가 보라는 것이다. 문영은 당장 체로키를 몰고 옥천으로 떠났다. 그리고 옥천에서 그곳 복덕방 영감을 태웠다. 그곳은 옥천 읍내에서도 한 시간이나 들어간 깊은 산골이었다. 아직 포장도 되지 않아 먼지가 풀풀 나는 도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자 20여 가구쯤 돼 보이는 마을이 나왔다. 그 집터는 마을에서 또 골짜기를 따라 5분쯤 더 올라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문영은 첫눈에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우선 사람들로부터 뚝 떨어져 있다는 점이 좋았다. 또 옆으로 개울물이 흐르고 숲속에 푹 파묻혀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산속 풍경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그맣고 낡은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영감님이 설명을 했다.
옛날에 암자로 쓰던 곳인데 몇 년 전에 여기를 지키던 보살이 죽고 나서는 오겠다는 시람이 없어 이렇게 내박쳐 둔 거지. 이걸 싹 밀어 버리고 새 집을 한 채 지어 놓으면 근사한 별장이 될 거야.
그 버려진 암자에는 3만 평이나 되는 임야가 딸려 있었다. 임야는 평당 천2백원, 대지와 텃밭이 평당 7천원으로 흥정이 끝났다. 아무리 산골이라지만 5천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3만 평이 넘는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문영이 그만큼 세상 물정을 모르고 살았다는 얘기다. 문영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코스모스 주식을 팔아 치웠다. 주식은 그 동안 꾸준히 올라 1만9천5백원을 받았다. 다시 한번 1억9천5백만원의 대박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같은 과를 나와 지금은 건축설계 사무실을 하고 있는 대학동창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당장 머리를 맞대고 앉아 대강의 설계도를 그렸다. 건평 30평에 화실과 방 두 개, 지하실과 차고까지 딸린 아담한 산장이 한 채 탄생했다. 친구가 물었다.
자네 스틸하우스라고 들어 봤어?
스틸하우스? 강철로 집을 짓는단 말이야?
응. 지진이 잦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개발한 건데 철골 구조물이라 우선 튼튼하고 공사기간이 짧은 게 장점이야. 거기다 단가도 싸고 필요할 때는 마음대로 구조를 변경할 수도 있어.
예컨대 지진에도 끄떡 없고 한 달이면 공사를 끝낼 수 있는 집이라는 것이다. 문영은 친구와 함께 모델 하우스를 보러 갔다. 강철로 만든 집이면 어쩐지 차갑고 우중충하고 딱딱한 느낌을 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강판에다 어떻게 색깔을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은한 베이지색 벽에다 감색 지붕이 그렇게 산뜻할 수가 없었다. 또 콘크리트나 벽돌과는 달리 스틸 하우스의 색깔은 50년이 지나도 퇴색하는 법이 없다고 한다. 거기다 썩거나 불에 탈 염려도 없고 단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한다. 문영은 당장 그날 중으로 친구의 계좌에 5천만원을 입금시켰다. 나머지는 공사가 끝난 다음 정산을 하기로 했다. 일주일도 안 돼서 설계도와 모형이 나오고 공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공사가 끝나기 전에 신애의 누드도 완성되었다.


 --------------------------------------------------------------------- 11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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