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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수염] 사랑 밀어내기 (15)

말글눈 |2003.05.29 12:00
조회 347 |추천 0

15. 초상화


실연을 당했다.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다가 여자한테 배신을 당했다는 그런 차원은 아니지만 어쨌든 실연은 실연이다. 문영은 비로소 자신이 신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안아 보고 싶었는지 알 것 같다. 그것을 잊게 해 주는 것은 술밖에 없다. 문영은 산장에 틀어박혀 끝없이 술을 마시며 신애의 초상화를 그리고 또 그렸다. 미소를 띤 모습도 그리고, 약간 토라진 모습도 그리고, 꿈꾸듯이 먼 데를 보고 있는 모습도 그렸다. 아마 스무 점도 더 그렸을 것이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 문영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지만 그것을 알아줄 사람도 보아 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왈칵 토혈을 하고 말았다. 술을 한 잔 마시자마자 속에서 욱 하고 치밀어 오르더니 한 사발이나 피를 토하고 만 것이다.
영양실조에다 위궤양에다 장출혈에다 폐렴, 담낭염, 신장염까지 겹쳤어요. 어쩌다 자기 몸이 이 지경까지 되도록 내버려 두었어요?
종합검진이 끝난 다음 의사가 하는 소리였다. 문영은 3주 동안을 입원한 다음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퇴원했다. 그러나 산장에 돌아와 맨 먼저 한 일은 술부터 한잔 마시는 것이었다.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벨 소리가 울렸다. 몽석이었다. 몽석은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올라오다가 이렇게 젖어 버리고 말았네요. 실례가 안 된다면 밤시 옷 좀 말리고 갔으면 좋겠는데요.
실례는 무슨 실례. 문영에게는 사람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서둘러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술병을 가져 왔다.
술이 한잔 들어가야 한기가 가실 텐데 어떻습니까?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지요.
그러면서 한잔 시원하게 마시더니 방 안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웬 초상화를 이렇게 많이 그렸습니까?
내가 사랑했던 여잡니다. 어때요? 이쁘지요?
대단한 미인인데요. 그런데 무척 어려 보이는군요. 어릴 적 초상환가요?
아뇨, 지금 대학교 다니고 있으니까 어려 보일 수밖에요.
몽석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멀뚱하게 문영을 바라본다.
하하, 놀라시는군요.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제가 가르치던 제잔데 그만 좋아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일이긴 한데, 나이 차이를 극복하자면 마음 고생이 심하시겠습니다.
그럴 일도 없습니다, 실연을 당했으니까요.
예?
또 놀라시는군요. 실연 모르세요? 나 혼자 짝사랑을 하다 끝내 거절당하고 마는 것 말입니다.
실연이라… 저도 옛날에 그렇게 짝사랑을 하다 가슴에 멍이 든 일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출가를 하기 전에 말입니까?
예, 한 20년 전 일이지요.
어떤 여자였는데요?
저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은 친구 누나였습니다.
저하고는 정반대였군요?
예, 한두 살이라면 또 몰라도 다섯 살이나 연상이라 애당초 가망이 없는 일이었지요.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합니까? 처사님이 딸 같은 제자를 좋아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지요.
몽석은 껄걸 웃더니 문영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이 산속에 들어앉아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닙디다.
그런 면이 있지요. 성욕을 동반하는 행위니까요.
그것도 있고 너무 이기적이에요.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좋아해야 한다, 그런 거 아닙니까? 상대방이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지요. 그러다 보니까 살인도 하게 되고… 그런 걸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어하는 것처럼 상대방을 대접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좋아하기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거죠.
꼭 저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전 이 아이를 몹시 불편하게 했지요. 결국은 다시는 안 만나겠다고 화를 내게 되고 실연을 당하게 된 거죠.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습니까?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절대로 이 아이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옷이 보송보송 마르고 술 한 병이 바닥이 나자 몽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어둡기 전에 올라가 봐야겠네요. 언제 짬이 나거든 토굴에 한번 놀러 오십시오. 작년에 담은 더덕술이 아주 잘 익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토굴을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떠나다니요?
중이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엉덩이에 이끼가 끼는 법이지요. 오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토굴을 물려주고 훨훨 떠날 생각입니다.
어디로 떠나실 건데요?
그거야 가 봐야 알지요.
그 이튿날 문영은 초상화를 다 치우고 한 점만 정성스럽게 포장을 한 다음 신애한테 전화를 걸었다.
니 초상화를 한 점 부쳐 주고 싶어서 전화를 건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주소 좀 불러 줘.
초상화요? 어머, 제가 모델을 선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렸어요?
화진포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그렸어. 거기다 내 기억 속에 있는 니 모습을 더듬어 가면서 말이야.
어머, 감동적이네요. 하여튼 감사해요. 저희 집 주소는요… 서울특별시 성동구…….
그러다가 갑자기 신애의 마음이 바뀐다.
이래서는 안 되겠는데요.
뭐가 안 돼?
선생님이 특별히 초상화를 선물하신다는데 주소만 불러 주는 건 예의가 아니죠.
그렇긴 하지만 니가 날 만나기 싫어하니 다른 방법이 없잖아?
제가 언제 싫어한다고 그랬어요? 미련을 버리시라고 그런 거죠. 이제 마음의 정리가 다 되신 모양이죠?
맞아. 그래서 마지막 작별인사로 초상화를 보내는 거야.
그렇다면 만나야죠.
만나?
그럼요. 초상화를 가만히 앉아서 맨입으로 받는 건 도리가 아니죠. 마음의 정리도 축하할 겸 찐하게 한잔 쏠 테니까 올라오세요. 제가 내려가야 도리지만 하는 일 없이 왜 그렇게 바쁜지 말이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리고 인연이 참 질기기도 하다. 이제 마지막인가 싶으면 무슨 일인가 생겨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벌써 몇 차례인가. 따지고 보면 자신이 그렇게 만든 일이지만, 결국 아직은 신애와의 인연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문영은 당장 초상화를 싸 들고 산을 내려갔다.
신애와 만나기로 한 곳은 신촌에 있는 자그마한 카페였다. 스탠드가 있고 칸막이를 한 룸이 세 개… 그러니까 룸살롱과 카페의 중간 형태인 셈이다. 분위기가 그럴듯했다. 문영이 룸 하나를 차지하고 앉자 흐느끼는 듯한 라틴음악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주인여자에게 신애가 여기 자주 오느냐고 물어보자 단골이라고 한다. 알 만하다. 분위기는 좋지만 술값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신애 같은 부잣집 딸이 아니면 함부로 드나들 곳이 아니다. 어쩌면 신애 애인이라는 그 녀석도 부잣집 아들일 것이다. 신애는 약속시간에 딱 맞추어 나타났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문영이 엉겁결에 벽돌 조각으로 한 대 갈겨 준 바로 그 녀석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전에 말씀드렸던 제 애인이에요. 초상화 얘기를 했더니 선생님을 꼭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동호라고 합니다. 신애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녀석이 깔끔하게 인사를 차린다. 신애가 또 한마디 거든다.
저 혼자 오려고 했는데 막 화를 내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같이 왔어요.
새빨간 거짓말이다. 애인을 보여 줌으로써 확실하게 문영의 미련에 못을 박겠다는 의도가 분명하다. 그래도 좋다. 초상화를 그냥 택배로 부쳐 주려고 했다가 다시 한번 신애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초상화를 받아 든 신애가 정말 감동한 듯 어쩔 줄을 모른다.
제 초상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나 궁금해요. 선생님, 지금 여기서 뜯어 보면 안 될까요?
안 돼, 내가 없는 데 가서 뜯어 보도록 해. 그것이 작품을 그린 사람에 대한 예의야. 무슨 목걸이나 팔찌와 같은 선물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잖아?
아이 참, 보고 싶어 죽겠는데.
세 사람은 기분 좋게 술을 마신다. 신애는 초상화를 선물받았다는 사실에 어지간히 감동을 받은 듯하다. 화실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에서부터 문영에 대한 찬사가 끝이 없다. 동호라는 아이도 멋대가리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대학만 졸업하면 금방 세계적인 영화감독이라도 될 것처럼 영화에 대한 얘기만 조잘거린다. 신애와 단 둘이만 있었더라면 이런 지루한 대화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신애한테는 이미 애인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문영이 그렇게 자위하고 있는데 신애가 느닷없이 분위기를 바꾼다.
안주가 뭐 이래. 나 바삭바삭하게 튀겨낸 치킨 좀 먹고 싶은데 사다 줄 거지? 나가 보면 근처에 치킨집 있을 거야.
그렇게 동호 녀석을 쫓아낸 다음 문영의 옆에 착 붙어 앉더니, 하는 소리가 또 엉뚱하다.
선생님, 그 동안 저 무지하게 안아 보고 싶었죠? 제가 다 알아요. 자, 마지막 선물로 마음껏 한번 안아 보세요.
그러면서 문영의 목을 끌어안더니 뜨겁게 입술을 겹쳐 온다. 혀부터 밀고 들어오는 본격적인 키스다.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문영은 숨이 가빠지면서 한쪽 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애의 허벅지 깊숙한 곳을 더듬어 올라간다.
그만 됐어요.
손이 팬티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자 신애가 문영을 살짝 밀어내더니 제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후끈 달아 올랐던 흥분이 빠져나가면서 아쉬움 때문에 온몸이 조여드는 것 같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공연히 흥분만 시켜 드려서요.
공연히는 아니야. 어떻게든지 날 위로하고 싶은 니 맘을 알겠어. 그럼 된 거 아니냐?
지난 번에 말예요.
응?
제 누드가 끝나고 화실에서 자축 파티를 하던 날 말예요. 그때 선생님이 절 가졌어야 했어요.
이제 와서 왜 그런 얘기를 하니?
그때까지만 해도 선생님하고 아주 우호적인 관계였잖아요? 섹스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구요.
지금은?
애인이 생겼으니 다 끝난 일이죠, 뭐.
하여튼 애인이 생긴 걸 축하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잘 지내기를 빈다.
선생님두요. 좋은 여자 만나서 애기랑 낳고 행복하게 사세요.
말이라도 고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요…….
신애는 할말을 다 해 버리고 만다.
이제부터는 절 잊어 주세요. 저한테 아무런 미련도 갖지 마세요. 선생님 인생이 따로 있고 제 인생이 따로 있잖아요? 그냥 좋은 추억을 간직한 채 좋은 스승과 제자로 남고 싶어요. 약속하실 수 있죠?
약속하지. 그 정도 약속도 못 들어주겠니?
그때 동호가 들어오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난다. 문영은 공연히 호기를 부려 본다.
자,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모델 김신애의 초상화를 위해서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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