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 "내겐 푼수·퇴폐적인 색깔도..."
'첫사랑 사수 궐기 대회' 코믹연기
◆ 사진설명 : 영화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착하고 청순한 비련의 여주인공은 이제 그만 하고 싶어요.”
충무로가 주목하는 여배우 손예진(21)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취화선’(2002)에서 장승업(최민식)이 가슴에 묻은 여인 소운도, ‘연애소설’(2002)에서 난치병을 앓는 수인도, ‘클래식’(2003)에서 가슴 아픈 사랑을 하는 주희도 더 이상 아니었다. 손예진은 최근 자신의 네 번째 영화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6월 말 개봉)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이 영화는 요절복통 코미디다.
"청순한 배역은 이제 그만...첫사랑 유혹하는 푼수로 변신 불륜의 주인공도 해보고 싶어"
일매(손예진)는 말썽쟁이 고교생 태일(차태현)이 ‘네가 내 첫사랑’이라며 치근덕거리자 전국 석차 3000등 안에 들면 결혼해 주겠다고 공언한다. 그런데 태일은 밤마다 쌍코피를 쏟으며 공부한 끝에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고, 이번엔 오히려 일매 아버지(유동근)에게 덜컥 “사법고시에 합격할 때까지 일매를 처녀로 지키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콧대를 높인다. 태일과의 달콤한 연애를 꿈꾸던 일매는 키스마저 거부하는 태일 때문에 되레 속을 태운다.
“아무리 섹시한 표정으로 유혹해도 태일이가 안 넘어오는 거예요. 돌덩이도 그런 돌덩이가 없다니까요. 비키니까지 입고 제가 별의별 짓을 다합니다.”
배우는 이미지를 파는 직업이다. 어떤 이미지는 배우에게 아늑한 집이 돼 주지만, 더러 무덤처럼 배우를 삼키는 이미지도 있다. 손예진의 상품성을 높인 앳되고 순수한 이미지는 이제 그녀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제가 들어갔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너무 투명해요. 세상은 안 그렇잖아요. 이제 ‘물랭루즈’의 니콜 키드먼 같은 이미지를 보태고 싶어요. 제 안에 그렇게 퇴폐적인 색깔이 있거든요. 뒷골목 사랑도 하고 싶고….”
◆ 사진설명 : 대구에서 자란 손예진은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나를 조용하면서도 푼수 같은 애로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유망주'라는 꼬리표를 떼버리는 게 올해의 목표다.<조선일보 한영희기자 yhhan@chosun.com>손예진은 2000년 CF모델로 연예계 문턱을 넘었다. 한 이온음료 광고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녀로만 그녀를 기억하던 사람들은 전국 관객 180만명을 모은 ‘클래식’에서 손예진이라는 영화배우를 새롭게 발견했다. 첫 코미디 도전작 ‘첫사랑…’을 끝내자마자 KBS드라마 ‘여름향기’에 캐스팅될 만큼 그녀의 생활도 바빠졌다.
CF와 TV드라마, 영화 가운데 어렵기로 치면 CF가 으뜸이란다. “CF는 대개 기승전결이 없잖아요. 그토록 짧은 시간에 보는 사람들을 와락 사로잡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겠어요?”
흐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를 좋아한다는 손예진은 쾌활하면서도 그 또래에게는 없는 성숙미가 보인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40대 아줌마’라고 놀림을 당할 정도다. 그리고 자신에게 너무 박했다.
“저는 100점 만점에 48점짜리예요.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거든요. 배우 손예진은 현실의 손예진보다 훨씬 밝고 순수해요. 세상에 대한 애착과 사람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해 비관적이 된 것 같아요.”
참 솔직하다. ‘첫사랑…’에서 직접 작사한 노래를 부르는 그녀는 촬영일기를 꼬박꼬박 쓰는 건 물론이고, 사흘에 하루꼴로 일기를 쓸 만큼 마음을 옮겨 적는 걸 좋아한다. 속에 가라앉은 감정들을 건져올리며 깊이를 늘려가는 배우는 흔치 않다. “‘아이 엠 샘’이나 ‘그린 마일’처럼 훈훈한 인간미가 흐르는 영화가 좋아요. ‘내가 잘못 사는 건 아닌가’ 질문을 주니까요.”
손예진은 배우로서 불륜 연기에도 매력을 느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만이 내뿜는 힘이 있어서다. “언젠가는 그런 역할을 꼭 해보고 싶어요. 송강호·설경구씨처럼 훌륭한 배우들과의 멜로 연기도 탐이 나고요.”
촬영이 없는 날엔 하루 12시간 자고 낮잠까지 챙긴단다. 배우는 외롭다. 스무 살을 갓 넘고 순정만화책을 읽으며 앙드레 가뇽의 피아노 음악을 즐겨 듣는 여성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별안간 편지가 쓰고 싶어질 때 있잖아요. 예쁜 엽서는 구했는데 정작 받을 사람이 없을 때 얼마나 허전한지 아세요?”
<조선일보 박돈규기자 coeur@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