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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의 제3 예언(8. Libytine)

[Mr.Crow] |2003.06.30 15:10
조회 478 |추천 1

  8. Libytine



 



「그래서 이렇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마침 그 분을 만나게 된 건 정말 행운이군요」

‘늘 푸른 파멜라’공주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넘실대는 숲길을 거닐며 지글로의 이번 임무에 대한 성과를 보고 받았다. 지글로는 방금 전 임무를 끝내고'티벳'의‘암드록쵸’호수에 가라 앉아 있는 모함으로 귀환했다.

「가신 일은 잘 해결됐나요?」

「네. 아인슈타인님을 비롯한 네 분의 과학자분들을 만나 뵙고 분야별로 약간의 조언을 드렸습니다」

「어때요?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실 것 같던가요?」

「글쎄요. 워낙에 자존심이 강한 분들이라……」

「후후. 그랬겠죠. 하나 같이 자신의 머리 속에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담고 있다고 확신하시는 분들이니까요」

  대학원에 재학중인 물리학도로 위장한 지글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몇몇 과학자들에게 로이성인이 보유하고 있는 진보과학의 기초자료를 제공했다. 만약 그들이 지글로를 정신병자로 치부하지 않고 그가 건네준 자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본다면, 지구의 과학사는 물론 로이 성의 과학사도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두 신들과 대적할 수 있을만한 어떤 결과물을 창조해 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 혼님이라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공주님」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지글로를 죽음을 무릎쓰고 끝까지 책임지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트럭 운전수 대신 자신이 죽었어야 했다며 분노했던 것도 그렇고…… 저희들이 추구하는 인류애주의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신 분인 것 같아서 꼭 한 번 직접 만나 뵙고 싶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분이 데쟈뷰 호에 탑승하셨더라면 로이성인들의 결속력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투철했으리라는 생각을요. 어쩌면 사탄성인들도 생겨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잠시 해봤습니다」    

「후후. 그랬을 지도 모르죠」

《늘 푸른 공주님. 원로회의에 참석하실 시간입니다》

  모함의 통제 시스템인‘솔로몬’이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알았어. 솔로몬. 회의실 로드해」

  공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와 지글로를 둘러 쌓고 있던 태양과 계곡과 수풀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신 원로위원들이 대기하고 있는 회의실이 나타났다.

「모두들 자리에 앉으세요」

  늘 푸른 공주가 자리에 착석하자 원탁 주위에 서서 대기 중이던 5인의 원로 위원들과 지글로를 비롯한 14인의 비밀요원들이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힌 후 각자의 자리에 내려 앉았다. 원로들은 모두 한결 같이 고깔 모자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두 명은 하얀 색,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옅은 회색이었다.

  로이 성의 원로위원회는 모두 4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 상원위원은 9명, 중원위원은 15명, 그리고 나머지는 하원위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고깔 모자에 긴 코트를 입었지만 직급을 구분하기 위해 색상을 달리했다. 하원위원은 검은색, 중원위원은 회색, 그리고 상원위원은 하얀색 복장을 착용했다.  

「첫번 째 임무는 성공적으로 마쳤어요. 지글로 모아 사령관과 열 네 분의 특수요원들이 목숨을 사리지 않고 애써 준 덕분에요」

  공주가 먼저 한 손으로 지글로를 가리키자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물론 그 대가는 치러야했어요. 데릭 토마슨 소령과 게바라 카탄투스 대위를 잃었으니까요」

「인류를 위해 장렬히 전사할 수 있는 건 저희 로이성인들에겐 최고의 영광일 뿐입니다, 공주님.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지글로의 말이 맞았다. 로이성인들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하물며 그 두사람의 희생은 머지 않아 발발하게 될 신과 인류와의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지도 모를 밑거름이 될 수도 있었다. 자신 한 목숨을 받쳐 나머지 전체 인류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사탄성 전사와 기드온 전사들에게 무참히 도륙당하면서도 두 사람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공주님. 그들의 전사를 축복해 주십시오.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닙니다」

상원위원인‘루돌프 마이어’가 지글로를 거들었다. 그들에겐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슬픔과 눈물 따위로 허비할 여유가 그들에겐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삶은 오로지 인류 최후의 전쟁인 아마게돈에서의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내는 데에만 쓰여져야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혼은 마치 엄마 품에서 깨어난 것 같은 상쾌함에 눈을 떴다. 하긴 한 달여 동안 유리 캡슐 속에서 잠 아닌 잠을 자야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비록 그가 실제로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눈을 뜬 건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어쨌든 그의 기억 속에는 지난 1년여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크게 기지개를 켠 후 베렌다 쪽으로 걸음을 옮긴 혼은 오디오 세트 위의 과자 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청아한 노랫소리로 잠을 깨워준 창가의 비둘기들에게 그 보답으로 과자 부스러기를 지불해 주었다. 이렇게 무의식중에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사실은 생전 처음 해보는 일들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아주 묘해졌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런 감정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되뇌였다. 이제 그는 완전한 유 혼이 된 것이다. 기억과 모습만 똑 같은 복제인간 유 혼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오로지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유니크한 존재로써의 유 혼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혼은 열심히 먹이를 쪼아대는 비둘기들을 내려다 봤다. 전에는 녀석들을 참 많이도 부러워 했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마음껏 하늘을 날 수만 있다면, 그게 모기나 파리처럼 위태위태해 보이고 전혀 볼품없이 보이는 비행이라할지라도 과감히 자신에게 남아 있는 삶 전부와 맞바꿔도 좋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비둘기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늘 자신의 베란다에 과자 부스러기나 새 모이를 뿌려두는 이유도 그런 맥락이었다. 잠시나마 그들의 숨결이 닿는 곳에서 그들의 자유를 피부로 생생히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그들을 부러워 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들보다 훨씬 더 폼나게, 훨씬 더 빠르게 비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혼은 그들이 부러웠다. 5개월 후면 지구상의 인류는 모두 종말을 맞게 될 테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남아 마음 대로 저 하늘을 날아 다닐 테니까.


「근데 꼭 가야 되나?」

소양강변도로 위를 질주하며 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습관처럼 집을 나서 하야부사에 오르기는 했지만 곧 인류의 종말을 맞게 될 이 시점에 산이나 바다가 아닌 학교엘 가야 하는지 하는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왕 내친 걸음이니까 그 동안 못 만났던 녀석들하고 회포를 푸는 것도 삶을 마감하기 전에서 꼭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은 스로틀을 열었다. 어제 입었던 찰과상과 타박상 따윈 자신의 질주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듯 하야부사는 계속해서 스피드를 더해갔다. 그 때였다. 어제 구입했던 셀폰이 진동을 한 건. 똑 같은 모델로 두 개를 구입해 하나는 타라의 손에 쥐어줬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할 것을 당부하며.

  길가에 하야부사를 멈춰 세운 혼은 전화기를 꺼내 폴더를 열었다.

「나 철규 형인데……」

「아, 형님. 이 이른 시간에 어인 전화십니까?」

「어젠 어떻게 된 거냐?」 

  잠시동안 혼은 또 다른 자신에게서 주입받은 기억을 살펴봤다. 한단비라는 여인이 기다리고 있다며 재촉을 하던 철규의 음성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죄송해요 형님. 어제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서 강릉에 다녀왔어요」

「뭐? 바다……? 이런 뜬금없는 녀석……」

  형여나 사고를 당한 건 아닌가 오만 가지 걱정을 다 했던 철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아끼는 철규의 마음이 전파를 타고 혼의 귀에 전해져 왔다. 

「야, 임마. 핸드폰은 왜 받아? 스무 번도 넘게 했는데?」

「하하. 전화기가 고장나서 새로 뽑았수다」

「그럼 과사로 전화라도 해 주던가. 그 여자분 어제 2시간도 더 기다리다가 갔다」  

「켁! 두 시간이나요?」

「그래, 이 호랑말코 같은 놈아! 그런 미인을 그렇게 기다리게 만들면……」

  한참 언성을 높이던 철규는 거기까지 말한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흐느끼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요, 형님!」

「크크……. 어 그래!」

  두 사람은 큰 소리로 웃었다. 누나들 틈에서만 자라 워낙 내성적이었던 철규는 최근 몇 개월 동안 혼과 거의 붙어 살다시피 하더니 이젠 제법 능숙한 농담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조금쯤은 옹졸하고 까탈스러웠던 성격도 약간은 대범하고 유화적으로 개조되었다.

「한 단비씨, 10시쯤 이리로 오신다 그랬거든. 그 때 수업 있니?」

「헐. 9시부터 세 시간 연짱 윤용규 교수님 수업 있는데」

「허걱!」

  형법총론을 담당하고 있는 윤용규 교수는 학점을 부여하는 데 시험 성적보다는 출석 일수에 더 높은 비중을 두는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시험치기 한달 전부터 밤샘공부를 해도 성적이 안 나오는, 일명 돌대가리들이 있다. 하지만 당일치기로도 만점 답안지를 작성할 정도로 머리가 밝은 사람도 있지. 난 솔직히 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시험 답안지만 손에 쥐어지면 기억세포가 최면상태에 접어드는 그런 스타일이었지. 그래서 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에 대해 늘 불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작성한 답안지만으로 한 사람의 노력 정도를 평가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 난 맹세했다. 꼭 선생님이 되어서 그 썩어빠진 교육제도를 바꾸고야 말겠다고. 시험의 결과보다는 그 사람의 성실성을 더 높이 고려하는 평가기준을 확립하는데 이 한 몸 다 바치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그리고 난 이렇게 교수가 되었지. 한 사람의 성실성을 짐작하는 데에는 출석만한 게 없겠지? 내가 무슨 분실술을 연마해서 모든 학생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 녀석이 공부를 하는지 않하는지 확인해 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라는 말로 협박을 하곤 했다.

  학기가 시작될 즈음, 대부분의 교수들이 총 출석일수의 1/3 이상 결석을 하면‘F’학점을 받을 각오를 하라고 엄포를 놓지만 그는 세 번도 아니고 딱 세 시간을 초과해서 결석을 하면‘F'학점이라고 선언을 했다. 그가 담당하고 있는‘형법각론’은 3학점짜리였다. 즉 단 하루 수업을 제끼면‘F'학점을 주겠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최소한의 출석으로 최대한의 학점을 받아내자는 주의인 혼은 그의 무시무시한 협박에 콧방귀를 꼈다. 학교의 방침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처분권을 행사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보다 많이 배웠다는 사람이, 그것도 법학과 교수직을 맡고 있는 사람이 학교 규정을 무시한 채 그런 말도 안 되는 월권행위를 자행할 리 만무하다는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해 오던 대로 개강하고 3주 동안을 내리 제껴 버렸다. 학기가 시작되고 2주 동안은 수강신청 변경기간이라는 점과 확정된 새로운 출석부가 나오려면 며칠은 더 소요된다는 점을 악이용한 자체 휴강을 실시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선배들을 통해 전해 들은 바로는 그의 협박은 결코 협박에 그치지 않았다. 간 큰 선배들이 그의 폭정에 항거하다가 장렬히‘F'학점을 받았던 전례가 한두 건이 아니었다. 3주만에 출석해 그런 사실을 전해 들은 혼은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비좁은 강의실에 무엇 때문에 취업을 앞둔 4학년 졸업반 학생들이 한둘도 아니고 십 수명씩 자리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냐? 그토록 아름다운 그녀에게 오늘도 그냥 돌아가라는 말을 난 도저히 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절세미녀와 전공필수과목, 그 둘의 경중을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그의 갈등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학점이야 졸업하기 전에 언제든 이수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너무 걱정하지 마슈. 방법을 찾아 볼 테니까」


「이번이 마지막 도시라 그러셨던가요?」

‘끝없는 사막’위를 날아가던 카라는 등 뒤의 미뉴에트를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미뉴에트를 비롯한 여섯 꼬마들은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아침에 ‘유다 시(市)’를 출발한 뒤에 벌써 5번째 같은 질문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왜 머리 나쁜 사람들에게‘새 대가리’에 비유하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를로스가 조금쯤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겨우 두 개 도시를 지나 왔어요. 아직 7군데나 더 돌아야 해요」

  치코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야. 다시 오메가 시로 되돌아가야 하니까 모두 8군데가 남아 있는 거야」 

  출입불가지대로 내몰린 아이들에겐 해야할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로이 성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도시들을 모두 경유해 다시 수도이자 출발지점인‘오메가(Ω) 시(市)’로 복귀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임무였다.  

  메듀샤의 숲에서 괴물들에게 포위되었던 공주 일행을 카라는 자신들의 서식지인‘하늘마루고원’으로 데려갔다. 하늘마루고원은 해발 3,598미터의 고지대에 형성된, 거대한 호수를 가진 넓은 벌판이었다. 그곳엔 약 70여 마리의 로프로사우르스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카라는 그들의 최고 지도자였다. 

로프로사우르스 족은 한결 같이 공주의 일행을 환대했다. 그곳은 안전지대를 제외한 로이성 내에서는 인간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들을 쫓던 맹수들은 벌써부터 추적을 포기했다.

로프로사우르스 족은 공주 일행을 위해 성대한 향연을 베풀어 주었다. 보도 듣도 못한 풍성한 과일들과 어류, 육류로 시작된 만찬은 그들의 춤과 노래―노래라고 해봐야“꿰에엑”이나“끼익”,“구루르르”같은 울부짖음이 전부였지만―로 절정을 이르렀고 그들만의 독특한 의식으로 끝을 맺었다. 향연이 베풀어 지는 동안 카라는 공주 일행에게 로프로사우르스 족은 인간들에게 큰 호의를 갖고 있으며 인간들과의 화친(和親)을 맺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미뉴에트는 비록 이번 자신들의 임무가 인류의 대표 자격으로 로프로사우르스 족과의 화친을 맺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맹수들로부터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해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도 로이성인들의 공주로써 그들의 제의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했다. 언제든 인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다음 날 아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려하는 공주 일행에게 카라는 자신의 등을 내밀었다.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겠다는 선언과 함께. 공주는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다며 만류했지만 카라는 지난 밤에 체결한 화친조약을 상기시키며 조금도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다. 미뉴에트 일행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한 채 다시 한번 그녀에게 신세를 지기로 했다.

  첫날엔‘하늘마루고원’에서 북동쪽으로 35,000여 키로 떨어져 있는 해양의 도시‘베드로 시(市)’를 방문했다. 공주일행을 환영하기 위해 몰려 나와 있던 군중들은 카라의 등장에 기겁을 했다. 공주로부터 텔레파시를 통해 미리 상황 설명을 전해 들었던‘로마리오’시장(市長) 역시 생전 처음으로 마주하는 거대한 몸집의 로프로사우르스 앞에서는 식은 땀을 닦아내느라 분주했다.

  바닷가 휴양지에서 하루라도 쉬었다 가라고 통사정을 하는 시장을 뒤로 한 미뉴에트 일행은 북쪽으로 8,000여 키로미터 쯤 떨어진 대 평원에 자리하고 있는‘유다 시(市)’로 이동했다. 그 곳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하루를 묵고 오늘 아침에 세 번째 도시를 향해 떠나왔다.

세 번째 도시는‘이카루스’산에 위치한‘로이 시’였다. 로이 시는 유다 시로부터 북서 쪽으로 52,000키로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곳은 로이 혹성 내에 건립된 10개의 도시 중 가장 척박한 조건을 갖고 있는 도시였다. 하지만 로이인들에겐 다른 그 어떤 도시들보다 유서가 깊은 도시이기도 했다.

  17년간 우주의 미아로 떠돌던‘Deja­ Vu’호가 불시착한 곳은 바로 해발 1,500여 미터의 이카루스 산의 정상이었다. 의식을 차린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자신들이 불시착한 그곳을 맹수들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만드는 일이었고 그것이 확보된 후에 그들은 도시를 건설하는데 주력했다. 지구인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한 곳이 바로 로이 시였던 것이었다.     


「와! 공주님. 저기요! 저기 좀 보세요」

  장난이라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고 생각하는‘요한센’이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크라이 울프에요. 크라이 울프!」

‘크라이 울프’는 지구에서의 늑대와 흡사하게 생긴 맹수로 눈물을 흘리면서 인간으로 변신한다고 알려진 로이성의 고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생명체였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 전설이 로이 혹성에 첫발을 내디딘 지구인들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크라이 울프는 상상 속의 동물이야. 요한센!」

  미뉴에트는 요한센을 돌아보며 나무라듯 말했다. 벌써 10시간 가까이 카라의 등에 앉아만 있었던 그의 장난기가 또 다시 발동하기 시작한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늘 그렇듯 요한센은 이번만은 정말이니까 제발 믿어달라는 듯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불쌍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이에요. 공주님. 지금 저 쪽 노을 속으로 날아가고 있다니까요」

「나도 조금 무료하긴 하지만 카라님이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시겠니? 그런 장난은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해. 요한센!」

「이번엔 정말이에요. 공주님. 저 쪽을 한번만 봐 주세요」

《크라이 울프가 뭐에요?》

  벌써 300년을 넘게 산 카라 자신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명칭에 관심을 드러냈다.

「늑대처럼 생긴 동물인데 저희 같은 인간으로 변신이 가능한 신화 속 동물이에요. 실제로 존재하는 건 아니죠」

《늑대는 뭔데요?》

  늑대는 2천여 년전의 지구에서나 존재했던 동물이라 그녀가 알 리가 없었다. 게다가 늑대라는 이름은 인간들이 지어준 것이 아닌가? 미뉴에트는 카라에게 늑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늑대와 비슷하게 생긴‘타리아스’를 떠올렸지만 그것 또한 별 도움은 되지 못할 것 같았다.‘타리아스’라는 이름 또한 인간들에게만 통용하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금방 확실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자신의 머리 속에 늑대의 모습을 그려낸 후, 그것을 카라의 뇌리 속으로 투사하는 것이었다.

《아……. 나투카반이군요》 

「나투카반이요?」

《네. 원체 번식력이 약한데다가 면역력도 약해서 언제 멸종될지 모르는 종족이죠. 저희보다도 더 희귀할 정도로요》      

  꼬마아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타리아스는 생존력이 강해 숲이나 대평원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사막이나 남극지방에서도 볼 수 있는, 그 어떤 동물들보다 흔한 종이기 때문이었다. 미뉴에트는 자신이 보내준 염사(念寫)를 그녀가 잘 못 이해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카라가 얘기한 나투카반은 로이성인들이 말하는 타리아스가 아니라 크라이 울프였다.

《크라이 울프는 전설 속 동물이 아니에요. 로이 성 어딘가에 분명히 실존하고 있죠》   

  미뉴에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라이 울프가 환상 속의 생명체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생명체라니……. 꼬마들은 하나 같이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요한센을 제외하고는.

「거 봐요. 제가 봤다 그랬잖아요!」

「정말로 눈물을 흘리면 사람으로 변하나요?」

  휘동그런 눈을 굴리며 우딘이 물었다.  

《후후. 그건 좀 와전된 얘기 같네요. 꼭 눈물을 흘려야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언제든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수 있죠》

「언제든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아이들은 합창을 하듯 동시에 외쳤다.

《네.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어떤 것도 흉내낼 수가 있어요》

「우와! 그럼 식물로도 변할 수 있어요?」

《제가 실수를 했군요. 살아 있는 동물 중에서만요. 님들이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라고 부르는 미세 생명체도 물론 안 되고요》

「미, 믿을 수가 없어요」

《후후. 운이 좋으면 이번 여행 중에 만나게 될 지도 모르죠. 좀처럼 보기 힘든 녀석이지만》

  꼬마들은 단지 당시의 환경이 최악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초기 로이성인들이 남긴 기록을 믿지 못한 채 크라이 울프를 가공의 존재로 치부해 버린 자신들이 한 없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모든 임무를 완수하고‘오메가 시’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고대 로이성인들이 결코 나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공주님. 저기 이카루스 산맥이 보여요」  

  루디아가 검게 물든 지평선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병풍처럼 펼쳐진 산과 산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듯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모두 주위를 살펴봐. 도시의 불빛을 찾아야 되니까!」

  미뉴에트의 명령에 주위를 돌아본 아이들은 끝이 어딘지 분간할 수조차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산맥의 규모에 한숨만 내 쉬었다. 카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후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고 있으니까요》

  300년을 넘게 사는 동안 아마도 그녀는 로이 성을 수 천 번도 넘게 일주했을 것이었다. 그녀를 만나게 된 건 정말 큰 행운이자 축복이라고 미뉴에트는 생각했다. 그 때였다. 카라가 미뉴에트 공주를 돌아보며 매우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인 건.

《이번이 마지막 도시라 그러셨죠?》


‘함정수사’에 대해 수업을 하고 있는 윤용규 교수의 우렁찬 목소리로 강의실은 떠나갈 듯 했다. 윤교수는 함정수사의 모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펼치고 있었다. 아무리 범인을 잡는다는 공익의 목적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범의가 없었던 사람을 부추겨 범죄를 짓게 만들 수도 있으므로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는 게 그의 주장의 핵심이었다.

「피해 법익이 존재하지 않는 범죄가 성립될 수가 있습니까? 함정수사에서는 피해 법익이 존재하지가 않죠? 그것을 어떻게 범죄로 처벌할 수가 있습니까? 만약 범인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함정수사를 편 수사관도 같이 처벌을 해야 옳을 겁니다. 물건을 살 사람이 없는데 물건을 팔 수가 있습니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 아닙니까? 두 사람이 같은 행위를 했는데 한 사람은 수사관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고, 다른 한 쪽은 수사관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범죄가 성립된다고 하고……. 이런 모순이 또 어딨습니까? 한 쪽의 범죄가 성립되지 않으면 다른 한 쪽 역시 범죄가 성립되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람의 재산과 신체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형법의 적용이 어떤 집단이나 개인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유동성을 띤다면 어느 누가 그 나라 국민임을 자처하겠습니까? 전두환 보세요. 사형을 수 천 번은 시켜도 시원치 않을 인간 아닙니까? 저잣거리에 매달아 지나가는 사람마다 돌을 던져 죽여도 그 죄를 다 사하지 못할 인간 아닙니까? 그런데 사형은 커녕, 일가의 재산이 수 백억인데도 아직 국고환수조차 못하고 있으니 이게 법치국가에서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함정수사에 대한 그의 강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분노로 이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혼은 그의 열변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옆 자리에 앉아 있는‘명자’와 열심히 귓속말만 주고 받았다. 

「제발 명자야. 오빠가 나중에 맛 있는 거 사줄게」

「아 글쎄 어디 가려고 그러는데?」
  수업이 시작되기 전 혼은 명자에게 10시가 되기 전에 화장실이 급하다는 핑계로 윤 교수에게 10분간의 휴식시간을 요청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러마고 대답했던 명자는 이제야 그 이유를 물어왔다.  

「넌 아직 어려서 몰라도 된다니깐!」

「얘기 안 하면 못 해준다니깐! 맨날 할 말 없으면 그 소리야」

  아직 고백을 한 적은 없었지만 명자는 작년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본 그 날부터 혼을 짝사랑해왔다. 그런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혼의 눈에 그녀는 아직 코흘리개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한 걸음 다가서려 할 때면 모른 척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그녀가 두 걸음 다가서려 할 때면 이런 저런 핑계로 꽁무니를 뺐다.

「그 동안의 의리가 있지. 너 오빠가 이렇게 사정하는데 치사하게 이럴 거야?」

「의리? 내 생일도 기억 못하는 오빠한테 의리라는 게 있긴 한 거야?」

  지난 4월 4일 오전이었다. 교양과목을 수강하기 위해 학생회관 앞을 지나 교대 쪽으로 향하던 혼은 잔디 밭 벤치에 모여 있는 동기들을 발견했다. 무리 속에서 명자가 그를 향해 손짓을 했다.

「무슨 일 있어? 왜들 수업 안 들어가고 이렇게 모여 있는 거야?」

「응 무슨 일 있어」

「좋은 일, 나쁜 일?」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 나쁜 일에 가깝다고 봐야지?」

「쩌업. 무슨 일인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이 태어난 날이거든!」

  혼은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어느 새 그를 둘러싼 동기 녀석들이 폭죽을 터뜨렸다. 깜짝 놀란 혼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샴페인을 그의 얼굴에 터뜨렸다. 명자였다.

「생일 축하해, 오빠!」

  그리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축가가 시작됐다. 생일이 언젠지도 모르고 살아 온 혼에게는 영원히 기억될 축하파티였다. 다음 날 승진이 녀석에게 물어본 결과 그 날의 특별한 생일파티는 명자의 진두지휘 하에 거행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니 생일? 언제 알려나 줬어?」

「컹. 일주일 전부터 노래를 불렀구만, 뭐 언제 알려나 줬냐구?」

「뭔 소리야. 어빠는 어제 한국에 도착……」

  거기까지 말한 혼은 그제서야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비록 그가 어제 입국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 동안에도 이곳엔‘유 혼’이라는 인간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명자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혼을 째려봤다.

「오빠 아무래도 이상하다? 하룻밤 사이에 장발로 변한 것도 그렇고……」

  그녀가 혼의 뒷머리를 움켜 잡으려 손을 내 뻗었다.

「정말 가발 맞아? 응? 응?」

「컹.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가발 맞다니까!」

  그녀의 손목을 움켜 잡으며 혼이 고개를 뒤로 빼냈다. 그 때였다. 혼의 오른 편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던 영미가 손을 치켜들었다.

「교수님. 화장실이 급해서 그러는데요. 잠시 휴식시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영미가 혼을 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닷가에 도 닦으러 갔다 왔냐? 어떻게 하루 사이에 머리가 그렇게 자란 거야?」

  혼이 들어서자 철규가 휘둥그런 눈으로 말했다.

「후후. 분위기 좀 바꿔볼까 해서 가발 하나 장만했수. 괜찮수?」

「그게 뭐냐? 기집애도 아니고……」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리던 혼은 실망에 찬 눈으로 철규를 바라봤다.

「벌써 간 거유?」

「섭섭해 죽겠냐?」

「컹. 형총 F학점 각오하고 내려 온 거유!」

「걱정마라. 전화 한 통하고 온다고 했으니까. 어. 저기 오시네……」

「안녕하세요. 한 단비라고 해요」

  175cm 정도 될까? 여자치고는 눈에 띠게 큰 키였다. 마른 편이었지만 벌어진 어깨가 꽤 오랜 기간 동안 근육단련 운동을 지속해 왔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결혼 날짜를 잡은 걸 후회할 정도라던 철규의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설령 윤 교수로부터‘F'학점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전혀 아쉽지 않을 것 같았다.

「유혼이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서 영광일 뿐입니다!」  

  그녀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혼은 과장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까만 눈 동자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빛을 발했다.


  단비가 혼을 처음 본 건 도서관을 4층으로 옮긴, 중간 고사가 시작되기 며칠 전이었다. 가죽 점퍼에 건빵바지, 그리고 사병용 군화를 신은 범상치 않은 차림새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점심 때쯤 느긋하게 열람실에 나와 도서관 문닫기 전까지 장서실에서 빌린 책만 한 아름 읽다가 사라지는 게 그의 하루 일과였다. 중간 고사가 시작되고도 그의 일과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그녀는 그의 책상 위에 수북히 쌓여 있는 책들을 살펴봤다. 10여 권의 책들은 모두‘최면술’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시험은 수업시간에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건지, 아니면 아예 학교 공부는 포기했다는 건지…….

  콧방귀를 끼며 시선을 거두어 들이려는 순간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노트에 신과 악마가 서로 뒤엉켜 섹스를 하고 있는 그림이 4B 연필로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LIBYTINE Ⅱ'라는 문자가 아로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비티나’는 2년 전 동명의 타이틀을 가진 두 장짜리 컨셉트 앨범을 발표한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였다. 두 장의 씨디에는 영어 가사로 이뤄진 87분과 74분짜리 한 곡 씩만 수록되어 있었는데, 주제는 신은 존재하고 있지만 그는 결코 절대선의 존재가 아닌 절대악의 존재에 가깝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들의 앨범은 제일 먼저 일본에서 발매됐고 6개월만에 5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아무런 P ? R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종교인들의 저주에 가까운 비방 일변도의 칼럼들 덕분이었다. 일본에서의 성공으로 인해 유럽과 미국 쪽 음반 배급업체들의 요청이 뒤따랐다. 그리고 위기의식을 느낀 종교단체는 리비티나의 신성모독이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정치적인 루트까지 동원해 앨범 배포를 방해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오히려 그들의 앨범을 전 세계적인 이슈로 부각시키는 데 혁혁한 공로를 했다.

  리비티나의 앨범을 수입한 각국의 배급업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앨범 제작비보다 광고비가 더 많이 소요되는 유통구조현실을 고려할 때 리비티나의 경우는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격이었다.

  헤비메탈 중에서도 가장 엷은 매니아 층을 갖고 있던 프로그레시브 메탈 장르인 리비티나의 앨범은 1년만에 1,000만장을 돌파하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을 수립했고 그 어떤 평론가도 더 이상 프로그레시브 메탈 장르를 비주류라 폄하할 수 없게 되었다.

  리비티나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고 TV출연은 물론 공연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앨범 한 장만 세상에 던져 놓고는 자신들의 모든 의무를 다 했다는 듯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음악 전문지를 발행하는 세계 유수의 잡지사에서 파견된 전문가들이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속속들이 내한했다. 하지만 리비티나의 멤버가 몇 명인지, 심지어는 그들의 국적이 대한민국인 건 확실한 건지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그들의 음악을 제작한‘아름기획사’측에서 철저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계 음악계에는 리비티나가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밴드일 거라는 설이 난무했다. 대한민국의 음향기술로는 그 정도의 사운드를 뽑아낼 수 없다는 걸 그 이유로 들었다.‘락’이 뭔지도 모르는 손바닥만한 땅에서 그런 위대한 밴드가 탄생했을 리 만무하다는 것 또한 그들이 제시한 이유 중 하나였다.     

「법대 자판기 커피가 제일 맛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네요」

  법대 잔디밭 벤치에 내려 앉으며 그녀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단비씨도 저처럼 커피 맛을 설탕의 향유량 정도로 평가하는 취향이신가 보군요. 하하」

  다른 사람이 그런 얘길 했다면 커피 맛도 모르냐는 비아냥거림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동지라도 만난 듯 기쁨 어린 그의 표정과 어투는 그 어떤 역설법이나 과장법도 묻어 나지 않았다.  

「그럼…… 단비씨도 강대생?」

「네. 미술학과 다녀요. 오빠보다 학 학번 위죠」

  오빠라는 소리에 혼의 입 끝이 양쪽 귀에 걸릴 정도로 찢어져 올라갔다. 그 동안 법대 내 여학우들의 끊임없는 구애전선에도 굴하지 않고 독수공방해 온 것에 대해 어쩌면 오늘 밤 그 보답이 주어지려나 하는 기대에 사로잡혔다. 도서관 구석구석에서 숨죽이고 자신을 지켜봐 오던 수많은 여인들 중에 그녀도 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식……. 진작에 얘길하지. 그랬으면 이 오빠가 많이 많이 이뻐해 줬을 텐데……》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혼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단비가 정색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나키스트의 기자로써 찾아 온 거에요」

  그 얘길 듣는 순간 혼의 장난기 넘치던 표정은 일순 차갑게 굳어버렸다. 아나키스트는 국내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락음악 전문잡지의 이름이었다. 락음악이 쇠퇴기를 맞으면서 많은 회사들이 도산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아나키스트는 오히려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할 정도로 탄탄한 구독자 층을 확보하고 있었다.

  혼은 잠시 그녀의 눈을 들여다 봤다. 그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감추려면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지를 간파해 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 속 기억들을 잠시 훑어보던 혼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2번째 앨범 커버 디자인을 스케치한 노트를 그녀에게 들킨 장면이 뇌리 속에 영상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아는 친구로부터 그런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류의 멸망이 5개월 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 더 이상 정체를 숨길 필요성 따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진부터 찍을까요? 아니면 인터뷰부터 할까요?」  


  단비가 리비티나를 알게된 건 숙부가 운영하는 헤비메탈 전문지인‘아나키스트’의 객원기자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재작년 겨울이었다. 아나키스트의 모든 직원들에겐 리비티나의 정체를 밝혀내라는 특명이 떨어졌었다. 마침 방학 때라 특별수당 좀 받아볼까 하는 마음에 그녀 역시 그들의 실체를 추적해내기로 마음 먹었다.

  젤 먼저 그녀는 앨범 커버를 뒤적였다. 뒷 커버엔 그들의 앨범을 아름기획사에서 제작한 걸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앞서 그곳을 탐방한 직원들에 의하면 기획사 측은 리비티나에 대한 그 어떤 질문에도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리비티나측에서 요구한 계약 조건이 그것이었다며 관계자들은 한사코 입을 다물었다.

  음반판매고를 올리기 위해 돈을 들고 찾아와 호의적인 기사 몇 줄만 써달라고 사정하는 제작자와 가수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던 그녀였다. 설사 리비티나의 모든 멤버들이 극도의 매스컴 공포증 환자라고 하더라도 칼끝을 잡고 있는 기획사 측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외부에 알리려고 하는 게 당연한데 오히려 철저히 숨기려고 하는 그들의 태도를 단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덕에 리비티나는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존재로 추앙받게 되었지만.

  거대한 악마가 끊임없이 인간들을 씹어 삼키는 포스터를 들여다보며 단비는 조금 다른 쪽으로 접근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연예인 협회나 작곡가 협회, 저작권 협회 쪽에서는 그들에 관한 자료가 보관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그녀가 찾은 곳은 저작권 협회였다. 분명 그 앨범으로 인해 파생되는 수익에 대한 권리자가 있을 것이고 저작권협회에는 그 권리자의 신상에 대한 자료 정도는 비치되어 있을 거라고 그녀는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어져버리고 말았다. 저작권 협회의 서류에는 그들의 곡에 대한 저작권자가‘아름기획사’로 되어 있었다. 

  단비는 곧바로 연예인 협회로 향했다. 최근 1년 동안 협회에 가입한 사람들 중 가수 부문의 가입자들만을 따로 추려내어 그 중에 아름기획사나 그 산하 매니지먼트사인‘SYW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의 프로필만을 골라냈다. 전부 20여명쯤 됐는데 세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눈에 익은 얼굴들이었다. 리비티나는 기타와 베이스, 드럼, 키보드, 보컬까지 모두 다섯 파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타와 베이스, 그리고 보컬까지 한 사람이 담당한다면 세 명으로도 녹음작업은 마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들의 프로필을 복사한 후 흥신소에 의뢰했다. 하지만 세 명 모두 댄스 가수들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작곡가 협회를 방문한 결과도 이와 비슷했다. 리비티나에 대한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공지천에는 H.M.L.H 춘천지부의 연설회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사진도 찍어야 하니까 자리를 옮겨 나머지 인터뷰를 하자는 단비의 제안에 혼은 공지천으로 방향을 잡았다. 물론 H.M.L.H의 연설회가 있는 줄 알았다면 결코 이 곳을 택하지는 않았으리라. 

「저들의 주장이 오빠의 앨범 주제와 정확히 일치하는 건 정말 우연일까?」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연설회장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단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던 혼은 그저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빠 앨범이 발매되자 기독교와 이슬람교, 힌두교를 비롯한 전 세계 종교단체에서 맹렬한 비난을 퍼부어댔잖아. 심지어 뉴욕 타임즈는 신의 이름으로 오빠를 찾아내 기필코 응징해야 한다는 광신도들의 투고가 하루에 만 통도 넘게 쇄도한 날도 있었다던데 들었어?」

「뉴스에서 보긴 했어」

「오빠 앨범이 발표된 날이 몇 일인지 기억해?」

「7월 17일」

「H.M.L.H가 발족한 날은 몇일인지 알아?」

「컹. 그런 걸 내가 어케 알아?」

「오빠 앨범이 발표되고 딱 1년 되던 날이야」

「헐. 그래?」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면 내가 H.M.L.H랑 입을 맞추기라도 했단 소리야?」

  웃자고 내뱉은 혼의 말에 단비는 매우 진지하게 대답했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잖아」

「에이……. 오바다. 그건!」

「만약 오빠가 앨범을 발표하기 전에 누군가가 프로그레시브 메탈이 곧 세계 음악계를 주도할 거라고 예견했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이 어딨냐고 코웃음을 쳤겠지? 리비티나의 멤버는 유혼이라는 한 사람뿐이고 그저 평범한 대학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공개된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아마 잡지를 팔아 먹기 위한 허위기사라고 반박할 걸?」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봐!」

「혹시 오빠가 H.M.L.H의 교주 아냐? 앨범을 낸 후 전 세계에 같은 뜻을 같고 있는 사람들을 규합해서 H.M.L.H를 만든 거 아니냐구」

「컹……. 말드 안 돼. 조직의 형태를 갖춘 건 16세기부터고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낸 건 작년부터지만 H.M.L.H의 역사는 기원전부터 시작됐어. 난 이제 겨우 25살이고!」

「아무 관계도 없다면 어떻게 그런 세세한 역사까지 자세히 알아?」

  뭔가 단서를 잡았다는 듯 단비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순간 혼은 당혹감에 사로 잡혔다. 그녀에게 2,000여 년 후의 미래인과의 만남에서 있었던 대화를 그대로 설명해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으, 응. 어, 언젠가 신문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그래? H.M.L.H 기사는 빠짐없이 스크랩해 놓는데 나는 왜 못 봤을까? 어느 신문이었어?」       

「으, 응. 그, 글쎄……? 그, 그게 무슨 신문이었더라……?」

  뒷 머리를 긁적이는 혼을 멈춰 세우며 단비가 물었다.

「오빤 거짓말 못한다 그랬지?」 

「응. 오빠는 선천성 거짓말 혐오증 중환자야. 절대 거짓말 못해」   

「절대로?」

  혼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의의 거짓말은 가끔 하긴 해……」

  단비는 실눈을 뜨고 찬찬히 혼의 눈빛을 살폈다. 볼까지 발갛게 물들어 가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인심쓰듯 고개를 끄덕이며 단비가 말했다.

「좋아. 믿어 주지」

「고, 고마워」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도대체 무엇을 고마워 해야 하는 건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 때 단비가 구름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며 카메라를 흔들어 보였다.

「이쯤에서 한 장 찍을까?」

  그 때였다. 연설회장 쪽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군중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져 온 것은. 혼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그 쪽으로 집중됐다. 무대 한 가운데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시커먼 연기와 뒤엉킨 채 치솟아 올랐고 연설회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무대 위쪽 하늘에 부유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올려다 보며 괴성을 질러댔다.

「마, 맙소사……」

  광포한 눈으로 땅 위의 인간들을 쏘아보는 예수를 바라보며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의 단비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가느다랗게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혼이 말했다.

「저건 진짜 예수가 아니야」   

 

《아둔한 자들이여. 어찌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믿으려 하는 것인가? 난 태초부터 여기 존재했고 지금 이순간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여기 있을 것이다. 내가 창조한 피조물들 중에 가장 미천한 역사를 가진 너희들이 감히 나를 부인하고 모독한단 말인가? 너희들에게 생명을 부여해준 창조주인 나를?》

  입술 한번 꿈쩍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호통은 공지천 하늘을 진동시키고 남을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그저 우왕좌왕하고만 있던 군중들은 낯선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질겁을 하며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그곳에 참석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신론자로 오해받기 충분한 일 아닌가? 무대를 화염으로 뒤덮은 불덩어리가 군중들을 향해 내뿜어지지 않을 거라고 그 누가 확신할 수 있으랴.

  그 때, 하늘까지 모두 불살라 버릴 듯한 기세로 활활 타오르던 불기둥이 한 순간 촛불처럼 꺼지며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몸을 공처럼 웅크리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조금 전까지 대중들을 향해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종교인들의 역사적 만행에 대해 성토하던 바로 그 연사였다.  

  그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그리스도를 올려다 봤다. 그 거대한 화염 속에서도 그는 어떤 화상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양복에 그을림조차 없는 것으로 봐서 무의식 중에 보호기재(保護奇才)가 작동한 듯 싶었다.

  그의 건재함에 예수로 변신한 기드온 전사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7할의 공력 밖에 실리지 않은 공격이었다고 하지만 상대는 무방비 상태였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수가 있는가? 갓난 아이의 주먹질에 무릎을 꿇을 이는 없다. 7할의 공력이 실린 자신의 에너지 파가 그에겐 갓난 아이의 주먹질에 불과하단 말인가?

  예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사실 그는  기드온 전사들을 총지휘하는 전사단장이었다. 24인의 기드온 전사들 중에서 가장 높은 E.S.P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가 바로 그,‘이반 표드르비치 듀스칼리니코프’인 것이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영역을 초월해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그를 어린애 취급할 상대가 어찌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악몽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 꿈은 아니리라. 아마도 특출나게 보호기재만 발달한 인간이던가, 더럽게 운이 좋은 인간이던가 둘중에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반의 이성은 H.M.L.H의 연설회를 쑥밭으로 만들려던 목표를 접고 지금 즉시 바티칸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지만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그는 과연 자신보다 월등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지 그걸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늘 높이 치켜든 이반의 오른 손 끝에서 불무리가 쏟아져 내렸다. 불무리는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사내를 덮쳤다.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아 올랐다. 이반은 무대 위를 뒤덮은 시커먼 화염 속에 인간의 뇌파를 찾아 봤다. 하지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정도 공격에 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이반은 냉정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을 내뿜었다. 어느 순간엔가 빈틈을 노려 역습을 가해올 것분명했다.

  그 때 그의 등 뒤 공간이 일렁거렸다. 그것은 미세한 입자로 분해된 인간의 육신이 재조합될 때의 전조현상이었다. 이반은 허리를 뒤틀며 일렁이는 공간을 수도로 갈랐다. 공간에 파문이 일면서 사람 크기만큼의 일렁임이 두 동강으로 떨어져 나갔다.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공중에 몸을 날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허공에 떠 있는 동안엔 방향을 전환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미리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는 상대에게 되려 역습을 당할 공산이 크다는 게 그 이유다. 마찬가지로 에스퍼들 간의 싸움에서 공간이동을 시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분해된 육신의 조각들이 다시 재조합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그 동안 상대가 위치를 추적해 재조합되고 있는 입자들을 다시 분해시켜 버리면 그 입자들은 영원히 허공의 먼지로 떠돌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크크크. 역시 내 추측이 맞았어. 단지 보호기재만 뛰어난 녀석이었을 뿐이었어!」

  이반의 입꼬리가 길게 말려져 올라갔다. 도망치다 말고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그의 음흉한 미소를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지전능한 존재의 웃음치고는 너무나 천박해 보였던 것이었다. 포만감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이반은 포효했다.

《감히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들은 처참한 말로를 맞게 될 것이다!》

  이반은 군중들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높이 치켜 들었다. 하늘을 향해 내 뻗은 그의 손바닥이 대기 중의 열 에너지를 빨아 들이며 파란 빛을 뿜어댔다. 이윽고 그의 손이 군중들을 향해 뿌려졌고 거대한 불무리가 쏟아져 나갔다.

‘콰콰쾅!’

  하지만 이반의 손에서 쏟아져 나간 불무리는 허공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그 불무리가 폭발한 지점엔 영원히 허공을 떠도는 먼지조각이 되어 있어야 할 바로 그 사내가 버티고 서 있었다. 자신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이반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자신의 몸을 던져 이반의 에너지 파를 막아낸 사내가 먼지를 털어내 듯 옷깃을 매만지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 모든 일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게. 고정관념의 허울을 벗어 던지기 전까지는 그저 그 모든 현상들을 보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머리 속이 의문들로 가득하면 눈과 귀가 어두워지는 법이거든!》

  그렇게 말한 사내는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수 십미터를 이동해와 이반의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정말 눈 깜빡할 사이였다. 

《이렇게 말이야!》   

  그렇게 세게 거머쥔 것 같지도 않은데 이반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공간이동으로라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기를 끌어모을 수가 없었다. 이반은 완전히 사내에게 압도당하고 말았다.

《네 놈은 분명히 우리와 같은 인간일진데 어찌 신들의 개 노릇을 자처하며 같은 인류를 해하려 하는 게냐? 그렇게 하면 곧 있을 재림때 두 신들이 네 놈만은 구원해 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더냐? 신들을 대신해서 인류를 무참히 학살해 주었으니 부디 기특하게 여겨 너 하나의 영생만은 보장해 줄 지도 모른다는 이기심때문이더냐?》 

《이, 인류는 하나님 아버지의 피조물일 뿐이다. 창조주께서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 인류는 이 땅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자들은 그 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거두어야 한다. 그 분이 주신 생명을 스스로 거부한 셈이니까!》    

  호흡조차 곤란한 상태였지만 이반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비록 자신의 목숨이 사내의 재량권 하에 놓여져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래서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저 하늘 어디선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을 주님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그가 우리 인류를 창조해 냈다고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이냐?》

《그 분이 창조해 내지 않으셨다면 어찌 세상이 이렇듯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겠나?》

《완벽한 조화라……. 그럼 그토록 완벽한 조화의 일부분인 인류를 왜 말살시켜려는 거지?》

《인간들의 끝없는 욕심에 그 분도 지치셨던 게지. 그런 끝없는 욕심은 많은 다른 종의 생명체들의 멸종과 자연환경의 파괴를 초래했고 창조주께서 조율하신 조화로움에 역행했다. 재림은 창조주의 뜻을 거역한 인간들에 대한 심판일 뿐이다》

《진정 그런 것이라면 그의 심판은 어떤 신을 섬기는가에 의해 판가름할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를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독교신자인가 아닌가가 심판의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는 건 너무 억지아닌가?》

《그 분의 아들 딸들은 결코 그 분의 뜻을 져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합리적인 기준인 것이다》

《합리적이라고? 종교전쟁과 마녀재판으로 수 백만이 너희들의 창조주 앞에 죽어나갔다. 그 때의 기준들도 합리적인 것인가?》

  11세기 말에서부터 13세기 말까지 행해졌던‘십자군원정’에서는 무려 200만명 이상이, 그리고 1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진‘마녀사냥’에서는 최소한 10만명 이상의 여인들이 마녀로 몰려 온갖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당했다. 기드온 전사단이 가장 왕성한 활약을 펼쳤던 것도 종교전쟁과 마녀사냥 때였다. 지금은 겨우 24명이 전부지만 당시에는 무려 300명이 넘는 전사들을 거느렸을 정도로 기드온 전사단은 최고의 부흥기를 누렸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잔혹한 살인마조차도 기독교에 투신하여 회개만 하면 천당에 간다는 네 놈들의 논리……. 아무리 선한 일만 하고 산 사람일 지라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네 놈들의 논리……. 지금 저 많은 군중들을 해치려는 네 놈과, 마녀 사냥, 십자군 전쟁에 앞장 섰던 학살자들을 부추기기 위한 교단 측의 사탕발림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윈 해 본적 없는가?》

사내의 반문에 이반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해갔다. 기이한 능력을 보유한 탓에 기드온 전사단에 착출되었던 여섯 살바기 꼬맹이 시절, 그가 가장 먼저 거쳐야 했던 과정은 사상의 투철한 무장이었다. 그런 관계로 그는 29년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 순간도 기독교의 교리(敎理)에 대해 그 어떤 의문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지글로……?」

  사내의 전음은 수백미터 떨어져 있는 혼에게까지 생생히 들려 왔다. 혼은 강력한 기드온 전사를 어린애 다루듯 하는 연사가 지글로이거나 미래에서 온 그의 동료일 거라고 추측했다. 당장에라도 허공을 꿰뚫고 날아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군중들 속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드온 전사와 미래의 후손……. 아무리 기드온 전사가 막강하다고 해도 2,000년이나 더 진보한 미래인보다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군중들이 위험해 질 일도 없으리라. 

「단비야. 오빠 잠깐 좀 다녀올 테니까 꼼짝말고 여기 있어?」

「어디 갈려고?」

「그건 묻지 말고……. 잠깐이면 돼. 알았지?」

  단비가 혼의 손을 움켜쥐었다.

「싫어. 무섭단 말이야. 가지 마!」

  혼은 그녀의 손을 풀어내며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아. 이제 별 일 없을 거야. 금방 올게. 약속!」 

  그녀의 팔을 끌어 억지로 새끼 손가락을 건 혼은 군중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예수가 무대 위에 나타나 연설회를 쑥밭으로 만들자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던 군중들은 시커멓게 타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던 연사가 오히려 예수를 제압하자 이 정도 거리면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그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대부분이 H.M.L.H 회원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의 현상을 바라보는 두 부류의 집단은 상극의 반응을 보였다. H.M.L.H 회원들은 자신들을 향해 불덩어리를 쏘아댄 예수가 자신들의 지도층 인사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광경에서 박수와 환호를 보냈지만 기독교 신자들은 하염없는 눈물과 탄식을 쏟아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로이 성인들의 지구에서의 임무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과거의 과학자들에게 자신들의 선지식을 전수하여 미래의 과학력을 증진시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H.M.L.H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인류에게 신의 본질을 널리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지글로’가 첫 번째 임무의 책임자라면 오늘 공지천 연설회에서 연사로 가장해 있던‘로즈’는 두 번째 임무의 책임자였다. 그녀의 지휘 하에 28인의 로이성 전사들이 전 세계 각지에서 개최되는 H.M.L.H의 연설회를 다방면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왜 말이 없는 건가? 나 같은 적그리스도와는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섞기 싫다는 뜻인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 많은 군중들 틈에 섞여 있을 기독교도들은 극도의 실망감에 사로잡혀 창조주에게서 등을 돌릴 지도 몰랐다. 물리적인 힘의 대결에서는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교리 논쟁에서만큼은 기필코 승리를 거둬야 한다는 새로운 절대명제가 이반에게 부여된 셈이었다.

《종교전쟁이나 마녀재판에 대해서는 이미 교단 측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다. 그것은 시대가 만든 비극이었다. 그러한 시대착오적인 오류는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 책임인 것이다. 그것을 기독교도들만의 잘못으로 전가하지 말라!》

  그랬다. 종교전쟁이나 마녀재판이 기독교의 깃발 아래서 자행되긴 했지만 그건 당시 중세 사람들의 무지와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해 있던 잘못된 정서가 빚어낸 시대적인 결과물에 불과했다. 기독교가 여전히 현재까지도 세계 최대 종파로써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지만, 지구촌 어디에도 종교전쟁이나 마녀재판이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대비는 당시 사건들의 주범이 기독교가 아니라‘시대’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명백한 증거였다.        

《좋아. 백번 양보해서 종교전쟁과 마녀재판은 과거지사라고 치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평생을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온 반신론자와 평생을 자신과 자기 가족의 행복만을 위해 살아온 기독교도가 있다.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의 삶이 더 숭고한가? 둘 중 누가 구원을 받아야 하겠는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내밀라는 성경 말씀이 있다. 그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타인을 배려해서 자신을 희생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전자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삶을 살았지만 주님을 거부했기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후자는 기독교도이기는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충실해야하는 기본적인 의무를 해태했기에 역시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일부 목사나 전도사들이 단지 신도수만을 늘리기 위해서 교회에만 열심히 다니면 그 자체로 천당에 갈 수 있다는 말로 혹세무민하고 있지만 그건 잘못된 전도인 것이다. 주님에 대한 믿음은 기본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님의 뜻을 성실히 수행해야 그제서야 그 분이 재림하시는 날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을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건 절대조건이다. 주님을 믿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주님의 세상에서 살 수 있겠는가?》

《주님의 세상이라……. 그게 어디 있는 건가? 주님이라는 존재는 어디 있는 거지? 그가 진정 세상에 존재한다면 군중들 앞에 나타나 나 여기 있으니 날 믿어라 하면 그걸로 그만일 것이다. 세상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부인하려 들지 않을 것이고 모두가 그에게 구원받기 위해 그가 원하는 순진한 양으로써 살아 갈 것이다. 왜 인간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고는 그 선택을 탓한단 말인가? 이브의 손이 닿는 곳에 선악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이브가 유혹에 이끌리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렇게 행동했다하여 왈가왈부한다는 것 또한 모순아닌가?》

  이반의 목줄기를 거머쥐고 있는 로즈의 손아귀에 조금씩 조금씩 힘이 더해져갔다. 이반의 벌어진 이 사이를 비집고 신음이 세어 나왔다. 

《인류가 조화를 거역했기 때문에 재림을 한다고? 재림해서 자신의 뜻에 부합되는 인간들만을 영생의 세계로 데려간다고? 인류가 조화를 거역했다면 그것 또한 그의 의지의 결과물인 것이다. 애초에 조화를 거역하지 않도록 만들어 놨으면 되는 것 아닌가? 자기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서 그걸 빌미로 인류를 심판한다는 건 논리모순이다. 인간을 장난감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지》

《자, 장난감……?》 

《그래. 장난감! 갖고 놀다가 싫증나면 부숴버리는 그런 장난감 말이다!》

  이반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 말도 안 돼! 심심할 때 갖고 노는 장난감이라니! 그 분이 우릴 그런 용도로 만들었을 리가 없어. 그건 너희 반신론자들의 억측일 뿐이야!》

《억측? 네 놈들 주장대로 신은 존재한다고 치자. 그리고 그가 인류를 비롯한 이 세상을 만든 것도 사실이라고 가정하자. 하지만 그가 어떤 의도로 세상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무료함에 달래기 위해 인류와 세상을 만들었고, 그것도 재미없어지자 한동안 방치해 두다가 또 다른 심심풀이의 대상을 찾아냈기에 그 용도를 다한 인류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려하는 게 결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빛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우주선을 개발해낸 로이 성인들은 자신들이 버려두고 온 인류의 최후가 어떤 모습인지 몹시도 궁금했다. 타임머쉰을 이용해서 인류 최후의 날로 되돌아가보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그건 두 신들에게 잔존인류가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기에 철회되고 말았다. 그 후에 빛의 복사성을 이용한 새로운 제안이 상정됐다.

  우리가 눈을 통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빛의 복사성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지나온 빛은 그것들의 모습을 담아 무수히 많은 조각으로 산란되는데 그 빛이 싣고 있는 정보를 우리의 망막이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그 사물이나 현상들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빛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우주선을 개발해낸다면 시간여행도 가능할 수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도 바로 이런 빛의 복사성을 고려하여 정립된 것이다. 과거의 정보를 담은 빛이 지나는 길목에 먼저 가서 기다리면 비록 과거로 향한 일방통행이긴 해도 어쨌든 시간여행은 가능케 되는 것이다.

  타임머쉰을 이용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실체적으로 함께 공존하게 됨을 의미한다. 현재가 과거에, 반대로 과거가 현재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두 신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까마득한 미래에서 시간터널을 지나온 로이성인들을 감지해낼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단지 관찰만 할 수 있을 뿐 현재가 과거에, 과거가 현재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빛에 담긴 과거는 그저 TV프로그램이나 영화처럼 실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신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노출시킬 염려가 조금도 없는 이 방법이 채택되었다.     

  지구인들의 최후를 담은 빛을 추적하는데 성공한 로이성인들은 그 장면을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하듯 저장해뒀다. 로즈 역시 이 임무에 투여되기 전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자비하게 인간들을 학살하던 두 신의 광기에 젖은 눈동자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대답하지 못 하거나, 니 논리에 확신이 느껴지지 않으면 널 죽일 것이다. 어서 대답하라. 무슨 근거로 너의 신이 절대선임을 확신할 수 있는 건지 대답을 해보란 말이다!》   

  로즈의 두 눈은 어느새 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이반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손에 그녀의 모든 에너지가 집결됐다. 순간 사시나무 떨 듯 공포에 질려 있던 이반의 몸이 굉음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 그의 육신의 퍄편들이 파란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오, 마이 갓……」

「오, 마이 지저스……」

  군중들 속에서 탄식과 절규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울음소리는“Human must love only Human!"을 외쳐대는 인류애주의자들의 연호 속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혼은 그들의 외침을 비집고 무대 뒤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로즈의 뇌파에 맞춰 전음을 보냈다.

《너 지글로 맞지?》

  끓어 오르는 분노에 가득차 있던 로즈의 두 눈이 다시금 이성을 되찾아갔다. 발 밑에서 자신을 올려보고 있는 혼을 내려보며 로즈가 반문했다. 

《지글로를 아시나요?》

《지글로가 아닌가보군》

《전 로즈라고 해요. 지글로의 오랜 친구죠》

《이쪽으로 내려와. 잠깐 얘기 좀 하자구!》

  무대 위 50여 미터 상공에 멈춰 있던 로즈가 서서히 고도를 낮춰 혼의 앞에 내려 섰다. 40대 중반 사내로 변신해 있던 그녀의 모습이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유 혼님이신가 보군요. 지글로에게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로즈는 그 옛날 중세 시대 기사들이 왕 앞에 예의를 갖추는 것마냥 한쪽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지글로의 보고를 받은 늘 푸른 공주는 혼을 데쟈뷰 호에 탑승시킬 것을 제안했었다. 그의 지극한 인류애 정신을 로이 성인들에게 본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즉 혼은 로이 성인들의 최초 선조가 되는 셈이었다.

「부담되게 왜 이래? 오바하지 말라고」

  혼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 친구의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혼님은 저뿐 아니라 저희 모든 로이인들에게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십니다」

「나뿐 아니라 누구라도 그 상황에선 그랬을 거야. 별 것도 아닌 것 같고 쑥스럽게시리……. 그만 일어나!」

  더 이상의 예의는 혼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로즈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165센티미터 정도의 아담한 키에 깡마른 몸매. 이렇게 왜소한 몸에 그토록 강력한 파워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혼은 믿기지가 않았다.

「지글로는 어때? 괜찮아?」

「네. 혼님 덕분에요」

「녀석은 어디 있어?」

「아마 1600년대의 페르마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을 겁니다」

「페르마?」

  수학을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수학자였으나 여러 방면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겨 17세기 최고의 수학자로 거론되는‘페르마’는 근대의 정수 이론 및 확률론의 창시자이자 좌표기하학을 확립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으며 후에‘아이삭 뉴턴(Issac Newton)’이 미적분학에 응용하였던 극대값과 극소값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그는 1621년에 디오판투스의 저서『산수론(Arithmetica)』을 읽던 중 책의 여백에‘등식 xⁿ+ yⁿ= zⁿ은 n이 2보다 크면 성립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의 증명 방법을 발견했지만, 여백이 너무 좁아 기술하지 못한다’라고 적어놨고 그 기록은 그가 죽은 뒤 한 독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무려 3세기 동안 그의 기술을 입증하기 위해 당대의 위대한 수학자들과 아마추어 수학자들이 달려 들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진 못했고 이 명제를 증명하는데 평생을 바친 어떤 수학자는 페르마가 허풍을 떨었다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컴퓨터의 발명으로 인해 페르마의 정리는 n=150,000까지 증명되었고, 1993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의 수학 교수였던 앤드루 와일즈(Andrew Wiles)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자인 많은 청중 앞에서 연역법을 이용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했다. 몇몇 학자들은 와일즈의 연역법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사이먼 코헨(Simon Kochen)이 지도한 프린스턴 대학 연구팀이 200쪽 분량의 이 발표문을 1년 이상 검산한 결과 와일즈의 증명이 옳다는 것이 확인됐다. 페르마가 죽은지 329년 뒤의 일이었다.

「서, 설마 xⁿ+ yⁿ= zⁿ등식의 비밀을 알려주러 간 건가?」

「혼님도 알고 계신 것보니까 벌써 알려줬나보군요」

「무, 무슨 소리야? 난 이미 10여 년 전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전해 들었다고! 지글로가 페르마를 만나러 간 건 오늘이라면서?」

  어리둥절해 하는 혼의 표정이 꼭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 보였다. 로즈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살짝 웃음을 지었다.

「지글로가 페르마를 만나러 간 건 오늘이지만 1620년대의 페르마를 만난 거에요. 그때의 과거가 바뀌었으니까 혼님이 계신 지금도 바뀌는 게 당연한 거죠. 혼님은 당연히 바뀐 현재를 기억하고 계실 수 밖에 없고요」

「그, 그럼…… 만약 오늘 지글로가 페르마를 만나지 않았다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해서 난 들은 적도, 본 적도 없게 되는 건가?」

「후후. 그랬겠죠?」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소양호 주변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녀석이 지글로를 만났을 때 맛 보았을 극심한 혼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를 로이성인들은 타고나기라도 한 걸까. 그들과 말 몇마디만 섞으면 머릿 속에 지진이 나니 원…….

「또 너희들이 바꾼 과거는 어떤 게 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

「여러가지가 있죠. 그 중 몇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뭔가를 기억해내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로즈가 생각났다는 듯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파티마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의 세 가지 예언……. 혼님도 알고 계시죠?」


  1916년 포르투갈은 1차세계대전 참전과 반기독교적인 정부 수립 등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작은 시골 마을‘파티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 해 5월 어느 날 루치아, 프란시스코, 그리고 히야신타라는 세 명의 어린이들이 양을 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그들이 폭풍우를 피할 장소를 찾고 있을 때 동쪽에서 이상한 둥근 빛덩어리가 다가와 그들로부터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멈춰섰다. 그리고는 그 빛은 이내 투명한 미소년으로 변했다. 소년은 자신을 '평화의 천사'라고 밝히고 같이 기도하자고 했다. 세 아이들은 곧 일종의 최면상태에 빠져들었고 그가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그런 상태는 지속됐고 아이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 그 존재와의 만남을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했다.

    1917년 5월 13일, 여느 때처럼 양을 치고 있던 세 아이들 주변을 파란 색 빛무리가 휘감으며 느닷없이 번개가 번뜩였다. 우기(雨氣)를 느낀 아이들은 유사시에 비를 피하던 '코바 다 이리아'(Cova da Iria)로 급히 달려갔다. 여기서 그들은 0.9미터 정도 높이의 수풀 바로 위로 '빛나는 구'(光球)가 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 '빛나는 구' 중앙에는 수심에 찬 얼굴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광구는 차차 커지기 시작하더니 지름 1.5미터 정도 크기로 그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녀는 1미터 10센티 정도의 키에 15세쯤 되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폭이 좁은 스커트와 재킷, 망토를 걸치고 있었으며 손에는 둥근 물체를 들고 있었다. 얼굴 표정의 변화나 입술의 움직임이 없었고 그저 간혹 손을 아래위로 움직일 뿐이었다. 세 아이는 이 여성의 출현에 커다란 기쁨과 평화를 느꼈다.

    이 빛의 여인은 자신을 하늘나라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그녀는 세 아이에게 세계 제 1차 대전이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을 권유한 후, 앞으로 5개월 동안 매월 13일마다 나타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나서 걸음도 걷지 않고 무릎을 편 채 미끄러지듯 움직여서 동쪽으로 둥둥 떠갔다. 이때 그쪽 나뭇가지 위로 바람 방향에 거슬러서 구름 덩어리가 다가오더니 그녀 위에서 깔때기 모양의 광선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구름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이동하다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구름도 지평선 저 멀리로 사라졌다.

    세 아이 중 히야신타는 비밀로 하기로 맹세했던 약속을 잊고 그만 이 사실을 가족에게 발설하고 말았다. 프란시스코와 히야신타의 부모는 빛나는 여성이 사용했다는 어려운 어휘들을 이 남매들이 반복해서 말한다는 사실에 그들의 얘기가 결코 허황된 장난이 아님을 확신했다. 하지만 루치아는 신경질적인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조롱과 질책을 감내해야 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세 아이들이 빛의 여성과 만나기로 한 날에 점차로 많은 사람들이 '코바 다 이리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들로부터 방해받는 것을 싫어했고 모여드는 군중들로부터 격리되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성의 세 번째 출현 날까지 몰려든 사람들은 2천5백여 명을 넘어섰다.

    세 아이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빛의 여인을 보거나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벌이 붕붕거리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으며 또한 몇몇은 태양 빛이 이상스럽게 침침해지고, 작은 나무가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에 의해서 눌리는 듯 가지 끝이 휘는 현상을 목격했다. 또 몇몇은 세 아이가 황홀경에 빠져 들어갈 때 '작은 구름'이 나무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7월 13일, 빛나는 여인은 10월 13일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있도록 하늘에 기적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서 곧 1차세계대전이 끝날 거라는 예언을 남겼다. 그러자 아이 중 하나가 그럼 더 이상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거냐고 묻자 20년쯤 후에 두 번째 세계대전이 발발할 거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직 로마 교황에게만 알려야 할 이른바 '파티마의 제 3의 예언'을 아이들에게 일러주었다.

    8월로 접어들면서 성모 현현에 대한 소문은 포르투갈 전역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신문과 잡지들은 많은 지면을 이 광란적 현상을 다소 비꼬는 투의 논조로 보도했다. 하지만 카톨릭계 언론들은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이즈음 히야신타는 전쟁에 대한 환영을 보기 시작했다. 매스컴은 이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를 계속했고, 마침내 당국에서 이 논쟁에 끼여들어 마을의 평화를 깨뜨린 죄목으로 8월 11일 세 아이들을 재판대에 세웠다. 루치아는 재판정에서의 질문에 불응했으며 관람객들의 비웃음을 무시하는 대범하고도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법정은 아이들에게 성모의 '비밀 메시지'를 털어놓지 않으면 감옥에 보내겠다는 협박으로 구슬러 보았지만 세 아이는 성모와의 약속을 깨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단언했다.

    빛의 여인과 네 번째로 만나기로 약속한 날, 파티마의 시장이 아이들을 몰래 납치해 공갈 협박을 가했지만 이들 세명 모두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서도 8월 13일엔 6,000명을 헤아리는 관중들이 '코바 다 이리아'에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낮게 울리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끝내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또한 한차례 번쩍 하는 광선을 목격했고, 작은 구름이 동쪽으로부터 다가와 상록수 꼭대기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9월 13일에도 4만여 명의 사람들이 '코바 다 이리아'에 빽빽이 몰려들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공 모양의 번쩍이는 물체가 동쪽에서 서쪽에서 서서히 미끄러지듯 움직이다가 갑자기 굉장한 빛을 내며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9월 13일의 목격자들 중에는 카톨릭 사제들도 몇몇 끼여 있었는데, 그들은 전 세계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사건의 진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참석했다.

   공중을 나는 신비로운 여인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0월 13일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이 될 이 놀라운 천녀(天女)의 '이피퍼니'(Epiphany; 신시현)를 보기 위해서 기자, 교수, 성직자를 비롯한 7만여 군중이 파티마로 몰려들었다.

    루치아와 그의 사촌들이 동쪽 하늘을 주시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 천상에서 온 방문자는 이전처럼 빛과 함께 빠른 속도로 날아와서 카라스케이라 나무 그루터기에 멈췄다. 이때도 루치아를 비롯한 세 아이의 눈에만 그녀가 보였을 뿐 군중들은 그녀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이 날 여인은 '파티마 제 3의 예언'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알려줬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로사리오의 부인'(Lady of Rosary, 즉 마리아)이라고 밝힌 후 파란 오로라에 휩싸여 동편 하늘로 천천히 날아갔다. 이때 루치아는 하늘을 바라보며 부지불식간에 태양을 보라고 소리쳤으며, 7만 관중들은 기적과도 같은 빛의 향연을 목격할 수 있었다.

    짙은 잿빛 구름이 흩어지면서 생긴 넓은 공간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은빛 소용돌이 같은 태양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후 태양은 그 모양을 바꾸어 축을 중심으로 급히 회전하며 온 천지에 빛을 방사했다. 이렇게 돌고 있는 태양의 가장자리에서 한줄기 붉은 광선이 뿜여져 지상을 비추었다. 이 붉은 빛은 다시 보라, 파랑, 노랑, 그 밖의 무지개 색으로 계속 변화하면서 땅 아래에 있는 물체들을 기괴한 빛깔로 물들였다. 7만 군중은 상기된 얼굴로 색색으로 빛을 발하며 태양의 기적에 넋이 나간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태양을 직접 올려다 보았지만 그 누구도 시각적 고통이나 손상을 입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소용돌이 모양을 한 빛의 덩어리는 흰색이나 은빛을 띠고 있었고, 완전한 구가 아닌 원반에 가까운 모습을 한 채 강한 빛과 뜨거운 열을 발산했다. 그것은 약 2, 3분 동안 끊임없이 회전을 하며 여러 빛깔의 광선을 쏟아냈다. 그러다가 별안간 회전을 멈추고는 구름이 열린 틈으로 요동치며 떠돌았다. 태양은 이런 빛의 파노라마를 몇 차례 더 반복한 후 서서히 하강하더니 갑자기 땅을 향해 지그재그 모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파티마는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타는 듯한 열을 내뿜으며 땅으로 추락하는 태양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올려다 보았다. 그들은 자신을 향해 쇄도해 오고 있는 태양에 부딪쳐 압사당하거나 타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공포와 고통의 울부짖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으며, 군중들은 진흙땅에 무릎을 꿇었다. 군중은 눈물과 함께 자신의 죄를 용서받으려는 고해성사로 분주했다. 도처에서 하늘을 향하여 성모 마리아에게 간절한 기도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공포가 극에 달했을 때, 떨어지던 태양은 정지했고 다시 빠르게 갈지(之)를 그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리곤 어느 지점에 정지하더니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태양으로 뒤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더 이상 눈이 부셔 태양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코바 다 이리아'에 모인 무신론자, 회의론자, 진보적인 신문 기자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은 흥분에 가득차 이 현상에 대해 토론했다. 세부 사항을 묘사할 땐 서로 이런저런 차이를 보였지만, 태양의 회전과 하강에 있어서는 모두 동일하게 진술했다. 빽빽이 둘러싼 사람들의 표정 속엔 놀라움, 흥분과 함께 기쁨과 감사의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코바 다 이리아'를 중심으로 남북에 걸친 약 70여 미터 부근에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비에 흠뻑 젖어 있던 옷이 말라있었다는 점이다. 태양의 춤이 계속되는 동안 모든 사람의 몸은 젖어 있었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떨어지는 태양의 강렬한 열기가 짧은 시간에 젖어 있는 옷을 말려버렸던 것일까? 실제로 그 부근에 위치한 사람들은 태양이 현란하게 춤추던 그 순간 강렬한 열기를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 병자들에겐 오랜 질병이 말끔히 쾌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직접 이 사건을 취재한 리스본의 일간지 '오 세쿨로'(O Seculo)의 편집자는「충격의 현상 : 파티마의 하늘에서 태양이 어떻게 춤을 추었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바티칸에서도 파견된 사람들은 눈 앞에서 펼쳐진 꿈과도 같은 기적을 자신들이 목격한 그대로를 교황에게 보고하였고 교황청은 파티마를 성지로 선포했다. 그러한 선포는 파티마에 출현했던 여인이 성모 마리아였다는 것과 그 모든 현상들은 단순한 집단 최면이 아닌, 마리아가 연출한 기적이었음을 전 세계 만방에 공인한 것이었다.  

  루치아를 제외한 두 아이는 마리아가 얘기했던 것처럼 감기에 걸려 곧 세상을 등졌다. 루치아는 성모 마리아와의 약속대로 교황에게만 세 번째 예언을 알렸고 교황은 매스컴의 끊임없는 공방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함구했다. 그렇게 83년 동안이나 철저히 극비리에 붙여 왔던 파티마의 제 3 예언은 21세기에 들어서 드디어 외부에 공개되었다.  

  2000년 5월 13일, 안젤로 소다노 바티칸 국무장관은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거행된 옥외 특별 미사에서 이른바「파티마의 제 3 예언」의 내용을 발표했다. 그것은 바로 교황의 암살기도에 대한 예시였다고 그는 밝혔다.

  하지만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나 인류의 종말과 같은 어마어마한 사건을 예측하고 있었던 세인들은 그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2번째 예언이 세계 2차 대전에 관한 것이므로 마지막 예언은 그것보다 훨씬 더 강도가 큰 것이어야 자연스럽지 않냐는 게 그들의 논거였다. 만약 마리아의 마지막 예언이 교황청에서 밝힌 대로 지극히 교황 개인에게 국한된 사안이었다면 마리아가 그것을 제일 마지막에 보여줬을 리 없으며, 또한 굳이 철저한 비밀을 요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주장이었다. 이 같은 공표는 단순히 마지막 계시의 공개를 요구하는 세인들의 갖가지 압력을 잠재우기 위한 바티칸의 속임수라며 그들은 반박했다. 하지만‘요제프 라징거’추기경은 이날 발표에서 파티마의 제 3 예언에 대한 교황청의 해석에 대해“어떠한 엄청난 비밀도 나오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며 그들의 의문을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아이들이 본 모습 중 천사가 불타는 칼을 들고 있는 장면을 인용하면서 매우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아이들이 본 장면은 세계에 드리워진 심판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지만, 미래는 결코 확정되어져 있는 것은 아니며 어린이들이 본 미래는 우리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고 부언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부언설명은 마지막 예언이 천사들을 앞세운 창조주의 인류학살을 묘사하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교황청은 마지막 예언을 세인들의 관심 저편에 묻어 버리기 위한 희대의 사기극을 펼쳤지만 한 추기경으로 인해 오히려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만천하에 고하고 만 셈이 되었다.


   「그, 그게 너희들 작품이었단 말이야?」

   「네. 제가 직접 성모 마리아 역을 맡았죠」

   「춤추는 태양은 너희들의 우주선이었고?」

   「후후. 네. 이해력이 아주 빠르시군요」

    거의 백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파티마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에 대한 논란은 현대인들게도 지대한 관심거리로 남아 있었다. 특히 제 3의 예언은 수백 권의 책과 수천 개의 인터넷 싸이트를 탄생시켰을 정도로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세상의 온갖 신비현상에 지대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혼 역시 파티마의 제 3 예언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나름대로 진단해 보곤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들의 프로젝트였다니.

   「너희들은 반신론자들이잖아. 근데 왜 하필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나타난 거지?」  

   「기독교의 팽창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죠. 일단 저희들의 존재를 철저히 은폐시키면서 그들의 수뇌부를 혼란케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성배(聖拜)하고 추앙(推仰)하는 마리아가 제격이었죠. 그 사건은 지난 백년 간 교단을 소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죠」  

   「아이들에게 보여준 세 번째 계시는 어떤 거였지?」

   「요제프가 말한 대로에요. 불타는 칼을 치켜 든 천사들이 인류를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모습이었죠. 그 뒤에 팔짱을 낀 창조주가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 그래서 바티칸은 마지막 계시를 공개할 수가 없었던 거죠. 천사들은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육을 해댔으니까요」 

「5개월 후에 있을 장면들을 조금 각색해서 보여준 셈이군」

「결국 교황청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파티마를 성지로 지정한 것은 참으로 멍청한 배팅이었군. 그로 인해 세인들의 관심이 바티칸으로 집중됐고 결국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됐으니까 말야」  

「스스로 호랑이 굴 속으로 뛰어든 여우 꼴이 된 셈이죠」

「푸하하하……. 훌륭해. 아주 훌륭해」

  혼은 통쾌하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까마득한 선조로부터 칭찬을 받은 로즈는 홍조 띤 얼굴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또 어떤게 있지? 하나만 더 얘기……」

  신이 난 로즈는 혼의 요청이 미처 끝을 맺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저희가 관여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불교라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에요」

  혼은 휘둥그런 눈으로 로즈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부다는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에요. 지글로가 주연을 맡은 가상의 인물이죠」

「왜, 왜 그런 연출이 필요했던 거지?」

「기독교와 같은 유신론 사상이 모든 인류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죠. 불교는 세계 최대 종교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지만 신을 믿는 종교는 아니잖아요? 자기 자신 스스로를 믿는 종교죠. 인간 외부에서 구원을 찾는 게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진리를 구하는……, 쉽게 얘기해서 철저히 인류애적이면서 반신주의적인 종교죠」

  혼은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 맞은 것 같은 아뜩함에 사로잡혔다. 그랬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들이 한결 같이 그 존재여부조차 증명할 수 없는‘신’이라는 불확실한 대상을 조건 없이 믿고 따름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유신론 사상을 세뇌시키고 있지만 불교만은 그렇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를 인간 외면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게 복종함으로써 구걸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아성찰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의 세계에서 그 해답을 탐구해 내도록 안내하는 유일무이한 종교가 바로 불교인 것이었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혼은 불교가 인간들이 만든 여타 종교들과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닳을 수 있었다. 창조주가 아닌 철저히 인간 자신에게 귀의하는 종교. 그런 종교는 오로지 불교 밖에 없을 거라는 확신이 그를 사로잡았다.

  우주선이 달나라를 정복한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현대인들조차도 자신들의 모든 문제의 해답을 외부에서만 찾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미신과 신화가 판을 치던 수 천 년전의 미개인들이 어찌 자신 안의 소우주를 들여다 볼 생각을 했을까? 또 부족과 민족이라는 당시 시대에서는 절대적인 카테고리를 초월하여 그런 사상을 주변 부족과 민족에게까지 설파하고 뿌리내리게 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말대로 로이 성인들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그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십자군전쟁이나 마녀재판만 하더라도 수백만의 이종교인들에 대한 잔혹한 학살이라는 결과를 잉태하지 않았는가? 그건 중세와 근대에 거쳐 자행된 일로써 불과 몇 세기 전까지 지속되어져 왔던 일이었다.   

「저희가 수 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불교를 뿌리내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요? H.M.L.H 같은 인류애주의자들은커녕 무신론자조차 찾아 보기 힘들 걸요?」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다. 만약 불교가 태동하지 않았다면 아시아 대륙 역시 유신론 사상을 담고 있는 다른 종교가 부동의 위치에 서기 위해 종교전쟁과 마녀사냥을 답습했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서양에까지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기독교도들과의 대륙간 종교 전쟁까지 치뤘을 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전 세계인들은 대륙별로 몇몇 특정한 유신론 사상에 젖어 서로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학살해 댔겠지.

  자신들이 믿는 신을 강요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도륙하는 끔찍한 장면들을 머리 속에 연상하던 혼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비극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혼은 로이 성인들의 혜안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5개월 후면 지구에 남아 있는 모든 인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텐데 굳이 불교를 전파하고 파티마의 제 3 예언을 남기는 등, 유신론 사상의 인류 지배를 견제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의 그런 의문을 읽은 로즈가 질문도 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입자 분해기를 사용해서 신을 제압해 보려는 저희의 의도는 지글로에게 이미 들어서 잘 알고 계실 거에요. 입체분해파의 발사 속도를 극대화시키면 그를 합체불가능으로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출발한 발상이죠. 하지만 그런 시도는 어쩌면 단순히 저희들의 희망에 그칠지도 몰라요. 그래서 저희들은 대안을 준비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죠. 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검증절차를 거치지 못한 채 바로 실전에서 사용해야하기 때문에 장담할 수가 없는 상태에요. 성공할 거라는 그 어떤 보장도 할 수가 없죠. 만약 실패하게 된다면…… 우리 인류의 운명은 종지부를 찍게 될 거에요. 더 이상 이 광활한 우주 그 어디에서도 인간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죠」 

로즈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엔 엷은 미소가 어려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피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혼은 이를 악물었다. 만약 인류가 불량품이라면 그 책임은 인류를 잘못 빚어낸 창조주 자신의 몫이 아닌가? 인간세상에서도 불량품은 환수해 다시 쓸 수 있도록 수리를 하거늘, 하물며 생명을 갖지 못한 공산품에게도 정성을 다 하는 게 우리 인간이거늘 어찌 목숨을 갖고 있고 이성을 갖고 있는 생명체를 자기 멋대로 폐기처분하려 든단 말인가? 창조한 것도 자기 마음대로였으니까 폐기 또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인가?

  혼은 18살 이후 처음으로 살의를 느꼈다. 며칠 전 지글로에게 살의를 느꼈던 기억은 있었지만 그건 자신이 아니라 소양호 주변에 잠들어 있는 또 다른 자신이었다.

  비록 그 살의의 대상은 2,000년이나 진보한 과학력을 가진 로이성인들도 어쩌지 못하는 전지전능의 존재였지만, 만약 지금 이 순간 마주하고 있다면 죽기살기로 덤볐을 것이었다. 설사 그에게 두 팔과 두 다리가 잘려 나간다 하더라도, 지렁이처럼 꿈틀거릴 수만 있다면 숨통이 끊어져 나가기 전까지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이글거리는 분노가 혼의 심장을 송두리째 삼켜버리기 직전, 로즈가 말을 이었다.

「저희가 준비한 그 모든 대안이 전혀 먹혀들지 않을 때……,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요?」

「글쎄……」

  혼은 잠시 고개를 떨궜다. 과연 그 순간에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의외로 해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 더러운 손에 최후를 맞느니 혀를 물고 자살을 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질문의 요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인류의 종말을 막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 그 순간 과연 그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섹스? 아니면 음주가무? 그런 것말고 무엇이 더 있을까? 한참을 생각해 봐도 혼은 해답을 구할 수 없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가 말했다.

「그 모든 게 다 꿈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지? 아주 끔찍하고 더러운 악몽이길 바라는 수밖에……」

「바로 그거에요!」

  로즈의 음성은 약간 들떠 있었다. 모든 게 꿈이길 바라는 인류의 기대가 신의 저주를 피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일까? 혼은 고개를 들어 로즈를 바라봤다.   

「그 모든 게 꿈이길 바라는 거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단지 그 것뿐이죠!」 

「그런 멍청한 대답이 어딨어? 짐 나랑 한가하게 우문우답하자는 거야? 난 또 최후의 보루가 남아 있다고. 된장!」

  실망한 혼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로즈에게서 시선을 거둬 들였다.   

「이런 얘기 들어 보셨어요?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신을 창조한 걸지도 모른다는……」  

  로즈의 질문은 땅으로 향하던 혼의 시선을 다시금 그녀에게로 이끌었다.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존재죠. 그나마 두뇌가 많이 발달하기 전의 인류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 육체적으로도 너무 보잘것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자기 방어를 위해 부족 단위로 한데 모여 살 수밖에 없었죠. 한 마디로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원래 사교성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개체들에 비해 너무나 나약했기 때문이었어요」

「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고 요점만 얘기해봐」   

「바로 그 나약함이 문제였죠. 그런 나약함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이어졌으니까. 그리고 그런 불만과 불신은 모든 고난의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도록 부추겼죠. 그래서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 같은 미신이 탄생했고 부족 단위가 민족 단위로, 민족 단위가 고대 국가로 발전해 가면서 그것들 또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기독교나 힌두교, 이슬람교로 등으로 발전한 거죠」

「지글로, 그 놈은 수학강의를 하려고 뎀벼 들더니만, 넌 종교사 강의를 할 셈인거야? 내가 짐 조금 바쁘걸랑? 수학은 워낙에 쥐약이지만 종교사라면 나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으니까 웬만한 건 생략하고 넘어가자구!」

  생전 보도 듣도 못한 낯선 공포감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단비의 얼굴이 로즈의 얼굴 위에 오버랩(Over Rap)됐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녀는 행여 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런 혼의 마음을 읽은 로즈가 말했다.

「얘기가 길거든요? 오늘은 이만 할까요?」   

「컹. 언제 또 볼 수 있을 거라고 다음을 기약하냐?」

「후후. 제가 찾아뵐게요」

「언제?」

「조만간요」

  혼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이면 내일이고 1년 후면 1년 후지. 조만간이 뭐야, 조만간이?」

「저희 쪽 일이 내일을 장담을 할 수가 없는 일이라……. 오늘 밤 당장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사탄성 전사들 말이야?」

「네. 정말 무시무시한 존재들이죠. 오로지 파괴만을 위해서 태어난 살인마들이에요」

  로즈의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런 로즈를 바라보며 혼은 사탄성 전사들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강렬한 적개심에 사로잡혔다.

「좋았어……. 신 대신 그 놈들이라도 때려줘야겠군!」

  그저 농담일 거라고 받아들인 로즈의 입가에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곧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본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맙소사……. 혼님은 아직 그들을 몰라요. 부탁드리는데 행여 그런 상상은 하지도 말아 주세요」

  그건 결코 혼을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그녀의 마음을 혼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신이라도 당장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고 싶은 마음 간절한 혼에게 사탄성인들 따윈 그 어떤 두려움의 대상도 될 수 없었다. 물론 그들과 마주치는 날이 자신의 제삿날이 될 게 뻔하지만 그래도 혼은 그들과 상면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염원했다. 비록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따끔한 충고 몇 마디는 꼭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내일 저녁에 찾아 뵐게요. 못다하신 질문의 대답은 그 때 들려 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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