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Up

정병철 |2009.08.11 11:38
조회 87 |추천 0

삶이라는 여행. 여행이라는 꿈. 꿈이라는 약속. 약속이라는 삶.

함께 떠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결국 홀로 남게 된 자는 이제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 미지의 환상적인 세계로 데려가주겠다던 어린 시절의 약속을 세월 속에 흘려 보내고 만 사람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앞에서 무엇을 결심할 수 있을까. 그는 다시 꿈꿀 수 있을까. 꿈을 향해 이제라도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까...

 

칼은 아내 엘리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 꿈꾸던 남미의 파라다이스 폭포에 끝내 가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크게 상심한다.

궁리 끝에 칼은 그들이 수십년간 살아온 집에 수많은 풍선을 매달아 공중에 띄우는 데 성공한다. 본격적으로 파라다이스 폭포로 가려던 칼은 이웃의 여덟살 소년 러셀이 집 근처에서 서성이다가 우연히 그 여행에 합류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픽사의 열 번째 애니메이션이면서 첫 번째 3-D 애니메이션이기도 한 ‘업’은 꿈과 모험이라는 애니메이션 본유의 영역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다. 괴팍한 노인과 호기심 많은 소년이 말하는 개와 거대한 희귀새를 만나 신비의 폭포를 향해 가는 이 여정은 러셀의 천진무구한 행동에서 근력 약한 노인들이 아픈 허리를 잡아가며 싸우는 액션까지, 기분 좋은 유머를 시종 잃지 않아 관객을 즐겁게 한다.

3-D 상영관을 선택하면 풍선에 매달린 집이 비행하는 장면이나 하늘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 액션 장면에서 입체영화의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도 있다.

 

‘업’의 캐릭터 디자인은 캐리커처에 가깝다.

3등신에 가깝게 머리를 크게 그림으로써 만화적이고 정감 어린 인물의 느낌을 강조하는 대신, 배경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력으로 생생히 살려냈다. ‘월-E’에서 사각형의 월-E와 타원형의 이브를 대조시켰던 픽사의 애니메이터들은 ‘업’에서도 각진 외모를 강조한 칼과 둥그스름한 러셀을 대비시킴으로써 흥미를 배가한다.

수없이 많은 풍선들이 일시에 부푼 후 마침내 집이 두둥실 천천히 떠올라 비행할 때의 그 우아한 리듬은 빠르게 휘몰아치기만 하는 오늘의 허다한 오락영화들이 결코 체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서정적이면서 내향적인 음악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에 절묘하게 어울린다. 세상을 떠나 그 여행에 동행할 수 없었던 엘리는 반복되는 테마 음악을 통해 강력하게 상기됨으로써 그 여정에 이명으로 내내 함께 한다.

 

하지만 ‘업’은 무엇보다 픽사가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 창작 집단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장 쉽고도 고전적인 화술로 마음의 우물을 가장 깊게 휘젓는 이 걸작은 어느 순간에 이야기의 태엽을 감아야 하고, 언제 리타르단도와 액센트를 구사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결국 ‘업’이 그려내려는 세계는 무수한 풍선을 매달고서 창공에 둥실 떠있는 작은 목조 이층집의 이미지에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날아가고 싶어하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소망이 가장 화려한 색들을 지닌 풍선의 도움으로 날개를 활짝 펴면서도, 삶을 지탱하게 만들었던 소중한 기억 역시 낡은 집에 여전히 편안하게 깃들어 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추억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꿈이 함께 하는 이 특별한 여행은 머무르면서 떠나는 역설을 풍선에 매달린 집으로 선명하게 시각화한다.

 

이 영화는 시종 유쾌하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극의 초반부와 말미에서 강력하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두 차례의 장면이다. 칼과 엘리가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부터 늙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늙은 남편이 홀로 파란 풍선을 들고 귀가하는 순간까지를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4분 가량으로 압축한 초반 시퀀스는 아마도 픽사가 이제껏 만들어낸 모든 장면들 중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잔상을 남기는 명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다 이룬 것 같은 후반부의 어느 지점에서, 안락의자에 앉은 칼이 노트를 넘기다가 맨 뒷장에서 발견하게 되는 문장은 감동과 용기를 끝내 함께 안기며 정화(淨化)와 고양의 순간을 빚는다.

 

괴팍한 늙은이와 아시아계 소년, 말하는 개와 초콜릿을 좋아하는 열대 새, 게다가 풍선을 동력으로 하늘을 나는 집이라니..

<업>의 주인공은 제2의 청춘이라는 60살마저 훌쩍 넘긴 78살 노인 칼 프레드릭슨.

입술을 일자로 다문 이 무뚝뚝한 노인네의 남아메리카 탐험 여행을 놓고 우려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도리어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누구인가?디즈니보다 창조적이고, 드림웍스보다 유려한 영화들을 보란 듯이 내놓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 아닌가.

천개의 풍선들이 저택을 끌어당기며 힘차게 솟구치면 우리의 마음 역시 픽사의 마법에 빠진 채 도리없이 하늘로 솟구친다. 애니메이션사상 최초로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선택받은 비범한 영화, 픽사의 열 번째 애니메이션 <업>이다.

 

 

★★★★★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