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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안보-광복 64주년의 의미

개구장이 |2009.08.22 14:21
조회 116 |추천 0
시사안보-광복 64주년의 의미광복은 선열들의 값진 희생의 결과 
오는 8월 15일은 광복 64주년 기념일이자 대한민국 정부수립 61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에게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혔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은 후 1910년에는 강압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여 35년간 갖은 핍박을 하였다.

나라를 잃은 슬픔과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우리말과 우리글 사용금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식량·물자공출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의 국민들은 모든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한 채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당시의 우리 국민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등 독립을 위한 저항운동을 쉴 새 없이 펼쳐 나갔다. 특히 항일 독립투사들의 국내외 의거, 3·1운동, 항일 학생운동 등을 전개하는 가운데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Ⅰ.고종황제, 을사늑약 반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일제의 통감부 설치를 결정한 을사늑약 체결 당시 서울 주재 독일공사가 조약의 강제성을 본국에 보고한 문서가 처음 발견되었다. 1905년 11월 20일 독일공사 잘데른(Saldern)이 보낸 보고서는 ‘고종황제는 끝까지 조약에 반대하는 확고한 입장’을 전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으며,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복사·정리한 1만8000쪽 분량의 한국 관련 독일 외교문서 중 정상수 명지대 연구교수가 최근 찾아낸 것이다.

12쪽 분량의 ‘잘데른 보고서’는 “일본 관리와 개인은 가장 악랄하고 가증스러운 방법으로 한국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면서 “궁전은 일본 군인과 헌병에 의해 에워싸여 있었고 국새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일본 군인이 개입했다”고 썼다.정상수 연구교수는 “잘데른 보고서는 을사늑약에 고종의 승인이 없었다는 점과 일본의 강제성을 강조한 첫 외교보고서로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고 있다.

Ⅱ강제 군대해산과 저항

1907년 8월 1일 오전 11시 동대문 밖 훈련원에서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그날 아침 맨손 훈련을 한다고 소집해 놓고 군부협판 한진창이 새로 왕위에 오른 순종황제의 군대해산 소칙을 낭독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계급장을 떼고 약간의 돈 몇 푼을 쥐어주고 해산시켰다. 해산당한 군인들은 지금의 종로와 을지로로 걸어 나오면서 그 수치스러운 돈을 땅바닥에 던지면서 백성들과 함께 대성통곡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황실근위 시위대 제1대대장으로 국가보위와 황실보호 업무를 수행하던 박승환 참령은 격분해 자결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이것이 그분의 처절한 유언이었다.격분한 우리 군인들이 무기고를 열고 무장하여 그 당시 숭례문 밖에 있던 일본군대에 쳐들어갔다.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격을 가하여 그 자리에서 78명이 전사했다. 결국 한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막강한 화력을 동원해 공격했고 탄약이 떨어진 한국군은 백병전을 감행하면서 최후의 항전을 계속했지만 패하고 말았다. 결국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되고 해산된 군인들은 국내외 각지로 흩어져 의병이 되었다.

Ⅲ.잊지 말자 경술국치의 그날

일제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의 시대상황을 일컫는 말은 경술국치, 국권피탈, 일제강점 등으로 표현한다. 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를 3대 통감으로 임명, 한국 식민화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그해 6월에는 각서를 교환하여 종래의 사법권 이외에 일반 경찰권까지 탈취하여 완전히 그들의 손아귀에 넣었다.

또한 그해 8월 16일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을 독촉하였으며, 같은 달 22일에는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암흑의 일제강점 35년이 시작되었다.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일제는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당분간 발표를 유보하였다. 조약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 8월 29일에 순종황제로 하여금 양국의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건국된 지 519년 만에, 그리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8년 만에 27대 국왕을 마지막으로 종말을 고하였다.이때부터 일제는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세워 한국 통치의 총본산으로 삼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에 임명되었다. 우리 국민들을 철저하게 핍박하는 무단정치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Ⅳ.선열들의 값진 희생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 단체는 총460여 개(수원대 이달순 교수 집계)로 국내외에서 민족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 결과 당시의 국민 총인구 2500만 명 중 200여만 명이 희생됐고 300여만 명이 중경상·행방불명·납치·징발되었으며 50여만 명이 투옥·감금됐다. 이런 엄청난 희생은 세계 어떤 광복투쟁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8·15 광복은 40여 년에 걸친 의병 독립군과 광복군의 끊임없는 항일 독립전쟁과 27년간의 장기 항전을 펼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피와 땀으로 쟁취한 것이다. 더욱이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대일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연합국의 일원임을 당당히 선언했고, 1945년 8월 20일을 전후해 국내진공계획을 추진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8·15 광복을 마치 연합군이 승리한 덕분에 우리 민족이 그냥 얻은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우리의 광복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에 기인하지만 그것은 간접적인 원인에 불과하다. 1905년의 을사늑약 이래 끊임없이 펼쳐온 우리 선열들의 값진 희생이 가져온 결과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Ⅴ.국가수호의 초석은 튼튼한 국방

이스라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범 히틀러에 의해 600만 명의 동포가 희생당한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온 국민으로 하여금 ‘다시는 당하지 말자’라는 구호를 가슴 깊이 되새기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학살당한 동포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텔아비브와 예루살렘 간의 고속도로에 600만 그루의 가로수를 심었다고 한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말은 이스라엘인의 역사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지금 우리는 광복 64주년에 즈음하여 광복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있다.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민족은 강대국에 짓밟힐 수밖에 없으며, 독립을 유지할 수 없는 국가는 국제사회에서 설움받을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한다.

과거사를 반성하고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하는 국민이 많을수록 미래에 대한 비전이 담긴 역사를 만들어 후대에게 물려줄 수 있다. 따라서 우리 군 장병도 과거사의 냉철한 반성 위에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미래비전을 하나씩 가꾸어 나가는 데 동참하고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

<국방부 국방교육정책관실>

200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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