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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보테로]보테로는 말이 없었고 9월의 햇살은 여름 같았다.

Chiron |2009.09.22 22:11
조회 153 |추천 0

 

 

 

인물을 뚱뚱하게 그린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것도 언론 보도를 통해서. 아내는 이전부터 시간되면 이 전시회를 보자고 졸랐었다. 일이 있어서 지방에 내려간 아내를 서울역에서 마중한 뒤 곧바로 덕수궁으로 향했다. 말이 덕수궁이지 전시회 가기 전까지 나는 전시장소가 서울시립미술관인 줄 알았다. 나중에 보니 덕수궁 현대미술관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르느와르 전'이 한창이던데, 르느와르는 덕수궁에, 보테로가 외려 시립미술관에 더욱 어울리지 않는가도 생각해 보았다.

 

덕수궁도 꽤 오랜만에 와 본다. 결혼 전에 관람료 천 원만 내고 한국근대회화의 흐름을 쭉 일별할 수 있었던 특별전고 기억나고 그 이후로는 이 보테로 전이다. 건물이 원래부터 미술관 전용으로 지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으로 기능하는 이곳은 전시회가 클 때는 건물 두 채 모두를 열고 아닌 경우는 한 채만 개방하는데, 보테로는 후자 쪽이다. 그는 1932년 생으로 올해 77세, 콜롬비아 태생이다. 콜롬비아 하니까 커피, 마약, 축구 밖에 떠오르는 게 없는데, 이제는 여기다 미술도 하나 추가해야 할 듯하다.

 

고즈넉한 덕수궁 앞에는 전통행사가 한창이었고 입구를 지나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 낯선 조각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터무니없이 과장된 사이즈에 웃음부터 나왔다. 알고보니 그 조각들도 보테로의 작품이란다. 미술관에 비치된 전시 팜플렛에는 그의 작품들을 주제별로 나누며 그 중 하나를 조각에 할애했다. 팜플렛에 따르자면 그의 작품들은 정물과 고전의 해석, 라틴의 삶, 라틴 사람들, 투우와 서커스, 조각으로 나눌 수 있다. 주로 그의 작품들은 인물화가 많은데, 인물들이 마치 정물 같아 보여 '라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정열 같은 것을 결여하고 있었다. 특히 투우와 서커스를 주제로 그린 작품들이 그러했다. 투우사들은 침착하다 못해 열정을 결여하고 있었고 거기에는 투우사에게 열광하는 관중들의 환호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한 포즈를 잡아 그렸을 법한 투우사들의 동작들도 역동적이지 않고 말이다. 화가가 일부러 그렇게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서커스를 그린 작품들에서는 어떤 우수 같은 게 있었다. 전시관에서 점점 그의 작품들을 마주하다 보니 그의 규모있는 인물들에 익숙해졌지만 어쩐지 서커스의 인물들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곡예를 묘사한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이라든가 하는 것이 어딘지 결여되어 있고 정적이다. 그건 투우도 마찬가지였다. 정물처럼 모두들 죽어있는 것만 같았다.

 

전시관 한 켠에서는 그에 관한 비디오가 상영 중이었다. 투우 광인 듯한 그는 투우사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그의 그림에서는 그런 모습을 유추하거나 상상해 볼 수조차 없었다. 전시회의 섹션 중 가장 재밌는 부분은 고전을 재해석한 그림들인데, 마리 앙트와네트의 초상화라든가, 고야의 그림,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 부부' 등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그린 건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내가 볼 때는 오마주가 아닌 패러디 같았다.

 

자신의 자화상조차 자신과 닮지 않게 그리며 엄격하달까 밀랍인형 같달까 하는 대부분의 초상들에서 보이는 그 굳어있는 표정들. 라틴의 여인들은 머리만 길었다 뿐이지 보테로가 그린 남자들과 얼굴이 비슷비슷해 보였다. 역시 규모가 있어서 그런가?

 

전시회를 통해 나는 페르난도 보테로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으로 만족하며 남미의 화가들을 어디 접하기 쉽겠나라는 생각으로 관람했다. 그에게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기에는 전시작품 수가 너무 모자라기도 하거니와 우리가 흔히 거장이라고 부르는 다른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들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밋밋한 면도 있었다. 실망이라기 보다는 화가 한 명을 리스트에 추가했다는 데에 만족하며 전시관을 나왔다. 가을의 정오 무렵의 햇살은 따스하다 못해 여름못지 않았던 9월 어느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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