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박해(포그롬)
18세기말의 프랑스 혁명을 전환점으로 하여 유태인들의 국제주의 추세는 강렬한 기세로 유럽 전토를 휩쓸었다. 각지에서 그들과 민족이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끊임없는 충돌이 이어졌다.
19세기초에는 유럽전역에 약 330만 명의 유태인구 가 있었다. 이들의 중심무대는 오늘날처럼 미국이 아니라 동구, 그 중에서도 폴란드였다.
그리고 러시아에도 많은 유태인이 살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러시아에서 유태인에 대한 대 박해(포그롬)가 있을 당시 중-동부 유럽 아슈케나지는 650만 명에 육박하였으며 홀로코스트(대학살) 바로 직전인 1939년 유럽의 유태인구는 약 850만 명이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 러시아의 유태인들은 심한 학대를 받고 있었다. 공직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이동조차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짜르 압제하의 밑바닥에서 억눌려 살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 군비부족에 허덕이던 일본의 국채를 인수하여 당시의 돈으로 2억 달러를 빌려준 사람은 아슈케나지 유태인 시프 였다.
그는 돈으로 일본 군인들의 피와 목숨을 사서, 일본을 러시아와 충돌시킴으로서 러시아 정부를 손상시켜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도록 도와주려 하였다.
그 혁명은 아슈케나지 유태인의 해방을 의미했다. 또한 그는 미국에 망명중인 트로츠키에게 혁명자금을 주고 노르웨이 배로 그를 뉴욕에서 핀란드로 보냈다. 또한 미국의 참전을 늦추어 러시아 혁명을 돕고 연합국 측에 대량의 탄약과 무기, 식량 등을 매각하여 거액의 부까지 얻었다.
당시 러시아는 독일에게도 너무나도 거대한 적이었다.
그래서 독일 황제 카이제르 는 함부르그의 유태계 재벌과 결탁하여 러시아 볼쉐비키 지도자 레닌을 봉인열차로 페테스부르그에 보냈다.
이와같이 러시아혁명은 그 배후에서 짜르의 탄압하에 있는 동포를 구하려는 유태세력에 의해 크게 지원 받았다.
러시아 혁명의 중추세력 은 모두 유태인으로 혁명의 중심인물 50명중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해 44명이 유태인이었다. 노동자의 단결, 피지배 계급의 타도, 그리고 노동자 독재국가의 수립, 러시아에 있어서의 유태인은 바로 마르크스가 그려낸 그 노동자요, 피지배 계급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계급투쟁 이론으로부터 시작한다. 착취당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착취하고 있는 부르주아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착취의 정황을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 대하여 분노를 느꼈으며, 그리하여 러시아를 비롯해서 온 세계에 마르크스의 이론이 실행되어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 세계가 공산화되면 누가 다스릴 것인가? 결국 새로운 계급이 나오게 될 것이다. 공산혁명의 실상은 계급투쟁이론을 실천함으로서 세계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그 위에 유태인들이 세계정부 를 세워 세계를 통치한다는 것이다.
아슈케나지 유태인 블루멘솔은 1929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주 최근에 우리 유태민족은 새로운 예언자를 세계에 내놓았다. 그러나 그는 두 개의 얼굴과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로스차일드이며, 그는 전세계 자본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칼-마르크스 이다. 그는 자본가들이 파괴하고 싶어하는 이데올로기의 주창자이다."
이 둘은 어느 쪽도 다 세계적이라는 점에서 같다. 한쪽은 부를 지배함으로서 위로부터, 다른 한쪽은 혁명에 의해 밑으로부터 세계의 권력 통제를 하려하는 음모를 수백년에 걸쳐 진행시키고 있다.
레닌이나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시스템은 한 국가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사회주의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세계적인 규모로 달성된다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사상이다.
그러나 그루지아 출신의 스탈린은 그 생각에 맞서 국가 사회주의를 제창하였다. 스탈린이 정권을 잡자 유태인의 일부는 타협하고 일부는 학살되었으며 또 다른 일부는 인질과 다름없는 상태로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국내에 억류되었다.
26:2 일러전쟁(日露戰爭, 1904~1905).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를 둘러싸고 남으로 내려오는 러시아와 대륙진출을 꾀하는 일본세력 간의 마찰로 일어난 전쟁으로 그 배후에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영일동맹과 러프동맹)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 되었다.
(1) 전쟁발발 배경(극동에서 대결하는 제국주의) :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쟁탈전을 거의 끝내고, 지금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중국을 중심으로 한 극동에 국제적 대립을 몰아 가고 있었다.
(2) 전쟁의 경과와 결과(발틱함대의 전멸) : 일본군은 1904년 2월 8일에 여순군항(旅順軍港)에 대한 기습공격을 시작으로 봉천회전 등 만주에서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계속 승리한다.
이에 처음부터 얕보며 효과적으로 대응전술을 취하지 못하였던 러시아는 육전(陸戰)에서의 패배를
해전(海戰)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Z.P.Rozhestvensky, 1840~1909) 지휘하의 무적의 발트함대를 회항시켜 1905년 5월 27일~28일 대한해협에서 대해전을 전개하였으나, 러시아함대의 병원선 오렐호가 등화관제를 지키지 않아 결국 안개가 짙게 낀 동트기 전의 어둠 속에서 그 불빛이 발견되어,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7~1934)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전멸하다시피 격파된다.
이 치열한 해전은 금세기 최초의 큰 전쟁이었던 러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당시 해전의 주역이었던 일본군 아끼야마 중장은 세 번이나 꿈으로 발틱함대가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며, 해전 당일에는 동남풍이 불어서 전략을 유리하게 전개하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이 바람을 자기들의 민족신이 도와준 것이라 하여 신풍(神風)이라 부른다. 역사상 가장 큰 해전의 하나로 기록되는 이 해전의 파급효과는 매우 컸다. 전쟁이 발발하자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일본은 그 지위를 세계적으로 격상시켰고, 태평양지역뿐 아니라 유럽의 세력균형도 흔들어 놓았다.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꿈이 좌절된 러시아는 팽창의 방향을 서쪽으로, 즉 터키와 발칸반도 쪽으로 돌렸다.
26:5 12월. 일러전쟁이 발발한 갑진(甲辰 : 道紀 34, 1904)년 2월 8일은 음력으로 월 23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