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잠이 많은 그녀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일어나서, 그렇게 열심히 스파게티 국수를 삶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고맙고 기쁘게 생각했다면 난 '그런 말'은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딱히 전 날 밤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말 난 아침엔 뭔가 잘 먹지 못하는 타입인 것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아침부터 '그런 거' 못먹는데......" 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어야 했다.....
- 아- 머리 아파..
어제 술을 너무 마셨는지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나는 눈을 비비며 눈을 뜨려 했지만 방에 불이란 불은 다 켜져 있어 눈이 부셨고, 창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햇빛이 밝아 도저히 뜰 수가 없다.
가느다랗게 실눈을 떠보니, 주방으로부터 덜그럭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없이 덜그럭거리는 소리 덕분에 머리가 더 지끈거려온다.
- 안녕.. 아침부터 뭐 하는거야?
여전히 눈은 반 정도 밖에 못뜨고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 잘 잤어? 보시다시피 요리하고 있어. 스파게티 국수 삶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녀는 어딘가 수줍어 보이지만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곤 손놀림이 분주해지며 스파게티 국수를 삶는 커다란 냄비에 소금을 넣기도 하고,
스파게티에 넣을 재료들을 썰어서 재빨리 후라이팬에 볶고 있었다.
이제 스파게티 소스를 넣고 재료들을 후라이팬에 볶으면, 스파게티는 곧 완성될 것이다.
그 때 스파게티 소스 뚜껑이 열리지 않는지 그녀가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말했다.
- 이리 좀 와봐. 이것 좀 얼른 열어줘. 완전 열심히 열려고 했는데 정말 안열려.
한참을 끙끙거리며 기운을 쏟아 버렸는지,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쩐지 빨갛게 되버린 얼굴과 곤란해하는 표정이 참 귀여웠다.
- 어디 줘봐. 내가 이런 건 잘 해.
병을 받아서 일단 가볍게 시동이라도 걸 듯 병을 움켜쥐고 힘을 줘봤다.
역시, 간단히 열려 버리지는 않는다.
(스파게티를 집에서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병에 들어있는 스파게티 소스는 새로 산 것이든 먹다가 넣어둔 것이든 꽉 닫고 냉장고 안에 넣어두면 온도차로 인해 뚜껑에 압력이 가해져, 굉장히 꽉 닫히게 된다.)
좀 더 힘을 줘서 열어보지만 마찬가지로 병 뚜껑은 열리지 않아서,
결국 고무장갑을 끼기로 했다.
- 생각보다 안 열리네. 흐압!
고무장갑을 끼고 힘주고 열었더니 '퐁'하며 맑은 소리를 내며 뚜껑이 열렸다.
- 보기보다는 제법인걸? 절대 안열릴 것 같았는데 말야-
병을 받자마자 그녀는 스파게티 소스를 볶는다.
- 나야 뭐, 남자니까.. 그런데 나 "아침부터 '그런 거' 못먹는데......"
- 뭐라고....?
가뜩이나 여린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내색은 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녀의 기분은 이미 몹시 상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슬쩍슬쩍 그녀의 마음을 갉아먹었는지 깨닿게 되었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위태위태하던 불안한 관계에 금이 간는 듯 느껴졌다.
순간 잠깐이지만 정적이 흐르다 못해 시간이 멈춰진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생각없이 뱉어낸 말에 깊이 후회하며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아버린다.
무척이나나 예민한 아이인데.....
*
*
*
그동안 그녀는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한참 후 눈을 떠보니 그녀는 여전히 내 앞에 서 있었고, 나는 손에 병을 쥐고 있었다.
어째서 인지 병이 작았고, 병에는 스파게티 소스가 아닌 'Salsa'라고 적혀 있다.
- 어라? Salsa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데자뷰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나는 유난히 데자뷰를 많이 겪는다.
계속해서 멍하니 병 뚜껑만 바라보다 보니, 병 뚜껑은 날카로운 송곳 등으로 두드린 흔적이 있었다.
아마도 '지식인'등에서 뚜껑 여는 방법을 찾아봤거나 다른 사람에게 얻어낸 방법이었을 것일 것이다.
그렇게 가만히 병 뚜껑을 바라보다가 몇 번 정도 두드렸었는지 자국의 수를 헤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멀뚱멀뚱 이상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고 마치 뚜껑이 안열려 곤란해하던 귀여운 표정과 겹치고 만다.
- 데자뷰....
-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데자뷰라니 무슨소리야. 그거 나초 소슨데, 뚜껑 진~짜 안열려.
그녀가 내 앞에 서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한다.
내가 잠깐 잠들었던 것인지 생각에 잠겨있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렇게' 병 뚜껑을 열어낼 것이라는 것이다.
- 어디 한 번 열어볼까..
단번에 쉽게 열리지는 않았지만, 침대에 걸터앉아 야무지게 움켜쥐고 힘을 쏟아 부으니 종이 한 장 차이로 뚜껑은 열려버렸다.
뿌듯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은 채로 싱크대로 가서 병 입구를 타고 흘러내린 소스를 닦아 내곤 그녀에게 병을 건네 줬다.
그리곤 손가락 끝에 묻은 salsa를 맛보며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갔다.
- 와. 신기하다. 역시 남자는 다른데? 아니다, 남자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이거 안열려서 다른 오빠들한테 열어 달라고 했었는데 아무도 못열었거든.
비누거품을 내 꼼꼼히 손 구석구석 씻으며 있었던 일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내심 뿌듯한 마음에 웃으며 거울을 봤다.
그리곤 생각한다.
"내가 네 '남자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또, "나초 따위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너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나초를 먹는다면,
세상 그 무엇보다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그리고 너를 사랑한다고.."
펀샵 구경중, 쓸데없이 비싸면서 필요없어 보이는 상품 발견.
일명 '단지를 열어라'라 뭐라나..
해당상품 주소: http://www.funshop.co.kr/vs/detail.aspx?categoryno=194&itemno=6222
후기를 살펴보니.
Epilogue
그녀가 이 게시물을 보곤, 내게 전화해 말했다.
- 저런 것 필요없어. 네가 병 뚜껑 따위 얼마든지 열어줄 수 있잖아. 나도 널 사랑해.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