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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박정희만 친일인가?

판의미로 |2009.11.07 17:06
조회 1,245 |추천 6

-- 쓰다보니 글이 매우 길어졌는데, 역사에 관심이 있고, 생산적인 토론을 할분만 읽으시길 바란다. 역사따위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글도 읽지않고 알바니 개소리하실분들은 조용히 나가주시길 바란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박정희 혈서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자칭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고,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자는 취지아래 "민간"자본으로 설립되었다.

("민간"자본으로 설립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색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며, 정부규제를 받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정치적 색을 띌 수도 있다는 점을 읽는분들께서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하지만, 이 연구소를 설립한 자가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한 남민전 출신의 임헌영이라는점은 넘겨짚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소장은 1979년 적발된 공산혁명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 사건 등 두 차례나 국가안보를 위해한 공안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전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남민전이란 무엇을 하던 단체인가?

남민전은 안용웅등이 월북하여 김일성에게 사업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북으로부터 통제와 지령을 하달받아왔고, 남한에 공산혁명이 이뤄지면 북한군이 가담하여 지원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공산혁명 성공시 중앙청에 게양할 붉은 별이 그려진 대형 '전선기(戰線旗)'를 준비했는데, 이 깃발은 74년 인혁당사건으로 사형당한 도예종 등 8명이 입던 옷으로 만든것이었다.

 

한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는 반미라는 반제국주의투쟁이 중요하다는 남민전의 투쟁노선역시 80년대 좌익세력에 그대로 수용되어졌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씨는 1983년 대통령 특사로 출소하여, 민족문제연구소장직 이외에 '사월혁명회'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사월혁명회는 1988년 사월혁명 연구소로 설립된 단체인데, 이 단체의 소장을 지냈던 윤성식은 1998년 월북하여 북한 조선노동당의 외곽조직인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민전이라는 단체와, 임헌영소장에관해 하고싶은 말은 더 많지만, 실제로 몇번의 검색만 해 보면 쉽사리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위와같은 내용을 먼저 말한 이유는, 이 연구소의 친일분류기준이 상당히 애매모호하며, 편파적이라는데에 있다.

 

위 연구소는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선생을 박정희와함께 친일파로 규정하고 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박정희는 한국근대화의 상징이며, 6.25 이후 반공의 상징이었다.

안익태는 애국가를 만든 대한민국의 상징이다.

 

위 연구소는 이 두 인물을 모두 친일파로 규정했다.

이는 곧, 대한민국 역사에 지엽적인 존재와같은 이 두 인물을 친일파로 만듦으로써 대한민국을 친일파가 세운 나라, 즉, 친일의 잔재로 만드는 것이다.

친일파가 세운 나라.. 애국 할 마음이 들겠는가?

다시말해, 이 연구소에서 하는일은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 국민임을 스스로 부끄러이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라에 충성하고싶은 마음도, 애국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게 된다.

 

박정희가 없었어도 대한민국은 발전했을 것이며, 박정희가 없었어도 한강의 기적은 일어났을 것이며 안익태가 없었어도 누군가는 애국가를 지었을 것이라는것이 그 논리다.

부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이런 한심한 논리는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졸업했길 바란다.

한국근대화의 상징 박정희가 아니라, 친일의 상징 박정희로 만드는 것, 그것이 이 민족연구소의 과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왜 일제시대때 헌병으로써 독립군을 잡아 고문하던 민주당의 신기남의원 아버지는 이번에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을까?

왜 일제 형사로 독립군 목잘라 매달던 민주당의 김희선의원 아버지는 또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을까?

 

참고로 한가지 말하자면, 당시 독립군의 증언에서도 나오다시피 독립군을 가장 악랄하게 잡아 고문하고, 죽이던자가 바로 겐베이 고초, 즉, 헌병오장이었다.

 

http://www.mediamob.co.kr/HeadLineView.aspx?ID=192

 

헌병 오장에 대해서는 위의 링크에 자세히 나와있으니 관심있는분들은 읽어주시길 바란다.

 

당시 아이가 울면 '순사가 온다'라고 하고, 그래도 울면 '오장이 온다'라고 했을 정도로 헌병의 악랄함과 두려움은 대단했던것이다.

일제시대 헌병은 말 그대로 악질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것이다.
그 헌병 오장의 자손이 바로 열린 우리당의 신기남, 이미경등이고, 역시 우리당의 김희선은 그 부친이 만주에서 독립군 학살하던 일제 형사였다.

(재미있는건 이들이 친일청산 법을 추진했다는 사실... 방귀낀놈이 성낸다고 코미디가 따로 없다.)

이런자들은 친일파에서 제외되었다.

당신은 이런 사실이 납득이 가는가?

단순히 혈서라는 단어에 혹하여 박정희를 물어뜯고 있진 않은지 한번 생각해보라.

 

얼마 전,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전시에 나라를 위해 참전 할 의향이 있느냐?" 라는 설문조사에서 현재 "휴전"중인 대한민국은 단지 57% 만이 "예"라고 대답했다.

그에반해 일본은 78%가 "예"라고 대답했다.

이런 조사결과가 비단 이 연구소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좌파세력들이 청소년들의 국가관과 안보관을 어지럽히는지.

 

이런말을 하면 "요새 세상에 간첩이 어딨냐? 빨갱이가 어딨냐?" 라고 되묻는 분들이 간혹있다.

당신들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월남했을때, 남한에 고정간첩만 2만명이라고 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북한 최고권력자 중 한사람이었던 사람의 말을 그냥 개소리쯤으로 치부해버리겠다면 당신은 이미 답이없다.

군대 다시 다녀오라는 말 밖에는 해 줄 말이 없을 듯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 연구소는 지금에서야 이런발표들을 잇달아 내놓는것일까?

실제로 박정희시대를 직접 겪어 온 어르신들의 대부분은 박정희를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누구보다 그가 일본군 장교였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후대에 "독재자"라고 평가받는 박정희의 유신정권을 직접 몸으로 겪었던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고, 위대하다고 말한다.

 

뭔가 감이 오는가?

 

만약 60-70년대에 박정희의 친일을 주장을 했다면 사람들은 콧방귀도 안뀌었을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일까?

그 시절을 경험한 7-80대 이상이 이젠 대부분 사망하거나 여론형성을 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 시절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들의 주장이 그럴듯하게 먹히기 때문이다.

박정희를 친일파로 부르는 당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들의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꽤나 먹혀들어가고 있다.

어린학생들은 유신을 겪고,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눈으로 보아 온 사람들을 "수구꼴통"이라는 말로 비하하고, 놀림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으며, 오히려 좌익세력들이 득세하여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복지"와 "평등"이라는 허울좋은 단어로 사회주의식 사고방식을 퍼트리고 있으니..

 

자, 그럼 혈서에 대해 한번 짚어보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박정희의 혈서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문서는 실제로 혈서의 사진은 전혀 공개되어있지 않다.

단지, 일본군 장교로 입대하기 위해 어떤문구의 내용을 적었는지만이 신문에 활자로 인쇄되어있으며, 이것이 혈서였는지에 대한부분은 전혀 증명된바가 없다.

또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현재 전문가들로부터 상당한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으며, 신빙성에도 의문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헌데 한겨레, 오마이, 경향, 프레시안등 좌파미디어에서는 앞다투어 "혈서"라는 자극적인 타이틀로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중립을 지켜야 할 언론으로써 올바른 행위인지 의문이 든다.

 

이것은 둘째치고, 과연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로 가서 무엇을 했는가?

 

박정희가 소학교 교사를 할때 일본인 교장, 일본인 교사들과 항상 싸우고 마찰을 빚은것은 유명한 일이다.

당시 박정희의 학생이었던 인물들의 증언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순신을 존경하고 몰래 한글과 애국가를 가르쳤던것 등  당시 박정희의 반일감정은 그 제자들의 증언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이런 반골 정신 가득한 박정희 성격에 일본인들과 부대끼며 사는것은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질을 때려치우게 되는데, 문제는 당시는 교사는 병역이 면제되지만, 선생을 그만두면 징용에 끌려 가야 한다.
선생을 때려치운 박정희는 당연히 일본군대에 끌려가게 되는데, 징병은 사병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일본인과 부대끼는게 싫어 선생질 조차 그만둔 그가 사병으로 끌려간다면 학교 교장과 비교할 수 없는 일본군 상관의 갈굼을 당해야 하고, 남방(동남아)전쟁에 참여하여 일제의 총알 받이로 죽던지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박정희로써는 사병으로 가는것을 피하고, 일본인과 부대낄일이 적은 만주 군관학교로 갈 수 밖에는 없었고 그러니 혈서를 쓰던, 무슨 수를 쓰던, 반드시 군관 학교에 입학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는 매일아침 궁성 요배라고 해서 전 국민이 동쪽 천황궁을 향해 만수무강의 기도를 하던 시절이고, 속마음이야 어쨌건 겉으로는 천황에게 충성 맹세를 입에 달고 다니던 시절이라 지금 생각하면 무슨 큰 일인것 처럼 보여도 혈서나 충성 맹세 편지같은것은 크게 마음에 거리낄게 없는 시절이었다.

또한 독립군은 당시 군사교육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다.

제대로 된 군사적 지식이 없었으며, 그에반해 일본의 군관학교는 침략전쟁이긴하지만 많은 전쟁을 치르며 비교적 군사학이 발달되어있었고, 박정희는 훗날 다가올 광복을 대비하여 제대로 된 군사학교육을 받고자 하였다.


몇번의 시도끝에(이 시도중에 발생한것이 지금 의견이 분분한 "혈서"다.) 다행이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중국,만주,일본,조선인의 고른 구성을 가진 만주군은 비교적 민족차별이 적고 계급사회인 군대 특성상 비록 조선인이라도 장교복을 입으면 일본인조차 함부로 할 수 없으니 일본인에게 갈굼을 당하지않으려는 박정희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이 된것이다.

게다가 만주는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조차 보기 힘든 허허 벌판깡촌 구석이라 일제의 군인이 되어 혹시라고 무고한 조선백성을 해칠 우려도 별로 없으니 박정희에게는 안성맞춤의 위치라고 볼수있다. 게다가 포병 장교를 한것만 봐도 민간인과 접촉할 일은 더욱 없는것이다.

만약 박정희가 진정으로 일제에 충성하고 권력을 탐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사람 구경하기 힘든 만주 깡촌이 아니라, 포병장교가 아니라, 조선에서 일제헌병에지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었다.

(실제로 위여 열거한 신기남의원의 부친은 헌병이 되었었지만 친일파로는 분류되지 않았다. 이거야 말로 코메디가 아닌가)

 

한가지 더 말하자면, 광복군 내부문건에서도 "친일인 척 하라"라는 명령이 하달된것을 알 수 있다.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을 하라" 고 적고 있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전단은 김우전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주둔 미국의 전력첩보국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 28일 작성한 것이다.

 

이 전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광복군조차도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운동의 잠재적 협력자 내지, 독립군 재원으로 봤다.

헌데 이나라 후손들은 그들을 무조건 친일파로 몰아붙인다.

 

백범 김구선생이 돌아가신 후, 이승만, 장면정권을 거치면서 그 누구하나도 광복군과 백범 김구선생을 비롯, 독립유공자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오직 박정희 전 대통령만이 5.16을 성공시킨 후 1962년 김구선생을 비롯하여 광복군과 독립군에게 건국공로 훈포장을 수여하였다.
이것이 광복군과 독립군에게 가장 먼저 박정희가 시행한 포상조치였다.

 

또한, 백범 김구선생이 주동한 동학농민의 난 역시도 박정희가 가장 먼저 혁명이라고 정희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린 학생들아.

 

일제시대 당시 "독립"이라는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길은 단순히 광복군에 합류하는 것만 있는것이 아니었다.

광복군이 추앙받고, 위대한 이유는 광복을 위한 정도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지, 실제로 우리가 광복군에 의해 광복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그들 또한 독립을 위해 하나의 방법으로 희생을 감수했던 것이지, 박정희가 정도의 길을 걷지 않았다고 하여 친일파로 분류되어 좌익세력들에게 까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번 박정희 혈서사건을 단순히 "혈서"라는 자극적인 문구에 휘말려 박정희에 대한 이미지를 고정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 글을 적어본다.

 

관심이 있는자라면 읽어 볼 것이고, 생산적인 토론도 가능할 것이고,

내가 제시한 자료들이 틀렸다면 그 반론의 근거도 들어 볼 것이지만

 

무턱대고 읽지도 않은상태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댓글을 달거나, "알바"라느니 하는 덜떨어진 소릴 하려거든 조용히 "뒤로"버튼을 눌르거나 키보드의 백스페이스바를 눌러 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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