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만남
연수원때 공부한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 교대 근처의 독서실에 다닌 적이 있다. 지현이를 만난건 독서실 앞이었다.
여름도 다 끝나가는 날 터벅터벅 독서실로 향하는데 왠 예쁜 아이가 앞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내가 옆에 앉았는데도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게 아닌가. 내친김에 이름이 머야, 저녁은 먹었니 하고 물어봐도 늘 같은 대답뿐이었다. 냐옹. 그렇다. 그녀는 고양이였던 것이다.
그때만해도 고양이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터라 일단 애들이 즐겨먹는 치즈맛 천하장사 소시지를 사와서 건네주니 냥냥거리면서 먹고나서는 고맙다는듯 자기몸을 내 다리에 감아왔다.
원래 길고양이를 보면 막연하게 이쁘다는 생각은 해왔지만 막상 다가가면 도망치거나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해서 무안해진 적이 많았는데, 지현이는 하는짓이 특히나 사랑스러웠다. 이런 고양이를 만나려고 그 동안 고양이가 이뻐보였나보다.
시험이 코앞이라 공부하긴 해야겠고, 그러다 지현이를 뒤로하고 독서실로 들어갔다.
다음날, 어제는 참 즐거운 기억이었다고 생각하며 독서실로 향했는데 지현이가 독서실 앞에 앉아있다 내가 오는걸 보면서 냥냥거리며 반가와했다.
그렇게 지현이랑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예전에 삼성프린터 CF에서 멀쩡한 고양이가 전지현으로 변하는 장면이 있었었다. 지현이는 생긴 것도 대략 그 고양이와 비슷한데다 얘도 혹시 잘해주면 전지현으로 변하지 않을까 싶어 붙여준 이름이다.
2. 헤어짐
그 뒤로 며칠동안 독서실 가는게 즐거워졌다. 지현이는 항상 나를 마중나와있었고 나를 보면 반가워하며 내 다리에 제 몸을 비벼주었고, 별거 아니라도 내가 주는 것을 항상 맛잇게 먹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지현이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왠 초딩놈이 잡아간 것이었다. 지현이가 워낙 붙임성이 좋아 동네주민들한테 냥냥거리면서 애교를 떠니까 다들 귀여워해줬는데 어느 초딩놈이 욕심이 났는지 끌고가버린 것이다. 실제로 며칠 뒤 왠 초딩이 지현이 목에 빨간 비닐끈을 묶어서 글고다니는게 목격됬다.
그러나 어차피 주인 없던 고양이였으니 나를 포함한 동네사람들 모두가 이를 어쩌지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쳐다볼 수 뿐이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화단쪽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려 가보니 지현이였다. 반가운 마음에 먹을것을 들고 다가갔지만 경계를 하며 화단에서 나오지 않고 손만 밖으로 뻗쳐서 먹이를 받아먹었다. 아무래도 초딩한테 당하고 나서는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 것 같았다. 며칠동안이나 계속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지만 지현이는 화단에서 나오지 않았다.
3. 다시 마음을 열다.
그러던 어느날 태풍이 왔다. 계절도 가을이 다 됬던때라 빗방울이 제겁 차가웠다. 독서실에 들어가며 화단을 살펴봤는데 지현이가 보이지 않았다. 4층에 있는 독서실에 있으면서도 밥은 먹고 다니는지 추운데서 떨고 있는 건 아닌지 지현이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빗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고양이가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내 귀에는 틀림없이 지현이 소리로 들렸다. 후배들은 무슨 고양이 소리냐고, 고양이가 지현이 하나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부랴부랴 따뜻한 물로 북어포를 데워서 종이컵에 담아 들고나가 지현이를 찾기 시작했다. 막상 밖에 나와보니 고양이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감이 안왔다. 빗속을 10분동안 이리저리 헤메인 끝에 옥외주차장의 차 밑에서 지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현이는 생전 처음 맞아보는 큰 비에 온몸은 오들오들 떨고 두 눈엔 두려움이 가득차 보였다. 일단 종이컵을 차 밑에 밀어넣으니 허겁지겁 북어포를 먹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좀 안정이 됬는지 나를 보고는 고맙다는 듯 내 손가락을 할짝할짝 핥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현이는 나와 다시 친구가 되었다.
4. 교감
그 뒤로는 지현이도 사람에 대한 마음을 다시 열고 동네사람들에게도 살갑게 굴기 시작했다.
내가 독서실 앞에 도착해서 지현이랑 놀다보면 고딩커플들이 쉬러 내려왔다. 그럼 나는 지현이를 그들에게 인계하였고, 그들은 지현이와 놀아주다 그 뒤에 쉬러 나오는 고시생에게 인계하곤 하였다. 서로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누구 하나 지현이를 독점하려 하지 않았다.
가끔 고딩커플들이 내려오지 않을 때에는 그냥 혼자 내버려두고 독서실에 올라와야 했다. 그러면 지현이는 서럽게 냥냥거리면서 독서실 건물 계단까지 따라들어와서 가지말라고 떼를 쓰곤 했다. 그러면 나도 못이기는 척 다시 나와서 놀아주다보면 한시간은 그냥 흘러가곤 했다. 사실 놀아줬다기 보다는 그냥 무릎 위에서 재워주었다는 표현이 맞다. 지현이는 항상 밖에서 돌아다녀서 그런지 온기가 그리웠던 것 같다.
한시간 동안 고양이를 무릎에 않히고 앉아있는게 지겹지 않았냐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10분만 같이 있어도 지겨운 경우가 있고, 아무말도 하지 않고 1시간을 같이 앉아만 있어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내 무릎 위에 올라와서 골골거리며 너무나 편안한 모습으로 자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그 평화를 깨뜨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지현이 등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면 지현이도 나를 가만히 쳐다보곤 했는데 눈빛만으로도 서로 교감할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그 시간이 전혀 지겹지 않았다. 나는 그 때 지현이를 사랑했었던 것 같다.
5. 무지개다리
그런데 지현이에게도 적이 있었다. 지현이가 사람들과 워낙 잘지내니 동네고양이들 눈에 거슬러 보였나보다. 특히 흰바탕에 한쪽 눈위와 턱밑이 검은색이라 히틀러같이 생겨먹은 놈이 있었는데 그 놈이 지현이를 많이 괴롭히곤 했다. 내가 볼때는 얼른 가서 쫒아내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내가 없을때를 골라 괴롭히는 것 같았다.
추석연휴때는 집안행사가 많아 독서실을 나가지 못했었다. 연휴가 끝나고 독서실에 다시 나왔는데 지현이가 안보였다. 가끔 하루 이틀 안보일 때도 있어서 곧 돌아오겠지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또 초딩이 잡아갔나 해서 그 초딩한테 물어보니 그 후로는 그런 적 없단다. 연수원 시험이 며칠 남지 않았던 터라 아쉬워하면서도 더 신경쓰지 못했다.
시험이 끝나고 독서실에 짐을 정리하러 가니 후배들이 나를 불러서 지현이가 죽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게 무슨소리냐 물었더니 추석연휴때 지현이가 히틀러고양이한테 쫒기다 빗물배관쪽으로 들어가서는 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서 죽었고, 내가 충격받을까봐 시험 전에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뒤부터 나는 고양이를 매우 좋아하게 됬다. 지현이처럼 살갑게 굴지 않고 나만 보면 도망가버리는 녀석들이 대부분일지라도, 한동안 길고양이들만 보면 지현이 생각에 근처 편의점에 가서 소세지라도 사서 던져주곤 하였다.
지금은 다른 고양이를 데리고 산다. 고양이마다 성격이 달라 지현이보다 나은 면도 있지만 냥냥거리는 애교는 지현이를 따라갈 수 없어서 아쉽기도 하다.
나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도 이런 기분이 들까? 예전 연인에게는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기분을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느낄 수 없다면 그때마다 옛 연인이 생각날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다시 가라고 하라면 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어차피 완벽하진 않으니까 누구나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부족한 부분을 아쉬워하며 사는게 인생이란 것일지 모른다.
6. 후기
그 때는 고양이에 대해서 하나도 모를때라 그냥 편의점에 가서 소세지, 참치캔, 북어포를 사서 주곤 했다. 지금 고양이 키우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지현이에게 안좋은 것만 줬구나 하는 생각에 미안해지면서도, 그런 하찮은 것도 항상 맛있게 먹어주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