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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진주성 수비군 3천명은 어떻게 3만 왜군을 물리쳤는가?

조의선인 |2010.01.17 11:15
조회 697 |추천 2

 

일본인들이 문록 경장의 역이라고 부르는 7년간의 전쟁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이 기간내에 당시 일본군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참패를 안겨준 두 전투가 있었으니 바로 1592년의 제1차 진주성 전투(晉州城戰鬪)와 1597년의 명량해전(鳴梁海戰)이다. 제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 소식을 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크게 분노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진주성에 대한 두번째 공격을 지시한다. 반드시 목소의 목을 가져오라는 명령이었다. 여기서 목소란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을 말한다. 이미 김시민은 마지막 교전에서 전사했지만 일본 본토에 있었던 히데요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목소에 대한 분노는 이후 일본 문학에 사실과 다르게 각색되기 사작했다.

치가마쓰 몬자에몽의 '본조삼국지' 쓰루야 난보꾸의 '텐지꾸 도쿠베' 등 목사가 등장하는 작품은 많았다.


'텐지꾸 도쿠베'는 1804년에 초연됐다. 주인공은 두꺼비로 변신이 가능한 악인. 그의 아버지가 바로 조선인 목사다. 여기서는 일본 전복을 꾀하는 요술쟁이, 반역자로 묘사되어 있다. 목사에 대한 적개심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써 이처럼 일본에서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치욕적인 패배는 여러가지로 각색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전투도 많았고 패배한 전투 또한 많았다. 그런데 왜 일본인들은 제1차 진주성 전투를 가장 치욕스러운 패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제1차 진주성 전투는 1592년 10월 일본의 무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가 이끄는 3만명의 대군이 3천 8백여명의 조선 관군이 사수하는 진주성을 7일 동안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한 싸움이다. 일본군은 이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이듬해 6월에 시마즈 요시히로, 나가오카 다카오리, 우키다 히데이예(宇喜多秀家) 등 기라성 같은 장수들이 총동원되어 8만 대군으로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 김천일(金千鎰) 등이 지휘하는 3만여명의 조선 관군과 의병들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전멸당하고 진주성이 함락되니 이것이 제2차 진주성 전투였다.

당시 왜군의 주요 개인화기는 조총이었다. 1500년대 초반에 포르투갈 해군 장교로부터 도입된 조총은 사정거리가 2백미터 정도로 이미 일본에서 널리 전파되어 있었다.

왜군의 위력적인 조총과는 달리 조선 관군의 주무기는 창과 활이었다. 하지만 진주성의 수비군 가운데에는 왜군의 조총과 비슷한 무기를 사용하는 병사도 여럿 있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김시민은 염초 510근과 총통 170자루를 제작하여 왜군과의 전투에 대비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총통이란 승자총통을 말하는데 발사원리는 조총과 비슷하지만 수동식 점화라는게 다르다. 승자총통은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하여 각종 화살이나 탄환을 발사하는 병기로 장전과 휴대가 간편하다. 그러나 문제는 조총보다 발사속도가 느리다는 데에 있다. 첫번째 교전에서 김시민은 이러한 승자총통의 문제점을 고려하여 적의 선발대가 성문 앞까지 접근할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시에 승자총통을 사격하도록 하여 왜군 300여명을 사살하는데 성공한다.

왜군은 전투 4일째부터 새로운 병기로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조선 관군의 화살공격을 막기위한 죽편이라는 방패를 앞세우고, 성의 높이와 비슷하게 토산을 쌓아 바퀴가 달린 사격용 장비 정루를 그 위에 설치하여 안에 병사가 숨어 조총사격을 하는 전법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자 조선 관군은 화포를 이용, 차대전을 발사하여 정루가 설치된 토산을 무너뜨린다. 차대전은 오늘날 미사일과 같은 모양으로 사정거리는 1킬로미터 이상이었다. 또 성벽 아래에 접근하는 적의 기마병들은 비격진천뢰로 방어했는데, 도화선이 감긴 나무를 진천뢰에 넣고 불을 붙이면 화약이 폭발, 내부에 있던 철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 치명타를 입히는 무기였다.

이처럼 진주성 안에는 각종 화약무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비록 수량은 적었지만 그 위력은 대단했고 김시민의 군사들은 이들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조선 관군의 전투방식은 기본적으로 성에 의지하고 성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일본군도 성을 함락시켜야만 승리라고 여겼다. 그런 점에서 진주성은 요새와도 같았다.

성의 남쪽은 남강이 직면해 있어 적군이 아예 공격하지 못한다. 이 곳은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안고 투신한 의암이 있다.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이 역시 적군이 쉽게 공략할수 없는 험준한 지세다.

성의 동쪽과 북쪽은 평지다. 이곳 성벽은 임진왜란 때에 훨씬 더 바깥으로 나와있었는데 그 외성 일부가 조금 남아있고 북쪽엔 적의 접근을 막는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진주성을 왜군은 먼저 서쪽부터 공략했다. 절벽 때문에 오히려 방어가 허술하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다음은 북쪽을 도모했는데 해자를 솔가지와 나무로 메우고 그 위에 임시다리를 설치, 성 안으로의 진입을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가 여의치 않자 평지인 동쪽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왜군의 공격작전은 조선 관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모두 실패했다.

성안의 수비군은 화약무기를 적시적소에 배치하여 왜군의 공격에 대항하고 있었다. 준비된 무기로 천연요새를 형성한 진주성, 이 앞에서 왜군의 집요한 공격은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인 포로들을 전면에 내세워 진주성 수비군의 전투의욕을 꺾기위한 심리전에 나섰다. 이에 김시민도 지지않고 궁수로 보이는 허수아비를 성위에 위장하여 진주성 안의 병력이 왜군보다 많도록 보이게 하였고, 밤마다 문루 위에서 악공들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였다. 이는 왜군의 사기저하를 노린 책략이었다.

또한 김시민은 민간인의 합심을 이끌어내어 성안의 모든 남녀노소에게 남장을 하도록 하였다. 당시 성안의 백성들도 반드시 왜군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지켜내겠다는 의지의 단결력이 있었던 것이다.
전투 개시 10일째, 요시히로는 성안의 군민들을 성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위장 퇴각전술을 썼다. 그러나 조선 관군이 이에 속지 않자 다시 군사를 되돌려 진주성을 재공격했다. 그러나 김시민과 조선관군 및 백성들은 하나로 뭉쳐 끈질기게 저항하여 왜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또한 곽재우의 의병부대가 지원군으로 왜군의 후방을 찌르니 전세는 걷잡을수 없이 왜군 쪽에 불리해졌다. 결국 요시히로는 3백여명의 부하장수와 1만여명의 병사들을 잃고 김해로 퇴각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 교전에서 김시민은 총상을 입고 전투가 끝난 후 3일만에 사망하게 된다.

3천 8백여명의 조선 관군, 병력의 반이 정규군도 아닌 민간인들이었던 진주성의 수비군이 3만여명의 왜군, 그것도 일본 최고의 용장으로 명성을 날리던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를 격퇴시킨 이 위대한 승리는 진주대첩(晉州大捷)이란 또다른 역사적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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