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천주교(天主敎) 신앙(信仰)
⑴ 술 마시고 노래하던 호방한 시절도
안중근은 이 무렵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을 사서 군인이 될 자격이 있는 청소년들에게 나누어 주고 총격 연습을 시켰다. 그리고 틈이 나는 대로 황해, 평안, 경기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포부가 있는 건장한 청소년들을 모아 단체를 조직하고 군사전략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술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젊은 꿈을 키웠다.
안중근은 나중에 여순감옥에서 자신이 일상 생활에서 가장 좋아하던 네 가지를 밝힌 바 있다.
‘첫째, 친구와 의를 맺는 것이요(親友結義)
둘째,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요(飮酒歌舞)
셋째, 총으로 사냥하는것이요(銃砲狩獵)
넷째,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었다(騎馬駿馬).’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안중근은 청소년 시절부터 의리와 호방함을 갖추고 상무정신으로 심신을 단련했다. 안중근의 짧은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안중근은 사냥을 나갔다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기도 하였다.
‘하루는 동지 6, 7인과 산에 가서 노루사냥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탄환이 총구멍에 걸려서, 빼낼 수도 없고 들이밀 수도 없어 쇠꼬챙이로 총구멍을 뚫으려고 주저없이 쑤셨더니, "쾅"하고 터지는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머리가 붙어있는지, 목숨이 살아있는지 조차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윽고 정신을 차려 자세히 살펴보니 탄환이 폭발하여 쇠고챙이는 탄환알과 함께 오른손을 뚫고 공중으로 날아갔다. 또 한번은 남이 잘못 쏜 엽총에 산탄(散彈) 두개가 등에 박혔는데, 별로 중상은 아니었고 곧 총알을 빼내어 나았다.’
그렇다고 안중근이 젊은 날에 매양 사냥이나 다니고 의분에 차서 병정 모으는 일에나 열중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동무들과 어울려 기방에 출입하며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질로 보아 기생 얼굴이나 쳐다보면서 술이나 마시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안중근은 기방에서 기생들을 호되게 꾸짖기도 했다.
‘"너희는 뛰어난 자색을 지녔으니 호걸 남자와 짝을 지어 함께 늙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그리하지를 못하고 돈 소리만 들으면 침을 흘리고 정신을 잃어 염치불구하고 오늘은 장씨, 내일은 이씨한테 붙어 짐승과 같은 행동을 하니 그래서야 되겠느냐?" 나의 그런 말을 계집들이 새겨듣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빛이나 공손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면 나는 욕을 퍼붓기도 하고 때로는 때리기도 했기 때문에 친구들은 나에게 '번개입(電口)'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⑵ 19세 때 영세 입교 후 천주교인으로 활동
안중근은 1897년 1월에 19세의 나이로 영세 입교하여 1910년 3월 죽음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천주교인으로 종생하였다. 안중근이 세례를 받게 된 것은 1894년 결혼한지 3년이 지나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안중근은 세례를 받은 이후 신앙생활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도 굳은 신앙심을 보여주었다.
안중근과 그의 가족은 조상의 제사 때문에 입교를 거부한 안중근의 백부 안태진을 제외한 일부 사촌들까지 프랑스인 신부 빌렘 (J.Wihelmː한국명 홍석구(洪鍚九))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청계동으로 돌아온 안태훈이 빌렘 신부를 초청해 가족 등 36명을 영세받도록 한 것이다. 안중근의 어머니와 부인 김아려도 이때 세례를 받았다. 2차로 안중근 가족과 친척 30명이 그리고 이해 부활절에는 또 다른 친척과 마을 주민 33명이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안중근은 신앙인으로서 열심히 노력하였다.
‘안태훈의 입교 과정이 순수한 신앙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안중근은 세례를 받고 나서 교리공부와 성서공부를 열심히 하여 날로 신앙심이 굳세어져 갔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서 그에게 세례를 준 빌렘신부를 따라 활발한 전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그의 신앙심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러한 전교 활동을 통한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연설문이 그가 옥중에서 저술한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다. 안중근은 빌렘 신부의 복사(服事)로서도 활동하였고 또한 신자들에 의해 총대로 선출되어 종교활동과 사회정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양곡문제로 인한 곤경을 벗어나고자 프랑스인 신부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변화하는 서양의 신문명을 접해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중근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순수한 신앙심에서 천주교에 입교했고 성실하게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러면 천주는 누구입니까? 한 집안에는 그 집 주인이 있고, 한 나라에는 임금이 있듯이, 이 천지위에는 천주가 계시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신으로 그 뜻이 깊고 커서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로서 전능·전지·전선하고, 지공(至公)·지의(至義)하여 천지만물·일월성신을 만들어 이루시고, 착하고 악한 것을 상주고 벌주시고, 오직 하나요 둘이 없는 큰 주재자인 바로 그 분입니다.”
안중근의 천주교에 대한 신앙심은 독실하였다. 앞의 인용문은 여순감옥에서 쓴 것으로, 천주에 대한 믿음과 ‘오직 하나요 둘이 없는’ 절대자에 대한 양심을 보여주고 있다.
“천주님은 지극히 공정하여 착한 일에 상을 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한 일에 벌을 주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공과 죄의 심판을 몸이 죽는 날 내리는 것입니다. 착한 이는 영혼이 천당에 올라가 영원무궁한 즐거움을 받을 것이요, 악한 자는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다함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도 상주고 벌주는 권세를 가졌거늘 하물며 천지를 다스리는 거룩한 큰 임금인 천주님이 어찌 그런 권세가 없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천주님께서는 왜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세에서 착하고 악한 것을 상주고 벌주지 않느냐고 묻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는 상벌은 한계가 있지만 선악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안중근의 행보는 언제나 당당했다. 학교를 세우고 의병에 나서고 마침내 국적(國敵)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까지 그의 삶의 지표에는 항상 신앙심이 있었고, 민족의식이 있었다.
‘안중근은 1897년 1월에 세례를 받은 이후 "기도문(経文) 강습을 받고 교리를 토론하면서 여러달을 지나는 동안 신덕(信德)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며,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몇 해를 지났다."고 스스로 회고한 것처럼 상당히 오랫동안 교리연구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는 1896년 10월경부터 교리를 접하기 시작하였고, 세례를 받은 이후 적어도 빌렘 신부가 소환되는 1903년까지 6년~7년 동안은 교리연구와 전교활동에 몰두했던 것 같다.’
⑶ 좌절된 천주교대학 설립의 꿈
안중근의 신앙심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반 대중을 상대로 전교 연설을 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빌렘 신부로부터 교리수업을 받고 빌렘을 수행하여 해주·옹진 등을 순회하며 전교활동도 벌였다. 황해도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교활동을 하던 안중근은 일반 대중의 교육 수준이 저급함을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이들을 깨우치기 위한 문명개화적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래서 안중근은 1899년경 ‘천주교대학’ 설립운동을 전개했다. 천주교 신앙과 문명개화를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 신부와 주교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뮈텔(G. Mutel)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 신부들은 대학 설립을 반대했다. 한국인이 학문을 하게 되면 믿음이 나빠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안중근은 대학 설립의 승낙을 얻고자 계속 설득했지만 끝내 외국인 신부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그때 교회는 점차 확장되어 교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황해도에만 여덟 분의 선교사가 머물고 있었다. 나는 그때 홍 신부(빌렘 신부의 한국식 성씨) 에게서 프랑스어를 몇 달 동안 배웠다. 그리고 홍 신부에게 이런 의견을 말했다.
"지금 한국의 교인들은 학문에 어두워 교리를 전도하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라의 앞날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 합니다. 민 주교(뮈텔 주교의 한국식 성씨)에게 말씀드려 서양 수사회에서 박학사 몇 분을 청하여 대학교를 세운 다음, 나라 안의 유능한 자제들을 뽑아 교육시킨다면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계획을 세운 다음에 홍 신부와 함께 곧 서울로 올라가 민 주교를 만나보고 그 의견을 제시했으나 민 주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한국인이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데 소홀해 질 것이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
나는 두 번, 세 번 권고해 보았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음으로 어찌 할 수가 없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분함을 참을 수가 없어 마음속으로 "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마음은 믿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를 배우던 것도 중단하고 말았다.’
외국인 신부와 주교들은 한국인들에게 천주교 신앙은 가르쳐도 교육은 시키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포들의 참상을 지켜본 안중근의 학교설립 제안을 냉정하게 거부했다.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 데 소홀해진다”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한국인들의 근대화 내지 변화에 대한 프랑스 신부들의 부정적 시각을 확인한 안중근은 이후 외국인 신부들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오로지 전교에만 관심을 가졌던 외국인 신부들의 종교적 가치관과 자신의 민족적 의식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명맥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 지언정 외국인 신부들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고, 그로 인하여 빌렘 신부로부터 수개월 동안 배우던 프랑스어도 중단하고 말았다.’
안중근은 프랑스어 교육을 중단한 것과 관련하여 뒷날 자서전인《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벗이 묻기를, "왜 배우지 않는가?"하기로, 대답하기를 "일본어를 배우는 자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고, 영국어를 배우는 자는 영국의 앞잡이가 된다. 내가 만약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면 프랑스의 앞잡이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이를 폐하였다. 만약 우리 한국이 세계에 떨친다면 온 세계 사람들이 한국말을 배우게 될 것이다. 자네는 이를 염려하지 말게."라고 하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안중근에게 천주교대학 설립의 좌절은 깊은 충격이었다. 이로 인해 안중근은 외세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나라는 점차 기울어가고 있는데 백성들은 배우지 못해 그런 사정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안중근은 몇 해 뒤 결국 학교를 설립하였다. 청년들을 깨우쳐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학교가 필요하다고 믿게 된 것이다.
안중근은 ‘천주교대학’ 설립 문제로 주교와 신부들을 불신하게 되었지만 천주교 자체를 부정하거나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그의 신앙생활은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고, 차츰 사회성과 역사의식과 접목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 안태훈 형제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였다. 이들은 청계동에 상당한 규모의 성당을 세웠다. 그리고 1898년 4월 빌렘 신부를 초청해 성당을 맡겼다. 청계동 성당은 황해도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의 성당이었다. 이후 청계동 성당은 황해도 포교사업의 지휘부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