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을사조약을 반대를 한 제2의 한국인 - 베델

박윤호 |2010.04.13 00:41
조회 1,828 |추천 4


 

 1872년 영국 브리스톨에서 출생하신 베델은 고등학교를 마친 후 , 15세이던 1888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상업에 종사하시다가 1904년 3월 4일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으로 임명된 후 일주일 뒤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그 해 4월 14일 일제의 방화로 경운궁(현 덕수궁)이 불타자 '일제의 방화로 불타버린 경운궁의 화재'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당시 <데일리 크로니클>은 친일성향의 매체였던 탓에 이 일로 선생은 특별통신원에서 해임되고 오갈데 없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베델은 영국이나 일본으로 되돌아가지 않다. 

 베델은 당시 항일지식인인 박은식, 양기탁,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새 신문 창간에 뜻을 모으고는 그해 7월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당시 고종황제는 선생에게 배설(裵說)'이라는 한국이름과 함께 여러가지 편의도 제공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자매지로 영문판 <The Korea Daily News>도 같이 발행했는데, 당시 <황성신문>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항일 구국지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인 선생이었기에 통감부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으며, 국한문, 한글, 영문판 등 3종을 합해 발행부수가 1만부에 달하는, 당시 최대의 신문이었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베델은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사설을 실었으며,  1907년 헤이그특사 중 이준 열사가 순국하자 이를 호외로 보도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인과 개(犬)는 출입금지' 라는 간판을 사옥 앞에 내걸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양기탁 선생은 사옥 2층에 태극기를 내걸고 만세를 부르며 축하잔치를 벌이기도 했다.당시 <대한매일신보>의 당당한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을 받은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가 베델을 재판에 회부, 금고형을 받게 되고, 뒤이어 신문사 간부들에 대한 구속수사, 자금난 등으로 신문사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1909년 5월 1일 베델이 고문후유증으로 서거하자 친일성향의 인물들로 사장이 교체된 후 1910년 8월 국권이 피탈되자 '대한' 두 자를 떼고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했다.
 베델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를 영생케 하여 조선의 백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베델의 부음을 전해들은 고종황제는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
(천하박정지여사호, 天下薄情之如斯呼)"라며 애통해 하였다.

 

 

추천수4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