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감기도 조금 덜한거 같기도 하고 그래도 하나 남은 약을 저녁 6시쯤에 먹고,
뿌리를 뽑아버리겠단 심정으로 창문을 빼꼼히 열어놓고 '직관력' 이란 책을 읽고
있었는데...감기약때문인지 스르르 잠들어 버렸네..그러곤 아부지 오실때쯤
저녁차리는 소리에 깨어서는 밥을 먹고..뭐 딴짓좀 하다보니 새벽2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다시 들었다..계속 뒤척이다가 겨우 zZZ~할때쯤 아놔 "삥삑삑"
문자소리에 깨버렸다..아놔 또 "고래 대박 룰렛 ~" 뭐 어쩌고 저쩌고 문자인가 싶어
짜증나게 게슴츠레한 눈으로 확인해보니
문자 : 지나가다 우연히 봤는데 차 엔진 밑쪽에 물이 마니 세내요
시동걸기전에 확인해보세요 010401130**(2010.5.24.3:04AM)
고마운 분이군하며 다시 잠들려고 노력하는데 5분여후쯤
위층에서 또각또각 여자 힐굽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아파트는 복도식으로 되어있고 10년도 넘은 아파트라서 그런지 몰라도 층간소음이 조금 난다. 위층 여자의 저 힐소리도 여러번 들어봤던 소리라 익숙해져있었다. 한번은 겨울쯤인가 하도 쿵쿵거리고 여러명의 애들이 뛰어다니는 발자국 소리 같아서 신경질적으로 위층에 올라가서 벨을 누르고 말해본적도 있다. 물론 얼굴은 못봤고 그냥 스피커폰으로만 그여자에게 주의를 시켜달라고 부탁해본적은 있었다)
그러곤 별생각없이 다시 잘려고 노력하는데 아..왠지 답문자를 지금 보내야 할거 같았다. 과연 위층 여자가 보낸문자인가 늘 새벽에 들어오는 (그 힐소리는 늘 새벽 2~3시였으니까) 여자이고 위층이니까 203동 지하주차장 출입문으로 들어오면서 내 차를 본게 아닐까 하는 상당히 논리적인(최소한 내 주관으론) 가설을 세웠다. 또 이상하게도 월요일 새벽이면 늘 우리 지하주차장은 세울곳이 없어서 지상에 주차를 하는 확률이 높은데 저 여자가 과연 지하주차장에 차를 댄게 맞는가 의심스럽기도 했고, 오며가며 마주쳐서 나와 내차를 기억하고 있어서 괜히 비도오는 날 새벽이니 말이라도 걸어볼까 싶은 호기심의 표현인가 싶은 비논리적인 허약한 가설까지 세웠다.
아무튼 난 문자를 보냈다.
나 : 아 네 그마음 고맙습니다 날이 밝으면 꼭 확인해 보겠습니다
오늘 행복한 일 생기시길~
(이미 이때쯤 난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울 위층여인이 나를 흠모하여 오랫동안 지켜봐왔고, 어떻게 말을 걸까 생각해낸게 내차에 적힌 전화번호로 차의 고장을 알려주는 척하며
관계를 만들어 가려고 하는게 아닐까 하는 환상적인 가설을 세웠다. 하긴 거의
새벽 2~3시에 귀가하는 여자가 결혼했을 확률은 적을테고, 그때 위층에서 뛰어놀던
어린애들은 조카들이겠지 하는 자위적인 확신까지도 했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30분같았던 5분여의 시간이 흐른뒤..
(지금부턴 문자녀로 칭하겠다. 이미 내 환상은 나만의 가설위에 세워진
사실처럼 받아들여졌으니까)
문자녀 : 별거 아닌데요뭐..그냥 자주보던 차고 알려드려야 할거
같아서요..기분좋게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때까지도 난 의심스러웠다. 과연 남자일까 여자일까. 이모티콘 하나 없이 문자를
보내는 여자도 있을까. 과연 위층의 여자가 맞긴한건가. 하지만 난 저녁에 읽은
직관력" 이란 책때문에 내 직관이 맞을거라는 확신이 들었던거 같다)
나 : 아..아닙니다..늦게 들어오셨는데 괜히 제가 문자 보낸게
아닌가 싶네요..고맙습니다..내일 꼭 확인해보겠습니다 ^^
그럼 푹 주무세요 ~
(난 늘 이런식이다. 적극적이지 못하고 내 확신을 100% 신뢰하지도 못하며,
기대는 하지만 애써 표현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자세다.그러나 상대로부터 작지만
확실한 확신의 멘트가 날아오면 그때부턴 가면을 쓴거마냥 내가 아닌 사람으로
기꺼이 변한다)
문자녀 : 친절하시네요...저기...음..당장 주무실게 아니라면 차를
지금확인해보시는게 어떨지..저도 차에 두고 온게 있어서
다시 내려가봐야 될거 같구요..
(헐! 뭐지! 이건! 내 허약한 가설이 과연 맞는건가..문자녀는 지금 만나자는 말을
은근히 돌려서 자기도 수줍은 여자인데 겨우 겨우 저렇게밖에 표현할수 없다고
알려주려는 듯했다..잠은 이미 잊었다)
나 : 헐...네 그렇게 하죠뭐..차를 보고 와야 잘 잘수있을거 같기도
하네요.. 그럼 천천히 내려오세요..
문자녀 : 네^^;
(드디어 이모티콘! 문자녀도 나와 비슷한 부류의 존재인가 보다. 겨우 보통사람보다
어렵지만 뭔가를 해낸듯한 저 쾌감과 환희의 이모티콘!!!!)
뭘입지? 이 새벽에 머리감고 샤워하고 기대에 부푼 소개팅에 나가는 남자마냥 그렇게
해야 하나..아님 자연스럽게 트레이닝복에 모자라도 쓰고 가야하나. 한참을 고민했지만
내 선택은 청바지에 하얀 긴팔 면T에 세수는 하고 모자를 썼다.그리곤 거울앞에서
앞 옆 위 아래 전부를 점검하고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냥 그런 가식의 몸짓으로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냉각수가 세어 나온거였다.
그 흐릿한 조명에도 뚜렷하게 차 앞으로 50센치 가량이나 흘러내려 고여있었다.
물론 내 사랑하는 애마가 고장나서 내일 당장 폐차를 하게 되더라도 아무 신경도
안쓰였다.. 203동 지하주차장 출입구에서 내려올 문자녀 생각만 가득찬 내몸은
머리통밖에 없는 먹깨비가 되어있었다. 잠시후..
(평소 관찰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 내가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7m 전방에서 걸어오는
문자녀를 스캔할수 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따름이다)
타이트한 병아리색 짚업후드 트레이닝복 세트 상하의, 베이직한 하얀색 컨버스 운동화,
비즈가 박혀서 조명에 힐끔 빤짝거리는 분홍색 모자, 묶었다 푼 머리마냥 굽슬 웨이브가 들어간 어깨 바로밑까지 오는 까만 머리카락, 조그마한 하얀 얼굴, 키 160cm 나이 26살쯤, 차가워 보이는듯한 얼굴이지만 날보고 살짝 고개숙여 인사할때 생긴 왼쪽 보조개, 얼굴은 평범했지만 왠지 웃을때 이효리처럼(?) 매력있게 일그러지는 스타일이였다.
어색하게 난 인사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무신경한듯 내차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사이
문자녀는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나 : 아~ 별건 아닌거 같은데요. 이녀석이 연세가 많아서 가끔
식은땀을 흘리는 갱년기 증상을 보이거든요..
문자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쳇말로 미친듯이 웃고 있었다. 조금은 차가워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얼굴이 벌게 질
정도로 웃고 있었다. 다 웃고 나선 나도 좀 머쓱하기도 해서 차에 뭐 가지러 오셨다면서요 했더니 아 제차 저기있어요 하면서 걸어갔다..아~ 주차선을 벗어나 따블로 주차된 새파란 액티언.. 한번씩 봤던 차다..우리 아파트는 임대아파트고 그리 충분하게 사는 분들이 없는터라 다들 소형이나 경차를 또는 중고차를 타고 다녀서 별로 눈에 띌거도 없는데 액티언 저건 새파란색에 새차 같아서 나도 액티언은 좀 이뻐라하는 편이라 기억에 남아있는 그 차였다. 지갑을 꺼내 오는거 같았다. 내려올땐 차키랑 핸드폰만 들고왔으니...그러곤 뻘쭘히 내차옆에서 멀뚱거리는 날 보곤 말한다.
문자녀 : 저기 괜찮으시면, 맥주 한잔 하실래요? 그냥 하루종일
비도 오고 잠도 잘 안올거 같아서..그렇다고 혼자 마시긴
좀 그렇잖아요 여자혼자서..
(사실 문자녀가 옆에서 웃을때 약간 술냄새가 나긴 했다. 취한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나 : 아..네 전 뭐 괜찮지만 이시간에 맥주 마실수 있는 곳은 편의점
밖엔 없을거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2단지 관리사무실 앞
편의점앞에 비취파라솔 쳐놓은 그거 아시죠? 그게 있으니..
문자녀 : 네 괜찮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또 미친듯이 웃는다. 난 좀 그렇다. 첨본 여자랑 일대일로 말하면 뭔가 아무렇지도
않은듯 익숙한듯 또는 약간은 뻘쭘한듯 눈도 못마추고 그렇게 할 얘기는 다 하는 편이다. 그게 문자녀한텐 웃겼나보다. 그러곤 맥주 한캔씩을 결국 애써 손사레치며 문자녀가
계산하고는 비취파라솔 의자에 마주보고 앉았다. 홀짝홀짝 두세모금 마시고는 비냄새나는 바람이 너무 좋기도 하고 여자와 단둘이 이새벽에 맥주마시는것도 좋고 하여 편한
기분으로 축 늘어져있었다. (이때쯤 난 별로 낯설거나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고
원래 알던 1단지의 초등학교때 친구를 만난거 마냥 행동했다)
문자녀 : 원래 그렇게 낯을 안가리세요? 되게 편해 보이시네요..
전 좀 잘안되는데 그게..
나 : 아..아뇨...되게 낯가리는편입니다. 근데 가식이 도가 터서 그걸
충분히 숨기고 편하게 하는척 잘 하기도 해요..ㅋㅋ
맥주 한캔을 정말 천천히 무슨 와인이라도 마시는듯 음미하며 마시면서 이야길 했다.
가끔씩 웃기도 했고 아까보단 훨씬 편해 보였다.
내 예상이 맞았다. 문자녀는 상인동 Bar 에서 일한다. 새벽 2시쯤이면 마치고 집에 온다.
본집은 중구에 있으며 자기 혼자 나와서 산다. 언니는 결혼했으며 아기가 둘있다.
(그때 시끄럽게 뛰놀았던 아이는 역시 조카였다). 가끔씩 오후에 오다가다 마트에서
날 봤으며 내가 타고 가는 차도 봤고 엘리베이터 에서도 한번 마주친적이 있다.
문자녀 : 엘리베이터에서 그쪽이 같이 탔던 할머니 등에 업힌 아기
한테 뒤에서 웃긴 표정 지으며 같이 노는거 봤어요.ㅋㅋ
(별로 기억나진 않는다. 난 늘 대놓고는 못하고 겨우 아기들한테만
몰래 몰래 그짓거리를 한번씩 하니까)
나 : ㅋㅋㅋㅋㅋㅋ 제 낙입니다 엘리베이터 타면 심심키도하고..
문자녀 : 되게 친절해보여서 보기 좋더라고요..전 그러고 싶어도
부끄러워서 잘안되거든요..그래보고 싶은맘은 많은데..
(나보다 더 폐쇄적인 사람같았다. 뭔가 그런 느낌은 비슷한 사람들
끼리 느껴지는게 있게 마련이니까)
문자녀 : 저기..(고개 숙이곤 맥주잔을 만지작거린다)
나 : 네? 뭔 그리 어려운 부탁을 하시려고 뜸들이시는지..도배는
할줄 모릅니다. 설겆이 빨래 청소는 좀 하고요..
문자녀 : ㅋㅋㅋㅋㅋㅋㅋㅋ....내일 시간되시면 밥 같이 먹을래요?
아 날새고 오늘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건 사랑? 인연?)
고해성사 : 제일 처음 문자를 받고..다시 답문을 보낸데까진 모두 사실. 이하 픽션 (밤새도록 난 저 망상의 짓거리로 뇌를 괴롭히고 있었다)..사실 위층 힐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진 몇개월전부터 정말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