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그림은 임란시 포르투칼상인에 팔려간 조선인 노예 '안토니오 꼬레아나'로 네덜란드화가 루벤스가 그린 초상화입니다. 두번쩨 지도는 '한임'님이 올리신 지료를 제가 인용합니다 1704년경에 제적되었는데 그덩사 동남아 해상권을 장악한 네덜란드의 시각입니다.
달전에 문무님이쓰신 '임진왜란의 미스터리를 흥미롭게 읽고 대륙남쪽에서는 무슨일이일어닌걸까 궁금했읍니다. 최근 올리신글에 대만이야기가 나와서 제가 글을 올릴 용기를 냅니다. 고증을요구하거나 함부로 상상하지 말라는 비난은 사절합니다. 그런것이 있다면 여기서 제가 이럴필요가 없읍니다. 이빨빠진 곳을 채우는 재미로 쓴글이니 과님치 말고 봐 주십시요.
문무님의글중에서 ....
南 溪 先生<朴 文 純>公 文 正 集 卷 第 四 / 詩
박세채(朴 世 采) A. D 1631 - 1695 조선 숙종 때의 문신(1631~1695). 자는 화숙(和 叔). 호는 현석(玄石)? 남계(南 溪). 성리학자로서 숙종 20년(1694)에 좌의정이 되었고, 황극 탕 평설(皇 極 蕩 平 說)을 주장하였다.
送 尹 叔 麟 趾 完 奉使日本 二 首
寒泉邂逅幾經春.炎海離懷自損神.惟是此行王事重.勉將忠信服南人.聞說台灣在海隅.一方人士得爭趨.歸時?遇行商舶.爲問中天運有無。<去歲金相行.始聞一脈正統在鄭氏之說.今此使歸.又聞其地爲台灣島.江南略人士多歸之云.故?敢略及>
? 위의 글은 저자가 일본으로 사신으로 떠나는 “윤 숙 린”을 전송하는 글이다. 춥고 춥던 시기에 해후했다가 봄이 오자 또 뜨거운(아열대성 기후) 바다를 향해 가는 사신일행 중의 “윤 숙 린”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있는데, 문제는 <聞 說 台 灣 在 海 隅>이라는 문구이다. “들은 설명 또는 견문에 의하면”
-------▶ 【대만(台 灣)은 바다의 한 모퉁이에 있다】라는 본문 내용이 현 열도로 가는 사신 일행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 반도 부산이나 합 포(마산)등지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를 거쳐 큐슈나 후꾸오카 또는 나가사키로 가면 될 일을 수천 리 바다사이로 떨어져 있던 “대만”을 왜 들먹거리고 있는가?
위의 글을 보면 “귀로(歸路)” 즉 돌아오는 길에 일이 생기면 혹시 이곳을 거쳐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장사배(상선)를 이용하면 될 것이라는 것 같은데, 그 아래 설명문을 보면 당시 이 분들이 돌아오는 길에 바로 이 길로 돌아왔다는 것이며(今 此 使 歸), 또 들은 바로 그 땅은 바로 대만(台 灣)섬이고, 강남(江南)의 여러 인사들이 돌아올 때에 “대만(台 灣)”을 거쳐 왔다고 전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반도에서 현 열도를 가는데 대만과는 전혀 관계없고, 돌아올 때 역시 대만과는 전혀 관계없는 위치에 있다. (이상 인용마침)
[서세동점..]
1498년 포루트칼의 바스코다가마의 남아공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항로 발견을 시작으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의 동남아 진출이 가속화되고 한편 조선과 명에서는 ..
# 조선과 왜구
1419년 세종 이종무장군 쓰시마섬을 정벌
1426년 왜구근절을 단서로 삼포(부산포, 제포,염포) 개항.
1443년 신숙주를 쓰시마섬에 파견하여 쓰시마섬 도주와 계해약조를 체결
1510년 삼포왜란. 3포를 폐쇄
1512년 임신조약 체결,처음에는 제포1개 개항, 후에 부산포로 바꿈 개항.
1544년 사량진을 침범하여 사량진왜변 왜인의 왕래를 완전히 금지
1547년 또다시 일본의 사정으로 조선은 일본과 정미조약 왜인의 인원수까지 제한
1555년 강화된 규제에 불만을 품은 왜인들은 또다시 을묘왜변 일본과 국교를 단절
1592년 임진왜란
# 명나라와 포르투갈, 왜구
1517년 포르투갈인 廣州에 내왕.
무역 장소는 절강성의 영파(寧波) 지역으로 지정했다.
일본은 그 뒤 인원을 300명으로 늘렸으며. 16세기 초반부터 일본의 규슈 지방 상인들이 명나라
복건성 쪽 항구에 드나들면서 은을 옷감과 교환하는 무역을 벌였다.
1547년 이 무렵 에스파냐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절강성, 복건성 등지에 와서 무역 행위를 하자
명나라에서는 이들을 몰아내면서 일본 상인들도 함께 쫓아냈다.
그 결과.이후 일본의 조공선이 명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뒤 상인들은 아오먼(澳門, 마카오)을 근거지로 삼았다
일본(포르투칼) 상인들의 후원을 받는 왜구가 더 극성스럽게 해적질을 했던 것이다
1547 절강?복건 지방의 왜구를 토벌.
1557 왜구의 수령 王直을 체포해 처형. 포르투갈에 마카오 거주를 허용.
1563 복건에서 왜구의 주력을 격멸.
1567 명, 海禁정책을 중단. 왜구 진압 거의 종식.
1582 마테오 리치, 마카오에 도착.
1592 임진왜란, ‘영하의 난(몽고의 보배가 서북 영하지방에서 일으킨 난)
1597 정유재란, ‘양응룡의 난(귀주지방의 토관인 양응룡이 일으킨 난),
1601 마테오 리치, 북경에 도착.
1602 마테오 리치, ≪坤輿萬國全圖≫ 간행.
# 포르투갈의 식민지 과정(16세기 ~ 20세기)
1509년 인도네시아 포르투갈에 의해 식민지화. 1602년 네덜란드에 넘어감.
1510년 포르투갈은 인도 남서쪽의 고아를 합병한다.
1511년 말레이시아 포르투갈에 의해 식민지화. 1641년 네덜란드에,1824년 영국에 넘어감
1521년 마젤란 필리핀 도착. 1571년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
(1533년 *잉카제국 186명의 스페인군에 함락)
1543년 포루투갈 상선이 일본 다네가시마에 기착
1553년 포르투갈 물에 젖은 화물을 말린다는 구실을 내세워 처음 마카오를 방문했다.
1557년 포르투칼이 중국과 무역을 위해 중국 관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마카오 거주권을 획득.
이후 1840년 영국의 아편전쟁전까지 300년동안 중국에 유일한 유럽 식민지 였다.
포르투갈은 식민화 하는데 첫번째가 중국과의 교역 두번째는 카톨릭의 전파이다.
실제로 중국에 전래된 대부분의 서양문물(천주교포함)은 마카오를 통해서 들어왔다.
(포르투갈은 당시의 유럽에서 스페인과 식민지 경쟁이 붙었었다..중세유럽을지휘하던 교황은
로마왼쪽을 스페인에 오른쪽은 포르투갈에 나누어주고 천주교 포교밀 식민지화를 조정하였다)
1590년 대만(포모사) 포르투갈에 식민지화.
1. 그 당시의 포르투갈은 1509년 인도네시아. 1511년 말레이시아를 식민지화 하였고 그후 33년 이들 지역을 안정화시키고 현지정보등을 더 확보한 후 주둔지를 점차적으로 북쪽으로 넓혀간다.
그런데… 다음은 일본이다. 이것은 무슨 일인가? 이상하게도 거리상으로 가까운 마카오를 두고 일본에 먼저 기항하는 포르투갈의 상선(1543년),
일본이 마카오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증거는 아닌지?
그리고 10년후 1553년, 물에 젖은 화물을 말린다는 구실을 내세워 처음 마카오를 방문했다.
말이 상선이지 실질적인 해외 파병군이요 정탐활동이다.
말레이와 인도네시아에서 마카오나 베트남을 먼저 접근하지 그 먼 곳에있는 (현 열도)일본을 먼저 갈 이유가 별로 없어 보인다. 지척에있는 태국이나 베트남은 왜 그냥 두었을까? (그 당시 베트남 태국등은 점령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국력이 강하여서는 아닐 것이다.? )
만약에 베트남, 태국, 광서성, 광동성등의 일정지역이 원래 일본(왜)이였다면 베트남 태국이 점령당하지 않은 이유가 되고 일본을 먼저 방문하고 마카오를 접수한 이유가 납득이 간다..
포르투갈,스페인 네덜란드등은 동남아시아 남지나해 안에서 모든 정복전을 펼쳤다.
이 내해안에 중국(조선)인니,말레이 필리핀, 왜 등의 접경이 있었던 것이다.
동남아를 점령하면서 일본까지 올라온 그들은 왜 일본을 식민지화 하지 않았을까? 이미 마카오를 조차하고(1557년) 대만을 점령하였던(1590) 그들인데 왜 일본에만 관대했을까? (지팡구-황금의 나라라는데…무역보다는 수탈이 더 좋았을 터인데. 황금의나라?? 지금도 태국에 가면 사원과 궁전등이 화려한 황금빛이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는 금색으로 사원과 궁전을 치장하는 전통이 있는듯하다, 이방인이 보기에는 모두 황금으로 보일 것이다.)
2.그러던 중 스페인은 잉카를 먼저 정복하여 우위에 섰다.포르투갈은 이에 자극받아 동방진출의 관건인 중국(조선)정복에 대한 열망이 커졌고(저의 상상) 병력조달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본을 사주하여 대리전을 치른다.(이것이 임진왜란이 아닐까)
현지 원정군의 규모로는 중국점령이 무모한 것을 깨닭고 또한 본국에서 수만의 원정군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중국과 가장 가까이 있는 국가 현재의 베트남,광동, 광서등지에 있었을 것 같은 나라(왜)를 우군으로 만들어 정복전을 펼칠 계획이 있지 않았을까? 그 나라가 일본(왜) 이였다면 많은 의문이 풀린다.
3.1543년 포르투컬의 일본 기항후 일본의 서양문물도입은 적극적인데 이때부터 1600년(임란후) 까지 들여온 학문을 南蠻學(남만학) 이라한다. 왜 남만학인가? 대륙남부 말레이 인니에있는 포르투갈을 지칭하면서 그들에게 씌여졌던 남만의 오명을 벗고자 함이다. 그 이후 260년간 쇄국의 바쿠후 시대인데 나가사카 항만을 개항하여 네덜란드의 의학 과학만을 받아들인다. 이것을 난학이라 한다(그후 1860년 개항이후 양학, 서학으로바뀜).
여기서,, 일본이 현 열도에 있었다면 남만학이라는 학풍을 이룰 만큼 엄청난 교역이 있었는데.. 대만은 1590년에 식민지가 된다. 어떻게 50년 동안이나 대만을 지나 일본으로 가면서 그 동안 놔 두었나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는 기항도 하지 않고 무역거래 제의도 없었을까? 그 동안 조선은 투명의 나라였던가? 일본에 기항했을 때 수많은 왜구의 침략과 무역거래로 조선에 대항 정보가 없었을 리가 없다. 조선의 정보를 얻는 것은 쉬웠을 터이고 그 당시 일본보다 선진국인 조선을 그냥 두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어디에도 조선이 16세기에 서양과 접촉한 기록이 없다
4.1590년 대만을 점령한 포르투갈 그리고 2년후 1592 임진왜란..
1590년 대마도주 종의지가 조총을 들고 조선에 와서 협박하려 하자 새나 잡는 총이라고 무시 한데서 새총이란 의미로 쓰였으나, 포르투갈이 대만을 점령한 시점과 대마도주가 조선에 와 조총시위를 한 1590년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대만이 대마도이기 때문일 것 같다. 조선의 조총에대한 반응, 무역재개등의 목적으로 포르투갈의 사주로 대마도주가 왔던 것이다.그리고 도요토미는 1586년부터 임란전까지 1000여척의 전함을 준비한다. 전쟁준비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고 포루투칼의 대만(대마도)정벌은 전진기지 확보였던 셈이다.
한편 대마도(대만?)에서는 포르투갈 신부 세스페데스가 선교활동을 한다. ? 이자는 후에 천주교신자인 고니시를 따라 조선원정군에 종군함.
임란시의 포르투갈 종군신부인 프로이스. 그는 왜 일본군에 종군했을까? 사실은 참전한 포르투갈 수병을 위해서 였다고 한다. 대략 만명정도의 수병이 참전했다는 비공식 자료도 있다고 한다.
또 한명의 신부 세스페데스 - 대마도에 머물며 선교활동을 했던 포르투칼 신부이고 천주교신자였던 그는 고니시를 따라 임란에 종군하였던 인물이다.
=====> 년전에 이 종군신부 때문에 인터넷에 한참 논란이 있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일본군을 구세군으로 보고 조선군을 사탄의 군사로 말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천주교 포교 - 일본교회사중에서….]
십자군전쟁에서 패한 교뢍청은 그후 기독교포교에 길망하는데 막강한 그들은 대항해 시대에 포교를 조건으로 엄청난 지원을 한다.
1543년후 일본에 도착한 그들은 천주교를 전파하는데 많은 이들이 따랐다.
임란후 친토요토미세력(천주교신자등..)은 거세당하고 토구가와 집권후1614년 기리시탄(크리스찬)의 전면적인 금교령을 선포하고, 성당을 파괴시키는 한편 신자명부를 작성케 하며 단속을 강화하는 한편 외국인 선교사를 마카오와 마닐라로 추방하였다. 이런 박해 속에서도 일본교회는 수난을 이겨내며 신앙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후에 천주교도들의 반란도 일어나고 하여 박해를 받는다.(이상 인용)
한편 오다 노부나가를 암살하고 토요토미가 정권을 잡았는데 이 암살범은 카톨릭 집안의 독실한 신자였는데 오다 노부나가의 집사였고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았다 한다. 즉, 토요토미는 천민출신으로 (기독교의 평등사상에 매료) 오다의 2인자였으나 정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잡은 것은 전적으로 포르투갈의 배후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마치 친미쿠테타니 하는 것이다 - 김재규가 미국의 박정희 제거전략에 포섭되어 박정희를 죽이나 정작 정권은 전두환에게 돌아간 것처럼---이것은 사실확인이 어려우며 당시에 돌던 루머중의 하나임니다.) .]
6.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 종군신부, 그리고 안토니오 코레아와 같이 포르투갈 상인에게 팔려간 수많은 조선인이 있었는데 조선의 존재를 유럽에서 모를 리 없을 터인데…
(16세기말 포르튜칼이 왕위계승이 어려워 교황의 섭정으로 스페인 필립4세에게 선양되는데 그는 해양강국 포르투칼의 전력을 스페인에 이양한다. 이리하여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생기는데 이 함대가 영국 네덜란드의 연합함대에 깨져 주두권이 네덜란드 영국으로 넘어간다) 임란후 17세기초부터 네덜란드의 시대인데, 이때에도 일본과의 무역은 난학이 꽃 피울만큼 활발하다. 그래도 조선과는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 네덜란드인 하멜의 표류기가 전부인 것은 이상하다. 보잘 것 없는 나라라서?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식민지화 하기 쉬웠을 것이다. 만일 현 렬도가 일본이고 조선이 한반도였다면 일본의 지척이 조선인데 접촉조차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공산화 이론인 도미노이론처럼 동남아를 보면 그 지역은 모조리 식민지화되었다.
어쩌면 현열도가 일본이라면 한반도에는 별개의 나라가 있기보다는 대룩과 같은 나라이기 때문에 접근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현열도가 그당시 일본일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왜냐하면 왜구의 활동영역이나 포르투칼의 동점과정등을 보면 대만조차도 1590년(임란2년전)에야 점령되기 때문이다.
7. 마카오에 거주권을 산 1557년이후 아편전쟁시(1840)까지 근 300년간 중국의 쇄국
(유일한 개방항(식민지)이였던 마카오는 명나라가 준 것이 아니고 지방관리가 뇌물 받고 준 것이며 상부에 보고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중국도 접촉이 없다. 즉, 개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이 1555년 을묘왜변이후 1860년대 병인,신미양요때까지 300년간 거의 왕따 나라인 것 (1832년에 조선에 영국 이양선이 출몰하는 것 빼고…이 장면은 영국이 증국에 아편전쟁을(1840) 일으키는 시점과 겹친다)은 조선이 중국이기 때문인 것 아닌가?
그리고 임란후 1860년까지 마국의 함포시위까지 260년동안 쇄국정책의 일본..쇄국은 말그대로 주변국 왕래가 없다는 것인데 주변에서 아무도 모르게 이놈들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1800년 중반이후 서세(미,영,프)에 밀려 그들의 엄청난 화력과 국력에 어쩔수 없이 이들은 현 일본열도로 이주를 시작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바쿠후시대의 쇼군정치와 내전은 모두 현열도 토착민과의 투쟁사가 아닌지? 그러면서 역사도 가져가기 위해 수많은 사서를 조작하고….그리고 다시 대만은 일본에 의해 20세기초에 식민지가 되며,중국(특히 남부)을 점령하고 만주국 을세우고 조선을 병합하고 대동아 전쟁의 명분으로 동남아에서 전쟁을 별여 승리를한다. 고토회복 운동은 아니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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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왜구의 약탈? ? 이들은? ]
포르투갈은 일본과의 무역품으로 명의 물품을 요구하자 일본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또는 식민지총독(포르투갈)의 강압에 의해 명과의 무역이 끊긴 상태에서 약탈(왜구)에 나서게 된다. 또는 조총 같은 무기에 놀란 일본이 이 무기를 구입코져 그 대가로 무차별적 해적질을 한 것일 수도있다. (중국 동남부의 극심한 왜구는 기실 포르투갈의 치밀한 조정에 의한 게릴라 또는 교란 작전 이였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 조선과 명에 들 끓었던 왜구는 다른 집단인가 동일집단인가? 왜구가 현열도면서 포르투칼과 일본의 지원을 받았다면 이들이 조선과 절강 복건등지에 까지 나설정도로 활동을 한 것은 이해가 어렵다. 일본(왜)가 대륙남부(마카오)근처에서 암약해야 하기 떼문이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의 중개 무역을 통해 명나라 상품을 사들이는 것이 불편해(또는 목숨을 거는 약탈행위) 공식 무역의 길을 트려고 노력하면서 조선에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조선은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 공식기록(조작?)이라고는 하나 조선은 명과 같은 나라처럼 보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정권을 잡은 후 명나라와 무역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은 집요한 명나라와의 무역이 목표였고 명나라 물품이였다. 임진왜란의 명분도 정명가도였다.
그러나 정명가도 역시도 조작이 아닌가 의심된다. 그 당시 현열도에서 절강,복건등지에 엄청난 피해를 입힐정도의 왜구 실력이면 원양항해가 뛰어난데 이들이 곧장 중국동부로 밀고 들어가면 더 쉽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해안 해안가에서 계속 얼쩡거리는 왜군은 수상하다…보급로인 호남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호남에서 식량을 구한다치자, 어느 세월에 주력군에게 전달을하고..!! ) 이렇게 까지 집요한 명나라정복계획은 일본의 의사가 아닌 보이지 않는 힘 포르투갈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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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원인?]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가 막부들의 힘을 빼기위해 해외원정에 군사력을 차출했다는 설, 관심을 돌려 내치를 완성하기 위해 했다는설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임진왜란의 발생이유가 포르투칼 무기상인들의 교사에 의한 것이라는 일본 학자들의 견해도 상당히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포르투갈의 개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기상인이라는 말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왕정시대에 위험한 무기를 상인에게 판매권을 주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신을 겨눌 무기가 될수도 있는 것이니까. 포르투갈의 사주이다. 로마교황청의 귄위가 유럽을 덮고있을 때이니 식민지 점령전쟁은 허용하면서도 천주교의 전파를 큰 목적으로 삼았을 것이다. 포르투칼의 대리전을 치른 것이 일본이다. 전쟁을 수행할 수만의 병사를 유럽에서 배로 실어올 수가 현실적으로 없었다. 또한 엄청난 전비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전쟁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으로 대리전을 치른 것이 아닌가 한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담배, 빵, 즈봉, 카스텔라 화투 등의 외래어는 당시 포르투칼어에서 일본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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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
전쟁의 모습을 바꾸고 개전초 전과를 올린 이 총을 일본이 자체 제작했을까?
(물론 일설에는 일본의 한 장인이 포르투갈 장군에게 그 딸을 넘겨주고 그 댓가로 조총을 받아서 복제를 완성했다고는 하지만 믿기지 않는 일이다..)
군수기술의 이전이 필수적이다. 자체적으로 조총을 카피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 당시로는 첨단무기인데 화약기술, 주조기술, 가공기술등, 기반기술의 제공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무역으로 불가능한 이유… 조총무게 : 대략 20킬로그램/정 x 1000정 = 20톤 이정도면 배 한척에 실을수 있는 무게가 되지 않을까? (이순신장군을 죽인 조촐은 무게가 무려 28킬로입니다). 그러면 항해시간은 편도 10개월정도(현대의 동력선도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여 유럽과 부산까지는 한달이 걸린다. 현대의 동력선으로도 그 당시의 항로인 남아공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말라카해협, 대만 부산으로 오면2달은 걸릴 거리이다.) …수만정의 조총이 동원되고 병참용으로 있어야 될것까지 하면 10만정이 필요하다면 수백척의 배가 왔거나 아님 수십척이 수년에 걸쳐 왔을 경우뿐이다. 한가지 더 기가 막힌것은 바다위에서 10개월정도 조총이 노출되면 부분적인 부식은 피할 수 없다. (지금도 무역에서 해상운송시 조금만 패킹이 잘못되면 덩치큰 기계나 장비는 부식이 일어난다.--바닷바람의 염분) 따라서 무역에 의한 수입가능성은 희박하고 현지에서 자체 제작하지 않았을까? 이때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기술이전 없이 자체제작이 가능했을까? 아니다. 그럼 포르투갈이 아무런 이유없이 첨단무기를 일본에 전해주었을까? 아니다. 기술자의 지원과 제작장비는 포르투갈 왕의 결정없이는 되지않는 것이다. 해외파병군에게 부메랑이 될 수도 있는 무기기술을 현지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는 무기를 대량으로 써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가정이 틀려서 무역이 가능했다면 무기수입을 일본이 원하고 그 댓가로 포르투갈이 명나라의 물품을 원했다면 왜구의 난동으로 상징되는 해적질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리고 군수기술지원과 대리전을 하면서 이면deal이 있지 않았을까? 토요토미는 정권의 보장과 대륙의 땅 일부 할양을 담보로 수만의 생명을 사지로 몰아가지는 않았을까? 포르투갈은 거대한 식민지확보와 천주교전파의 목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