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의 시점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된 후,
- 1996년 그 해 여름, 시대유감이 발매된 직후이다.
"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그는 4개의 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줬다.
그 때마다 그는 가요계의 판을 완전히 엎어 버렸으며,
각종 신드롬과 이슈로 온 사회의 시선을 집중시키곤 했었다. "
문화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받기까지의 이 모든 과정들은
서태지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 이었다.
그 스스로가 스타를 만들어내는 프로듀서이며, 디렉터이고,
동시에 화려한 조명 아래 서있는 스타..자신인 것이다.
자신이 거대한 기업이며 또한 상품이라니 참으로 대단하다.
그러나 상품이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일인삼역을 해낸들 무슨소용이 있겠는가.
그 상품을 살 사람은 없을테니까.
.............서태지의 상품가치는 무엇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다, 음악이다.
음악에서 서태지라는 상품의 가치가 나온다.
그는 4개의 앨범을 통해
매번 다른 가수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언제나 앞서가는 음악을 선보였으며 다양함과 참신함은
그의 놀라운 감각으로 인해 신선한 충격까지 동반하는 것이었다.
가요계와 대중가요를 즐겨듣는 이들에게 서태지는
'절대 다름'과 '매번 다름'을 4년동안 각인시켰고,
그 '다름'은 앞으로 얼마동안은 자신의 이름과 함께
거론될 단어라는것을 알고있을 것이다.
이런점 때문에 일부 골수팬들에 의해
서태지는 '음악의 천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4살때 협주곡을 6살때 교향곡을
12살때 오페라를 작곡한 모짜르트가 아니다.
누구나처럼 눈만떼면 사고(?)치는 4살과
상처투성의 무릎을 갖고있던 6살을보낸 평범한 소년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누구에겐가 '천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음악을 자유자재로 만들게된 지금에서야 가능한 것이다.
이제 그가 범인(凡人)에서 천재적인 뮤지션이 되는 과정을
서태지 본인의 이야기와 시나위 4집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1.음악에의 입문
"팝 음악을 처음 알게 된 게 국민학교 때,
마이클 잭슨이었는데,노래가 신나서 알지도 못하지만
그냥 따라 불렀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중학교에 들어와 록음악,메탈음악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많이 들었던 그룹이 [머틀리크루], [신데렐라], [본 조비]같은 그룹들이었죠. 웬만한 메탈그룹은 거의다 알았고.
노래도 거의 외워서 따라할 정도였습니다."
"음악을 그냥 좋아한 것은 국민학교 때 팝송을 따라 부르는 정도였고, 결정적인 것은 음악 자체가 아니라 어느날 우연하게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게 된 전기기타 때문이었을 겁니다. 남들 앞에서 통기타가 아닌 전기 기타를 가지고 있으면 멋있을 것 같았어요. 친구들한테 잴수 있잖아요. 그리고 친구한테 그룹사운드를 하자고 꼬셨어요.
그 때는 악기도 하나도 없었고 그냥 그룹사운드라는 이름이 멋있어서 음악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그룹을 맘들었는데, 그게 [하늘벽]이란 그룹입니다. 그 때는 베이스기타도 없어서 통기타로 대신했고, 드럼은 주로 의자를 두들겼고, 심벌을 애꿎은 선풍기를 팼고, 피아노는 그대로 피아노를 쳤는데,
그래도 그 때 실력이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그당시 [들국화] 음악이 정말 좋았어요, 듣는 것도 그렇고 직접 연주하는 것도 그랬고 [들국화] 음악이 그 때 저에게 영향이 컸던것 같아요. 고등학교 들어오면서 [하늘벽]이 해체되고, 다른 친구들과 그냥 음악활동하면서 지냈는데, 어느 순간엔가 음악을 정말 전문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음악을 더 좋아하게 되니까 제 앞길이 생각되더라구요."
"그 때 한창 외국 뮤지션들의 음악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게 결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외국 뮤지션들은 그렇잖아요.
열일곱에서 열여덟까지가 연주자로서의 전성기를 맞는 때인데,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학교생활을 하면 도저히 내가 이루고 싶은 정도를 못할것 같았어요.
그리고 학교 다니면 머리도 못기르고 숙제도 많고, 음악에 전념할수 없기 때문에 갈등을 하다가 결국 음악만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서태지가 음악을 처음 경험하게 되는 것은 중학교 2학년때
[하늘벽]이라는 그룹을 통해서 이다.
이 그룹은 태지의 말처럼 어린애들이 모여서 남의 음악을 따라하거나 흉내내보는 정도의 모임(?) 이었다. 그러나 그룹활동은 음악에 더욱 빠져드는 계기가 되고 이때부터 그가 듣는 노래들은 내면의 욕망을 두드리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한 마디로 그의 '거대한 에너지'는
자신이 가슴에 안고있는 바로 그 기타라는 것을 알게되는 순간이다.
[하늘벽]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해체되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그칠줄 모르고 결국 그는 대학교 진학대신 '음악인생'을 선택한다.
당시 그가 즐겨들었던 음악은 메탈이었다.
"[시나위]에 들어갔을 때가 열 여덟이었고, 그전에 활동이 있었죠.학교 그만두고 먼저 머리를 기르고 [활화산]이란 그룹에 들어갔어요.그 형들이 당시에 언더그라운드계에서는 뛰어난 실력파였는데, 그 곳에서 연주하다 그룹이 해체되고 좀 쉬다 여기저기 연주하러 돌아 다녔어요."
기성의 시각으로 볼때 우리 현실에서 학교를 그만둔다는것은 인
생의 나락에서 헤어나올수 없는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다.
이것은 진학의 여부의 선택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제한
해 버린 것이기에 그의 음악 인생의 선택은 좀 더 운명적으로 보인다.
서태지는 87년 고1때 서울 북공고를 자퇴하고 본격적인 락밴드에 들어간다. 그것이 [활화산]이다. 이 곳에서의 활동은 1년도 채 못된채 마감되고 떠돌이 연주자생활을 하다가 88년인 17살때 시나위에 베이스 주자로 합류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연주 경력이 터무니 없이 부족한 서태지가 당시 중견언더 그룹
[활화산]의 베이스 주자로 들어갈수 있었던 것은 당시 베이스 주자를 구하기 힘든 상황을 고려할때 추론해볼 수 있다.
[활화산]의 멤버들은 베이스 주자를 원했을것이고 태지가 경력이 없는 연주자라 할지라도 그가 베이스를 칠줄 안다는 사실에 큰 점수를 주고, 부족한점은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쨋던 여기서 본격적인 그의 베이스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2.그룹[시나위]의 활동과 의미
"신중현씨가 하는 <우드스탁>이란 록 카페에서 이중산씨 소개로
우연히 연주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신대철씨가 옆에 있었나봐요.
그게 시나위에 들어가게 된 동기였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저한테 와서 [시나위]에 들어오지 않을래요 하고
제의를 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절할뻔 했죠....(중략)
그 후에 드럼 오경환씨와 보컬 김종서씨가 모여서 [시나위] 4집을
만들게 됐습니다. 우연히 가서 픽업되었다고나 할까요."
신대철은 시나위 신보를 위해 맴버를 알아보던 중이었을 것이다.
그때 매일 <우드스탁>에서 죽치고 있는 한 머리긴 소년을 눈여겨보곤 그를 불러 오디션을 해보고 즉시 픽업해버린다.
그일이 [시나위] 재건의 출발이 되어 후에 오경환과 김종서를 불러 모아 온전한 팀을 이루게 된다.
국내 최고의 그룹에 17세라는 어린나이에 합류하게 된 것은
서태지에게 있어서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러나 이 행운은 단지 프로필을 장식하는 화려한 이름을 얻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물론, [시나위]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다.) 그가 [시나위]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lucky guy'인 것이다. 서태지는 음악하는 방법의 거의
모든 것을 이 [시나위] 활동을 통해 배우게된다.
너무 먼길을 온것 같은데 간단히 태지의 음악 경력을 정리해보자.
.85~86년 [하늘벽] 당시 중2-3
.87년 북공고 1년 자퇴
.87년 [활화산] 베이시스트
.88년 [시나위] 베이시스트
.89년 [시나위]4집 발표
.91년 [서태지와 아이들]결성
.92년 [서태지와 아이들]1집 발표
"정말 저희만큼 연습을 많이 하는 그룹도 아마 없었을 거예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 6,7시간씩을 <우드스탁>에 살면서 똑같은 곡들을 게속 연습했어요.....(중략)
팀이 만들어지고 바로 4집작업에 들어갔는데,
그 곡에 대한 연습을 하고 콘서트 같은 것도 없으면서도
그냥 해야 되는 건지 알고 연습만 했어요.
그때 실력이 많이 늘었던것 같아요."
"제가 작곡에 참여한 일은 없고요.
저희들(시나위-필자)이 곡을 만드는 방식이,
먼저 대철이 형이 기타 리프를 만들고 거기다가 제가 베이스를
만들고, 각자 개인 편곡을 했죠.
코드만 나오면 각자 자기 진행을 만들었죠.
그 때문에 연습을 굉장히 많이 했죠. 제가 참여했다면
베이스 편곡하고 드럼 편곡 정돕니다."
[활화산]이 서태지에게 베이스 치는 법을 가르친 선생이었다면
[시나위]는 음악을 가르-? 종합교육장이었다.
단순히 베이스만 치는것이 아니라 곡을 만드는 법,
멤버들이 모여 음악을 완성해 나가는 방법,
그리고 기본기를 닦는 끊임없는 연습과정등을 통해 서태지는 음악하는 거의 모든 방법을 배웠다.
[시나위]야 말로 제대로된 락그룹의 기본을 아는 유일한 그룹인 것이다.
시나위가 곡만드는 방식을 보자.
우선 신대철이 기타 리프를 만든다.
그러면 태지가 베이스를 만든다.
여기서 곡의 대부분이 완성된다.
그리고 멤버들이 모두 모여 연주를 죽도록(?)하면서
곡이 그럴듯해질 때까지 각자 자기 파트의 편곡 작업을 한다.
그 후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게 되어 멜로디와 가사등을 붙이게 되면 하나의 곡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가요 작곡방법과 비교해 보자.
작곡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코드 몇가지를 기타 혹은 키보드로
연주해보면서 하나둘 괘찮은 멜로디를 구상하고 그것을 쌓아둔다.
이것이 작곡의 끝이다.그렇다면 편곡은?
쌓아둔 멜로디 중 뜰 것으로 예상되는 곡이 선별되면 편곡담당에게
넘겨 곡을 그럴듯하게 되면 반주테잎을 만든다.
이 반주테잎에 맞춰 가수가 노래를 하고 이렇게 완성된 곡은
녹음되어 음반으로 나온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들은 선율 자체가 기승전결 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뻔한 식의 곡 구성으로 인해서 편곡자체도 천편일률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결국 가요계의 대부분의 곡을 들어볼때 뻔한 인상을 주는 것은
곡 자체가 일정한 패턴의 선률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그 고정된 틀을 벗어날수 없고,
그렇기에 다양하고 수준높은 곡을 선보일수 없는 것이다.
리듬 중심의 곡을 선보이고있는 근래의 가요계는 이런 것과는 다른 작곡법을 택하지만 역시 재대로된 음악을 만들지는 못한다.
드디어(!) 태지의 곡만드는 방법이다.
태지는 기본 코드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베이스를 중심으로 곡의
기둥을 만든후 여러가지 악기로 편곡을 한다.
편곡이 완전히 끝나면 곡이 완성되는 것이고
여기에 가사를 만들고 멜로디를 붙인다.
그에게 멜로디는 곡의 중심이 아니고
곡을 채워주는 하나의 악기와 같은 것이다.
공윤의 가사사전 심의로 인해 연주곡으로 실린 <시대유감>이
가사와 멜로디가 없다고 해서 수준이 떨어지던가?
instrumental로 들려주는 <발해를 꿈꾸며>가
어설픈 느낌을 주던가?
절대 아니다.
태지의 곡이 여타의 가요 곡들처럼 진부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선진적인 -그러나 당연한 - 작업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시나위에서 배운 것이다.
[시나위] 4집에서 태지는 베이스를 편곡하고 리듬부분에 참여하며
곡 만드는 과정에서 음악작업 스타일을 완전히 익히게 된 것이다.
태지가 갖고 있는 천부적 리듬감도 시나위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을 것이다.
시나위에서 활동은 그에 있어 정말로! 행운인 것이다.
시나위에 감사하라?? 신대철에게 감사하라??? ^^;;
3.[시나위] 4집
이제 [시나위] 4집을 통해 시나위와 서태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시나위 맴버와 4집 수록곡은 다음과 같다.
.신대철-기타,키보드,백보컬
.김종서-보컬
.서태지-베이스,백보컬
.오경환-드럼
1.1990 - 신대철 작곡
2.SET MY FIRE - 신대철 작사/신대철,김종서 작곡
3.FAREWELL TO LOVE - 김종서 작사/신대철,김종서 작곡
4.겨울비 - 신대철 작사/김종서 작곡
5.IN YOUR BROWN EYES - 김종서 작사/신대철,김종서 작곡
6.내마음속의 여행 - 김종서 작사/신대철,김종서 작곡
7.PLAY THAT WILD ROCK'N ROLL - 김종서 작사/신대철,김종서 작곡 8.ME-TA httpLIZER - 김종서 작사/신대철,김종서 작곡
9.BOLERO - 끌로드 라벨 작곡(클래식곡)
10.황무지 - 신대철 작사/신대철작곡
89년 당시의 녹음기술 탓인지,
[시나위] 4집을 한 곡만이라도 들어보면 음질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쉽게 느낄수 있다.
좋지않은 녹음상태를 감수하고 들어본 [시나위]4집은 의외다.
한국 대표적 메탈그룹시나위에게서 메탈적인 부분을 충분히 느낄수 없는 앨범이었기 때문이다.
곡들을 살펴보면 김종서가 대부분의 곡을 작곡했는데,
그것은 시나위가 변화의 몸부림속에서 나온 음악적 선택이었다.
80년대 말 세계적으로 메탈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시나위 역시 그 영향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변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때 [시나위]는 '보다 대중적인 락'이라는 깃발을 선택했고
그것이 김종서이다. 종서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을 것이다.
[시나위]는 최고의 메탈그룹이다.
또 4집에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보다 대중적'이라는 구호이다.
이 두가지가 4집의 중요한 요소이다.
'FAREWELL TO LOVE'와 '겨울비'가 A면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데
[시나위] 4집을 모두 들어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두 곡만으로도 이들 4집이 어떤곡들로 꾸며져 있는지 짐작하는 근거가 된다. 이 4집은 종서의 모토인 '쉬운 락'을 대철이
적극 수용함으로써 시나위의 변신을 모색한 앨범이다.
종서의 가요적인 멜로디가 주가 되고 대철의 메탈 기타가
허술한 부분을 매꿔주는 형태로 되어있다.
종서와 대철의 라인이 앨범의 핵심이다.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종서가 대중적이고 가요적인
락이라면, 대철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듯이 메탈 그 자체이다.
그들의 4집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잘 나타나있는데,
A면은 보다 대중적 락 곡으로,
B면은 보다 메탈적인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A면의 곡들은 종서가 말하던 '좀 더 편한 락' 이다.
B면 곡에 비해서 보다 종서적(?) 으로 대중적이고 가요적인 락곡들
이다.
중간중간 신대철의 기타가 그나마 메탈적 성격을 더했을 뿐이다.
아마 김종서의 모든 것을 발휘한 음악이었을 것이다.
그의 요즘 음반들을 보면 역시 이틀에서 크게 벗어 나고 있질 못하다. 그룹이었을 때는 멤버들과의 음악적 작업과 교류등으로 인해
자신의 음악이 손질이 되어 완성도를 높일수 있으나
과거 멤버들과 함께 했던 모든 부분을 혼자서 해내려니
다양함과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요즘의 종서는 아직까지 [시나위] 4집에서 완전한 탈피를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종서는 지금까지 발전은 없었단 말인가?
(이 부분에서 음악의 한계에 도달하면 언제든지 그만두겠다던 인터뷰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악동같은 생각일까? ^^;; 그러나 비록 부족하다해도끊임없이 노력하고 자리를 지킬 사람이 절실하다.)
좀더 메탈적인 곡으로 이뤄진 B면은 앞면에 비해 생동감이 있다.
전체적으로 힘있는 연주를 보여주서 시나위다운 열정을 맛보게 해준다.
이 앨범에서 서태지의 베이스는 다양한 것 같다.
곡마다 다른 변주와 속주가 잘결합되어 있다.
비록 서태지의 베이스가 아주 돋보이는 연주 실력을 선보이고 있지
는 못하지만, 곡 전체를 탄탄히 바쳐주며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고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공격적인 베이시스트의 경우 기타를 오히려 리드하며 서로겨루거나 밀고당기는 연주를 하기도 하는데,
서태지에게서는 그런 점은 찾아 볼 수 없다.
묵묵히 역할을 수행하는 충실한 베이스인 것이다.
서태지의 베이스를 가만히 들어보면 신대철의 어두운 기타색과는 달리 가볍고 밝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일반적으로 메탈베이스라면 묵직하고 공격적이라는 선입견을 갖기마련인데 태지는 통통 튀는 듯한 느낌의 상당히 감각적인 연주를 한다. 태지의 베이스 연주중 돋보이는 곡이 있는데,
그 곡이 'ME-TA httpLIZER'이다.
이 곡에서는 상당한 속주를 보여 주고 있다.
태지는 인터뷰에서, 노련한 형들과의 실력이 차이가 있어
따라가기 힘들었던 것이 시나위 시절에 가장 어려웠던 것이라고 밝혔다.
'손가락 길이'가 최근까지도 자신의 신체중에 가장 불만인 것을 보면 아마 연습 하는 동안 자신의 손가락 탓을 수없이 한 모양이다.
그 짧은 손가락으로 속주를 보여준 태지에게 박수라도 쳐주자.
(이건 사담인데, 은퇴 기사후 잠적 때, 은퇴 후 태지의 은둔 생활을 걱정하는 말을 하자 태지가 '정글에서 도마뱀이나 잡아먹고 살바에야 자살하고 말겠다면서 인천 앞바다에 '손가락 짧은시체'가 떠오르면 난줄 알라'고 농담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
서태지팬의 입장에서는 그가 좀 돋보이는 베이스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 해 아쉬움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나위]의 얼굴은 누가 뭐래도 신대철이며,
서태지는 그를 바쳐주는 베이시스트이면 족한 것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에서는
[시나위] 4집에서만큼 다양한 베이스를 접할수 없다는 점이다.
4.시나위 해체
"사실 팀(시나위-필자) 해체는 미리 예견된 것이었을 거예요.
첫째는 음악적인견해차이가 컸죠.
개인마다 견해가 다 달랐으니까요. 저 같은 경우는 지금도 조금하고있는 새로운 형태의 스타일을 하고 싶었고요.
대철이 형은 오직 정통 록만을 고집했고,
종서형은 그것보다는 조금 편한 록을 주장했어요...(중략)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해체된 이유는 망한 콘서트 때문이죠."
"말도 안되는 제작자들을 만나서 사기를 당했는데,
그때는 제작이나 홍보 같은 것에 신경을 잘 안쓰던 때였잖아요.
저희는 잘 알아서 준비해줄줄알고 전날까지 연습실에서 열심히
연습하고 88체육관을 갔죠.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거의 무대가 없었어요. 조명도 몇개 달려 있지도 않고,
공연 시작 2시간전인데도 무대를 짜는 망치소리가 들리고,
줄이 안 보인 정도로 굉장히 많이 왔어요....(중략)
시간이 돼서 어쩔수 없이 관객들을 입장시켰는데,
조명은 말할 것도 없고 악기도 제대로 준비된 것도 없고,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구요. 그 때 종서형이 관객들도 많이 왔는데, 돌려보낼 수는 없고그냥하자고,
무조건 해야된다고 그러더라구요....(중략)
무대에 올라가 사정 말씀드리고 공연을 시작했죠.
공연은관객들이호응을 잘 해줘서 재미있게 끝났어요.
그런데 공연마치고 서로 굉장히 안좋앗어요.
그렇지 않아도 서로 음악적 견해가 달라지기 시작할때였는데,
말도 안돼는 공연을 하고 나니까, 한동안 굉장한 슬럼프에 빠졌죠.
그러다 서로 논의 끝에 해체하게 되었는데,
해체하고나서 각자 가기의 견해에 따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된 일인것 같기도 합니다."
시나위는 최고의 메탈그룹이었고
여기 모인 멤버들에게 더 이상의 선택은 없었다.
그렇기에 다른 음악적 견해가 있다하더라도서로 조화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러나 음반을 낸 이후로 종서와 대철의 견해 차이는 커갔고 결정적으로 콘서트가 실패하면서 둘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이 악화되어 '이런식으로는 못한다'는 선언을 했을 것이고 시나위는 결국 해체를 선택하게 된다.
신대철은 시나위가 선택한 대중적인 4집이 마음에 안들었을 것이고, 종서는 그런 대철의 견해와 늘상 맞부딛혔을 것이다.
결코 그런일은 없었겠지만,
시나위가 이때 해체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멤버들간의 음악적 견해를 시나위가 하나씩 흡수하고 조화를 해나가는 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만일 이 4집의 멤버 서태지, 김종서가 그대로 남아
신대철과 시나위로 함께 음악을 했다면,
아마 상상해 보건데 시나위는 국내 가요계의 판도를 뒤집었을지도 모른다.
가요계가 지금처럼 하나의 장르 속에 파묻혀 허우적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양한 장르의 곡이 선뵈었을 것이고 한국 락의 진보가 이뤄졌을 것이다.
시나위와 대철의 위치도 달라졌을것이다.
한국대중음악의 독보적인 그룹과 그 리더 신대철로 말이다.
그때의 시나위는 상당히 다양한 음악을 하는 그룹일 것이다.
서태지의 밝고 경쾌한 메탈 - 내맘이야, 제킬박사와 하이드와 같은 것 - 을 하기도 하고, 메탈랩 그룹의 모습도 보여주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종서의 가요적인 면을 흡수한 한국적 락(?) -
겨울비, farewell to love, 플래스틱신드롬 - 같은 곡들이
다양한 형태로 배출되었을지도 모른다.
[시나위] 4집에서 처럼 대철의 멋진 기타가 곡의 빈곳을 채워주고, 많은 연습과 다양한 시도를 한다면 명실상부한 최고의 그룹이 되었을 것이다.
시나위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한마디더 한다면,
그동안 시나위는 여러번의 해체와 재결성과 맴버교체가 있었다.
이럴 때마다 시나위의 잡음이 함께 들린다.
5집의 보컬 손성우의 탈퇴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문제점을 풀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극단적인 처치 방식은
그동안 많은 시간과 노력의 결과를 시나위 스스로가 간단히 쓰레
기통에 버리는 것 밖에 안된다. 무엇이든 하루아침에 되는것은 없고
발전은 시간을 전제로 한다.
좀 여유를 갖고 상대가 실력을 키울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맘에 안든다고 팀을 해체하거나 멤버를 갈아치우는 것은
진중히 음악을 하는데 도움이되지 않는다.
신대철 본인과 국내락의 발전을 위해서,
작은 땀이라도 헛되히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토록 미워한(?) 종서가 현재의 종서로 발전하지 않았는가.
조금 시간을 두고 잘할수있도록 용기를 주는 시나위가 되었어야 한다. 그렇다면 많은 것 - 음악의 질적 향상과 부귀와 명성까지도 - 을
얻었을 시나위이다.
시나위는 해체되었다. 서태지는 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래도 락을 하고자했기에, 팀을 만들기위해 뛰어다니기도 했으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 막막한 마음에
일본으로 가려고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서태지는 정말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힘들고 괴로웠다.
..그러다가 번뜩이는 사업방향을 결정했다.
그것은 바로 랩댄스, 바로 청소년을 위한 음악이었다.
치렁치렁한 머리를 자랑하던 메탈연주자 서태지에서
벙거지모자에 반바지를 입고 춤추며 노래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서태지로 충격적인 변신을 꿈꾸게 된 것이다.
5. 그리고.....
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하기로 결심했던날,
긴 머리를 자르고는 지하철을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결심이 무척 뿌듯했으며 만족해했다.
그는 다짐했을 것이다.
비록 당분간은 랩댄스를 하겠지만,
언젠가는 그의 영혼과도 같은 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그렇기에 일단 지금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야 할 것이라고..
또한..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이 기회라고..
그는 "난 알아요" 와 회오리춤을 들고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 음악의 역사는 바뀌어 버렸다.
기성세대는 그에게 우려의 눈길을 보냈고,
10대를 비롯한 수많은 팬들은 그에게 절대적인 애정을 보여주었다.
서태지의 랩과 패션은 한 사회의 트렌드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그 순간..서태지..본인은 어떤 생각을 했을가?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라는 최정상의 위치에서
그 공고한 지위를 포기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위해
서태지와 아이들을 해체하고
외로이 먼길을 떠났어야만 했던 서태지는..
가끔씩은 대중과 타협하고 싶지 않았을까?
난 정말 궁금하다. 그리고 본받고 싶다. 서태지의 열정이..
P.S
- 서태지와 아이들이 4집활동을 마치고 은퇴했던 시기에
- 어느 칼럼니스트가 썼던 글이 내게 남아있었다.
- 서태지와 직접 나눴던 대화를 토대로 씌어진 글이라서
- 당시에 매우 인상깊었던 기억이 난다.
- 이 글에서 시나위와 관련된 부분은 거의 살리고,
- 나머지 부분은 내가 완전히 새로 썼다.
- 미진하고 덧붙히고 싶은 부분들이 제법 남아있지만,
-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는게 적절할 듯 싶다.
- 틈틈히 시간을 쪼개서 써놨던 글인데 마무리 지어서 기쁘다. ^^
- 시나위와 관련된 얘기들은 정말로 새롭고 알찬 내용이었다.
- 처음 글을 쓰셨던 분께 정말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