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7일, 박재범이 낙산에서 열린
'Summer Week&T'의 무대에 섰다.
그가 '믿어줄래'를 부르자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재범아 기다렸어" 같은 피켓을 든 팬도 있었다.
박재범이 돌아왔다.
팬들 앞에서 공연을 한다.
지난해 한국 비하 논란으로 한국을 떠난 지 1년여 만의 일이다.
올해 초 그의 전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가
'심각한 사생활 문제'를 주장하며 2PM에서
영구 탈퇴시기기도 했던 그 박재범이다.
하지만 그는 2PM을 떠난 뒤 오히려 더 큰
상업적인 파괴력을 얻었다.
'믿어줄래'는 음원과 음반차트를 싹쓸이했다.
최근에는 CF계약을 맺었고, 결국 JYP보다 더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는 싸이더스HQ와 계약까지 했다.
게다가 '써머 위크앤티' 공연 전 기자 간담회에서 만난
재범에 따르면, 그는 현재 "음악도, 춤도, 머리 스타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아이돌이 이만큼 뜨거운 팬덤을 가진 채
이만큼의 자유를 누린 적은 없었다.
악플러나 아이돌포비아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재범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듯 하다.
"제가 잘해서도, 제가 대단해서도 아니에요,
다 팬들 덕분인 것 같아요. 진짜...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꼭 갚아 드릴게요."
그의 말투는 덤덤하게 들릴 만큼 차분했지만,
힘을 잔뜩 넣은 채 팬들에 대한 사랑을 과시하는
의례적인 멘트와는 달랐다.
실제로 재범의 팬들은 그가 유튜브에 올린
'Nothing on You'에 엄청난 반응을 보내
음원 저작권자인 위너 브라더스에서 이례적으로
아시아에서 번안곡을 녹음하는 것을 제안하도록 만들었고,
'믿어줄래'는 재범이 도아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학적으로 1<6이다.
사회적으로 스캔들에 연관된 연예인은
그렇지 않은 연예인보다 활동하기 어렵다.
하지만 재범의 팬 중 상당수는 2PM 대신 그를 선택했다.
2PM의 몇몇 대형 팬페이지는 박재범 팬페이지로 바뀌었고,
그의 미니 앨범 판매량은
2PM의 최근 정규 앨범 판매량보다 높다.
그는 수줍은 표정으로
"누나 같은 팬들이 저를 불쌍하게 생각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누나 같은 팬들은 기부천사가 아니다.
그들이 재범을 선택한데엔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가 있다.
애초에 그들 입장에서 재범은 미국으로 떠날 이유조차 없었다.
MBC <PD수첩>은 재범이 올린 글 중 상당수가 오역돼
퍼졌다는 걸 밝혔고, 진중권은 한국인 특유의 애국주의를
비판하며 "대중이 재범에게 사과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아이돌 스타가 10대 시절 적응하기 어려운 한국 생활에
불만을 털어놓은 것을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사실상의 추방까지 이어질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생활 문제도 정확히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다.
연예인이라면 미니홈피 해킹과 파파라치를 각오하고 사는
한국에서 말이다.
정말 '심각한 사생활'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지 않는 한,
재범의 팬이 그를 좋아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이유도,
그를 배척할 이유도 없는 셈이다.
반면 그들이 2PM 대신 재범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JYP는 영구탈퇴 사실을 알린 뒤,
2PM과 팬들과의 간담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2PM 멤버들은 박재범을 비난했다.
2PM입장에서는 팀을 위기에 빠뜨린 박재범이 미울 만도 하다.
JYP는 자신들의 공지보다 멤버들의 말이
팬들을 더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담회는 아이돌 팬덤을 '고객'으로 하는 회사에서는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특히 2PM처럼 아이돌 팬덤 특유의 판타지가
인기의 핵심 이유였던 그룹이라면 더욱 그렇다.
JYP는 댄스 그룹 2PM, 발라드 그룹 2AM의 구도를
그들을 '형제그룹'이라는 공동체로 묶었다.
그들이 첫 출연한 리얼리티 쇼는 2PM과 2AM 멤버가 될
예정이었던 연습생들을 모두 모아 합숙시킨
M.net <열혈남아>였다.
또한 2PM이 본격적인 팬덤을 만들기 시작한 건
MBC에브리원 <떴다 그녀>를 통해서였다.
그해 발표한 'Again&Again'은 발표 직후 실시간
음원차트 1위를 했다.
<떴다 그녀>에서 그들은 마치 개구쟁이 아이들처럼
뒤엉켜 놀았고, 그와중에 각자의 캐릭터를 보여줬다.
재범이 2PM의 리더라는 상징성을 가진 것도
방송에서 멤버들의 관계를 조절하는 '리드자'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아이돌의 솔로 활동이 당연시되는 시대에,
2PM은 이상적인 남성 공동체에 대한 판지를 보여줬다.
그건 <슬램덩크>가 여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god가 MBC <육아일기>로 인기가 급상승한 것과 비슷했다.
실지로 팬들은 그들을 <슬램덩크>의 캐릭터와 비교했고,
업계에는 신화와 god의 옛 팬들이 2PM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여기에 JYP의 오너 박진영은
인터넷에 올리는 사진들로 자신을 그들의 '형'으로 포지셔닝했다.
모아 놓기만 해도 웃기고, 사장부터 아이돌까지 모두 훈훈한
관계를 가진 아이돌 그룹, 그들은 신화와 god 이후 오랜만에
나타난 클랙식한 아이돌이었다.
물론 그저 팬들의 판타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판타지가, "팬질"할 맛이 나는 아이돌 공동체가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기대가 'Again&Again'과
'니가 밉다'를 정상에 올렸다.
남은 건 다음 앨범에서 '대박' 내고 대관식을 치르는
것뿐이었다. 2PM은 팬덤이 키워내고, 팬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아이돌 그룹이 부활할 수 있는 기회였다.
재범이 탈퇴가 2PM의 다른 멤버들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H.O.T. 출신의 강타는 MBC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에서 "해체하면 내 팬이 1/5은 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라"고 했다. 판타지는 그것이 깨지는 순간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신화가 아이돌 팬덤에서 '레전드'로 평가 받는 건
그들이 온갖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며 12년째 그룹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JYP는 재범의 탈퇴 후
2PM의 '의리'를 강조했다.
당시 앨범 타이틀은 불안전한 2PM을 상징하는 1:59였고,
멤버들은 계속 재범의 귀환을 암시했다.
헤어진 6명의 멤버가 원치 않는 국외자가 된 리더를 기다리는
이야기, 이것보다 완벽한 아이돌 판타지는 없었다.
하지만 간담회 이후 팬의 판타지는 완전히 무너졌다.
회사와 멤버들은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공동체가 아니었다.
멤버는 경우에 따라 퇴출될 수 있는 직원일 뿐이었고,
팬은 정 싫으면 떠나도 되는 '고객'이었다.
그순간 아이돌에 대한 꿈은 재범으로 넘어갔다.
강제 탈퇴와 간담회를 기점으로,
그는 1/7의 지분 대신 아이돌 팬덤이 2PM에 투사한 판타지
모두를 가져갔다.
재범이 팬덤의 척도인 음반판매량을 4만 장 이상 기록한 건
2PM시절 박재범의 개인 팬들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 입장에서 2PM의 정체성은 남은 여섯 명이 아니라
재범에게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2PM의 'Without You' 발표 후 기존의 인지도로 드라마,
예능 등에 출연하며 팬덤 바깥의 대중과 만난 데는
이유가 있다. 반면 재범은 여전히 자신을 지지하는 팬덤과
직접 대화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Nothhing on You'가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면서 국내 복귀의 발판을 마련했다.
팬덤 입장에서 그는 일종의 판타지 아이돌이다.
그는 팬과 대화하고, 팬에 의해 성장하는 아이돌이며,
대형 기획사와 계약하면서도 자신의 음악에 대한
결정권까지 얻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음악을 하면서
"제가 돌아올 수 있었던 건 팬들 때문이었어요."라고 말하는
아이돌이란 H.O.T.시절부터 아이돌 '팬질'을 해온 사람들에게는
꿈에서나 상상하던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재범은 2PM의 탈퇴를 통해
가장 아이돌적인 아이돌이 됐고,
팬과 아이돌은 공동 운명체가 됐다.
그러나, 이 영광은 아직 팬덤 안에서만 가능하다.
'믿어줄래'는 상당한 성공을 거뒀음에도 KBS<뮤직뱅크>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의 소속사가 대중의 정서를 감안해
그를 순위에서 제외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기자간담회에서는 여전히 그와 2PM의 관계에 대해 묻는
질문이 나왔고, 그의 안티는 팬미팅 티켓이 높다는 점을 들어
비난을 쏟아내기도 한다.
재범 역시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기자간담회 내내
조금은 긴장된 모습으로 있었고, 자신에게 인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여 인사할 만큼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현재 한국에서 재범의 위치는 팬덤의 지지를 받으며
활동할 수 있는 정도지, 이를 바탕으로 해서 대중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최근의 아이돌이 결국 톱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팬덤과 대중의 지지를 얻어 CF나 해외 진출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는 아직 온전히 한국에 돌아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강력한 팬덤은 그의 가장 큰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중과의 거리감을 만드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팬덤이 재범에 대해 열광할수록,
대중은 그가 그만큼의 실체를 가졌는지 궁금해 한다.
그건 처음에는 재범에 대한 기대감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그저 거품으로 취급 받을 수 있다.
현재 촬영 중인 <하이프네이션> 같은 댄스 영화가 아니라
일반적인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면 '이거 저거 다한다'란
말을 듣기 십상이고, 발표한 음악이 음악성이든 대중성이든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면 '역시 거품'이라는 비난이
쏟아질 수도 있다.
재범이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한 'Nothing on You'를 통해
한국에서 활동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Nothing on You'는 두말할 것도 없이 좋은 곡이었고,
곡의 세련된 이미지는 재미교포 보컬리스트이자 비보이 출신의
아이돌인 재범의 이미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지금 재범에게 필요한 건 이런 작업들로
트렌디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의 영역을 다지는 일이다.
게다가 재범은 낙산 페스티벌 이전까지 솔로로 무대에 선
경험이 없었고, 비보이 활동 외에 다른 무대 안무를 짜본
경험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팬덤을 바탕을 한
스타성만으로 섣부른 활동을 하는 건 그만큼 검증되지 않은
영역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현재의 박재범은 아직까지는 아이돌 세계의
비극적인 신화의 주인공이다.
팬덤과 대중의 온도 차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걸 돌파하고 대중에게 다가서야
박재범은 진정으로 아이돌의 세상이 아닌
한국 사회에 돌아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누구 때문에 여기 서 있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그는 "많은 뮤지션들과 작업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조한 같은 여러 아티스트들과의 교류를 통해
음악적인 역량을 보충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가 최근 참여한 용감한 형제의 노래 '울고 싶단 말야'도
그의 가창력을 강조할 수 있는 고급스러운 느낌의
R&B 트랙이었다.
아이돌 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오고,
지금도 마음껏 활동할 수만은 없는 다크 아이돌.
그가 대중에게도 팬덤 만큼의 환호성을 받을 수 있을까?
아이돌의 시계가 1:59에서 멈춘 뒤,
지금까지 보도 듣도 못한 아이돌의 연대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