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는 40세 많게는 60세가 넘은 여고생들이 있다. 비록 ‘늦깎이’지만 자다가도 영어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공부에 대한 열정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은 수능 준비를 하면서도 학교행사에 빠지지 않는 열혈 학생들이기도 하다. 졸업까지 앞으로 5개월 남짓. 남은 시간이 아깝고 소중하다는 일성여고 3학년생들의 생생한 ‘여고시절’ 이야기를 들어봤다.
학교 가려고 3주 진단 받고도 3일만에 퇴원
오전 9시 일성여자중고등학교(마포구 염리동)의 등교시간. 손에 수첩을 든 ‘엄마’들이 가방을 메고 교문에 들어선다. 수첩에는 영어 문장·사자성어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눈에서 빛이 난다. 일성여중고는 가난과 결혼 등의 이유로 학업을 접어야 했던 중년층 이상 주부들이 다니는 학력인증 학교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각각 2년제로 운영된다.
일성여고 3학년 고숙진(58·경기도 수원시)씨는 수원에서 왕복 4시간 걸려 매일 등하교를 한다. “지각·결석을 한 번도 안했어요. 교통사고가 났을 때도 지각하기 싫어 택시를 타고 등교했죠. 3주 진단을 받았는데 3일 만에 퇴원했어요.” 고씨는 다시 공부를 시작한 근래 4년 동안 아픈 적이 없다. 의대생인 아들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쓰던 책을 “언젠가 내게 필요하겠지”라며 따로 모아뒀을 정도로 하고 싶었던 공부다. 그런 그에게 어렵고 싫은 과목이란 있을 리 없다.
이곳 학생들의 학구열은 남다르다.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던 어려운 시절의 기억이 공부에 대한 의지와 열정을 새록새록 북돋운다. 안정순(53·마포구 염리동)씨는 어려운 형편에 맏딸과 큰아들을 공부시키느라 애쓰는 아버지를 생각해 스스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편물도 배우고 공장도 다니며 돈을 벌자 집안 형편이 나아지더군요. 계속 돈을 벌며 남동생 둘의 학비를 댔죠.”
그후 결혼하고 직장도 다녔지만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남들이 안씨를 ‘교육받은 여자’로 생각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초등학교 학습지 교사만 6년을 했어요. 달랑 초등학교 졸업장만 있지만 학창시절 당시 별명이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일 정도로나름 박식했죠.” 하지만 고등학교 얘기가 나오면 말문이 막혔다. 학창시절의 사진 한 장없는 것도 한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염리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이 학교를 알게 됐다. 학력인정까지 된다는 사실에 안씨는 반가움이 컸다. “4년 동안 참 열심히 공부했어요. 지난해 12월에는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우리 팀이 1등을 했고, 얼마 전엔 한자교육진흥회에서 주최하는 3급 시험에도 합격했어요. 이제 친구들 모임에 나가도 대화를 이끌어갈 정도로 자신감도 생겼죠.”
환갑 넘었어도 수능 준비중
자신감으로 치면 이은미(47·관악구 봉천동)씨도 만만치 않다. 이씨는 교회에서 열리는 레크레이션의 사회를 도맡을 정도로 재치 있고 성격이 활달하다. 그러나 어려운 살림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했다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사회를 보면서도 등에 식은땀이 흘렀죠. 결혼하고 10년간 남편한테도 말 못했어요.“ 그러다 4장이 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오히려 남편은 “뭘 그런 걸로 고민을 하냐”고 했다.
가족의 격려에 힘입어 이씨는 4년 전 일성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이제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주변에 당당히 얘기 한다. 지난 6월에는 마포문화센터에서 열린 ‘팝송대회’의 사회자를 맡았다. “미스코리아 뺨치는 복장으로 등장해 화려한 진행 솜씨를 뽐냈다”는게 친구들의 말이다. 그날 공연을 본 딸은 눈물을 흘렸다. “공부하는 엄마가 멋지다며 저를 대학도 보내준대요.(웃음)” 이씨의 학구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상급학교에 진학해 청소년상담학을 계속 공부할 계획이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공부하는 즐거움과 소중함, 사는 재미를 알려주고 싶어서다.
환갑이 넘었지만 수능을 준비하는 임명자(65·마포구 신공덕동)씨도 있다. 임씨는 남들이 고등학교 때까지 해내는 한자자격증 최고 급수 4개를 중학교 때 따낸 우등생이다. 임씨는 젊었을 때 한복 기술을 배워 가게까지 차렸던 경력을 살려 의상디자인을 공부해볼 참이다. “젊은 대학생들의 감각적인 디자인을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라지만 주변 사람들은 임씨라면 “할 수 있다”며 힘을 준다.
이씨는 “어릴 때보다 지금 공부하는 게 더 유익한 것 같다”며 웃음 짓는다. “공부 하고 친구도 사귀고 미래도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으니까요. 나이만 먹었을 뿐이지 우리도 꿈 많은 여고생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