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이 책이 꾸준히 올라와 있었고, 내가 자주 타는 시내버스에서도 "한국인이라면 이 여자를 기억하라!" 는 문구와 함께 책 홍보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책의 내용이 짐작이 가서 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여름방학 말미에 문득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단숨에 읽었다.
책의 내용이 눈에 잘 들어왔고, 예상했던 전개와 결말이라서 크게 인상적이진 않았다. 사실상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이라 할 수 있는 고종과 그의 자녀들인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등은 일제식민지 초기에 무너져 가는 왕조와 나라를 지켜보며, 어떤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권위와 체통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용(蠻勇)이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자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조센짹
조센징. 덕혜는 그 말을 지금처럼 자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일본인들이라도 대놓고 그런 말을 올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나라였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덕혜를 가리켜 조센징이라 했다.
‘내가 조센징이라면 너희는 쪽발이다. 너희가 나를 무시한다면 나 역시 너희를 똑같이 대하리라.’
그럴 때마다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이겨내리라.’
일본 황녀인 내친왕이 찾아왔을 때도 덕혜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먼저 인사의 예를 갖추라는 명이 떨어졌을 때도 마음을 다잡았다.
‘나도 황녀이거늘’
덕혜는 자신이 일개 조선인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의친왕과 영친왕도 볼모의 신세인 건 마찬가지이지만 위엄을 잃지 않으려 얼마나 애를 쓰던가. 덕혜는 오라버니들만큼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위엄 어린 목소리로 꾸짖듯 소리쳤다.
“나도 대한제국의 황녀다.”
“같은 황녀라고? 도쿠에히메는 조센징의 황녀일 뿐이야!”
내친왕의 곁에서 맴돌던 학생 하나가 사납게 소리쳤다. 그녀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다시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설령 날 죽인다 해도 절대로 내가 먼저 예를 갖출 수는 없다!” <150~151p>
어린 옹주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으로 건너가 겪었던 설움은, 책에 적혀있는 것보다 더욱 심했을 것이다. 비단 옹주뿐이었겠는가? 1910년 한일합방이후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졌고, 일본의 식민지로써 남녀노소, 지위불문하고 희생당했다. 힘없는 사람들은 저항 한번 못하고 체념했지만, 뜻있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했다. 이는 왕가의 후예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신분과 처한 상황의 차이는 있었지만, 낯선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나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등 왕실의 후예들이나 똑같이 굴욕적인 식민지 설움을 당했다. 책을 보니 덕혜옹주의 저항은 실로 대단했다.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살 수 있는 기회와 환경 속에서도 자신이 조선인이자 왕가의 후예임을 잊지 않았고, 심지어 일본천황의 후예들 앞에서도 동등한 권위를 가지려 했으며, 원치 않은 결혼이었지만 일본인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그녀의 굽히지 않는 독립의지 때문에 이혼으로 귀결되었다.
이해하든 못 하든, 이것들은 옹주가 할 수 있는 혈기 찬 독립운동이었다. 그녀의 몸에는 조선왕조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두 눈으로 자신의 나라가 일본에게 넘어가는 비극적인 상황을 목격하고 굴욕을 체험했다. 또한 하루가 천년같이 느껴졌던 식민생활의 울분은 그녀를 극단적인 말과 행동을 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파괴했고 끝까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했다. 이후 1945년 해방이 됐지만 그녀는 몇 년 후에야 형기(刑期)가 끝난 죄수처럼 모든 식민지 생활을 마치고 폐인이 된 몸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조선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였다.
나는 조선왕조의 역사를 지켜볼 때 가끔 부끄러움을 느낀다. 신하들은 스스로 충신임을 자부했지만 실제 충신들은 몇 없었고, 반역과 당파, 권력강화는 필수사항이었다. 기어이 일본에게 나라를 판 것도 그들이 아닌가? 제자의 잘못은 곧 스승의 잘못이니 군신유의(君臣有義)를 배우고 군사부일체(軍師父一體)를 몸소 실천하던 유학의 후예들은 어느 것 하나 지키지 못하고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넘겼고, 자신들의 비참한 목숨을 부지했다. 비슷하게 예로부터 중화(中華)라 칭하며 유학의 본고장으로 칭송받던 중국의 청황조도 그러했으니 실로 부끄러운 부전자전(父傳子傳)이 아니겠는가?
베스트셀러를 읽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이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의미가 무엇일까? 새삼 느껴지는 조선왕조에 대한 연민일까? 아니면 한일합방 100주년의 시류을 탔을까? 정말 덕혜옹주를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에 대한 국민들의 탄식이라 생각한다.
단적인 예로 얼마 전 있었던 인사청문회는 부끄러운 인사(人邪)청문회였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그들 중에 충신이라 부를 수 있는 자가 몇 있었는가? 다들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기를 쓰며 과거 일을 은폐하려 했고, 위장전입, 뇌물수수 등을 비롯한 여러 불법행위들이 폭로되자 수심이 가득 찬 얼굴로 국민들에게 사죄했으나 한, 두번이 아니었으니 얼마나 간사한 일인가? 사퇴한 이들은 그 자리 말고도 몇 개의 자리를 더 가지고 있으니 아쉬워도 미련은 없다. 이같은 사람들이 나라의 위정자가 되려고 했고 대통령은 믿고 선택 했으니, 어찌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위태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랴? 그러니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덕혜옹주의 마음을 공감 했을 것이고 덕혜옹주의 눈물은 예나 지금이나 마르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