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남과 여
여자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거짓말, 오빠는 저런 스타일 안 좋아하는 거 다 알아”
“너 빨리가 우리 애인 화 나겠다”
“오빠 진짜 이러기야, 진짜 애인이 맞긴 한 거야?”
신은준은 나의 얼굴을 한번 쳐다 본 뒤 태연하게 말했다
“예쁘지?”
“난 못 믿겠어 증거를 보여줘”
증거?
이 여자 웃긴 여자네
유치하게 증거는 무슨 증거를 보여 달라는거야
나의 생각과는 달리 신은준은 나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올렸다
“됐지? 빨리 가”
매우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신은준은 그녀를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오빠 나랑 장난쳐? 그걸 증거라고 보여 주는거야?”
그녀의 앵앵거리던 말투가 신경질 적으로 변해가고 있던 순간이었다
신은준이 나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한지유”
신은준이 앉아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 순간 신은준의 입술이 나의 입술 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입술이 다이지는 않았지만 입만 내밀면 닿는 거리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차차! 너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였지? 니가 너무 진지하게 나오니깐 나 까지 잠시 헷갈렸었네, 내 애인이 수줍음이 많아서 너 앞에서 키스는 못해주겠다, 아쉽겠지만 증거는 이정도로 만족해라”
아직까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반면, 여자의 얼굴은 굳어갔다
“뭐야 오빠 그래서 지금 이 여자랑 진짜 사귀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가”
신은준의 말을 무시한 채 여자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불렀다
“이봐요”
“네? 저요?”
“정말 은준오빠랑 사귀는 사이 맞아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난감한 상황 이었다
신은준이 이 여자가 싫어서 나를 방패막 으로 삼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나 까지 철판을 깔며 연기를 하기엔 나의 연기 실력은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이 여자는 지금 나를 잡아먹을 듯한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만해”
신은준이 그녀를 재지하였다
“오빠가 사귀는 사이라고 말하니깐 우선 그렇게 믿을께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께요”
“네.. 말씀하세요”
“오빠랑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요? 설마 아직까지 키스도 못한 건 아닐 테고
설마.. 그 이상도 나간건가?”
아직 나 보다 새파랗게 어려보이는 그녀에게 지금 내가 희롱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쪽이 순진하게 보여서 해주는 얘긴데, 오빠한테 너무 빠지지 마, 그 쪽 같은 여자보다 훨씬 더 잘난 여자들이 오빠한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지금 오빠가 당신 애인이라고 마음 놓고 있지 말란 말이야 당신 얼마 못가서 버림 받을꺼야 당신은 오빠한테 아무 것도 아니야“
“함부로 지껄이지마”
신은준이 낮은 음성으로 내 뱉은 말이었다
“오빠 뭐야 .. 진짜 이 여자가 애인이라도 되서 지금 편이라도 들겠다는거야?
오빠 이런 모습 처음 본다.. 이 여자가 그렇게 대단해?“
“니가 함부로 말 할 수 있는 그런 여자 아니야”
여자는 나를 죽여 버리겠다는 눈으로 째려 본 뒤 자리를 떴다
“미안하다”
상황이 정리되자 그가 나에게 사과를 하였다
난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곧장 칵테일 바를 나와 버렸다
“야 한지유 한지유”
신은준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걸었다
“택시 택시”
젠장, 택시 마저 잡히지 않는다
택시가 잡히지 않는 사이 신은준이 멀리서 뛰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내 팔 한쪽을 잡았다
“한지유 잠시만”
“놔”
“잠깐만 내 얘기 좀 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 그의 정강이를 걷어 차 버렸다
“너 한번만 더 그러면 아주 죽을 줄 알아”
신은준은 통증을 느끼며 한쪽 손으로는 걷어차인 정강이를 잡고 한쪽 손으로는 나의 팔을 놓치
않고 잡은 채 배시시 웃었다
난 그의 정강이를 한 대 걷어 찬 뒤 그의 괘심한 행동을 용서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신은준 근데 아까 그 여자 누구였어?”
“아는 여자”
“그냥 아는 여자가 왜 그렇게 까지 질투를 하는 거였을까”
“사람이니깐”
도통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이니깐,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웃고, 떠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깐화가 났겠지 질투도 나고 슬퍼졌겠지, 그러니까 니가 기분나빴어도 한번만 봐주라 ”
신은준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사람이었다
더 첨가 하자면 그녀는 사랑에 빠져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날 질투하고 그에게 화도 내고 끝내 눈물까지 보였을 것이다
그녀도 사람이었으므로 ..
사랑에 빠진 여자였기에 가능한 일 이었다
“아무튼 간에 너 다음에 이런 일 또 있으면 진짜 죽을 줄 알아”
“다음에? 뭐야 .. 내심 또 바라고 있는 거야?”
“진짜 너 죽는다!”
“무섭다 눈 풀어라”
조금 전에 놀랬 던 마음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했다
“그나저나 너 연기 잘하더라”
“무슨 연기?”
“그 여자한테 했던 말 있잖아.. 그.. 뭐랬더라.. 아! 니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
이거였던가.. 아무튼 탁월한 대사 능력이었어, 내가 드라마 속 여주인공 같더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운전을 하였고 잠이 들어 버렸던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11시30분을 넘어 서고 있는 시간이었다
“아.. 잘잤다.. 여기 어디야?”
“집 앞”
“깨우지 그랬어”
“그냥.. 곤히 잠들었길래”
“바래다 줘서 고마워 나 갈께”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신은준이 말했다
“연기 아니었어”
“응?”
“진심이었어”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차문을 열고 내리긴 해야겠고 그렇다고 아무 대답하지 않고 내릴 수는 없는 상황 이었다
“으..응 감동이네..”
신은준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말하였다
“나 잠와 빨리 내려”
“응 내려야지 내려야지..”
내가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신은준은 간단하게 손을 흔들어주고 가버렸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조금 전의 영상이 떠올라 혼잣말로 주절거렸다
“진심이었어.. 진심..”
“아 뭐래는거야 시끄러워 잠 좀 자자”
옆에서 자고 있던 동생 지운이가 화를 냈다
그의 말뜻을 풀이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친구로써 “내 친구한테 그런 말 하지마”
아님 .. 정말 연기에 충실했던 그 였을지, 아.. 연기가 아니라고 말했었지
그럼 설마 나를 좋아하는가? .. 에이.. 설마..
이런 남자들의 애매한 말 한마디에 여자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진다
‘여자의 마음은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오래전부터 전해 오던 말이다
이 말 뜻을 여자로써 대변하자면 이건 다 남자들 때문이다
여자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내 던지는 말 한마디가 여자에게는 얼마나 설레고
착각을 만들게 하는지 남자들이 알까?
그러니 여자의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다
남자들의 애매한 말,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달콤한 말
이 모든 것들이 여자를 흔들리게 하고 있다
이건 단순히 공주병과는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달콤한 걸 좋아하는 여자의 본능상 달콤한 말 한마디에 무너지는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한 주가 지나가고 드디어 주말이 다가왔다
신은준과는 평소와 다름없이 연락을 하고 지냈었다
밀린 원고도 끝을 냈다
그러니 오늘은 나의 자유란 말이다
“아... 오늘 일요일이었지 잠이나 더 자야겠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달콤한 휴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지유 기상 기상”
“아줌마.. 아침부터 왜 이래요 나 조금만 더 잘게”
“얘가 지금 시간이 9시가 넘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엄마 제발... 나 수면이 부족해요 살려주세요”
“안돼 아침먹으러 빨리와”
나의 고요한 주말을 방해하는 사람은 유일한 한 사람
나의 엄마 김옥희씨였다
“아니, 엄마는 딸내미가 일에 지쳐 돈에 지쳐 잠 좀 자겠다는데 왜 그러십니까”
오랜만에 아침 밥상 앞에 엄마,이모,지운,나 4식구가 모여 앉았다
“너 오늘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잠이 오니?”
“태산은 무슨.. 나 할 일 없어”
“없긴 왜 없어 내가 저번에 말한 거 또 잊어버렸지?”
“기억안나”
“너 오늘 선 보기로 했잖아”
잊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엄마가 계속 하시던 말
‘지유야 일요일에 선봐야 한다, 토요일 밤에 술 먹고 오면 집에서 쫓아 낼 줄 알아!“
“언니 또 선봐?”
“지유 너 또 선보니?.. 언니 애 한테 결혼해라고 그만 닦달 좀 하시오..
결혼 그거 할 때 되면 하겠지”
이모가 나의 편이 되 주었다
그러나 곧 이어 엄마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놈의 지지배야 너 한번만 더 지유 감사고 돌면 너도 선 자리에 내 보낼 줄 알아!”
그리하여 나의 편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우친 나는 곱게 화장을 하고 열 기계로 머리에 웨이브를
넣기도 하였다
물론 패션잡지기자 답게 옷차림에도 한껏 신경을 쓰고 호텔로 향하였다
언제부턴가 선자리는 대게 호텔커피숍에서 이루어졌다
“너무 빨리 와버렸네..”
선 자리에는 여자가 3분정도 늦게 도착하는 게 어느 정도 신비감을 준다고 하는데 난 10분 일찍 와 버렸다 그래 .. 이번에는 꾹 참고 밥을 먹고 기회가 되면 영화도 보자
한지유.. 너 집에서 쫓겨나면 갈 때도 없잖아
‘한지유 너 이번에도 저번처럼 일찍 집에 들어오면 아주 쫓아 내보낼 줄 알아!“
엄마의 말을 한번 더 되새김질 하며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그가 나타났다
“한지유씨?”
생각보다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네.. 한지유 입니다”
“일찍오셨네요.. 전 황진우 입니다”
“네.. 반가워요”
생각보다 괜찮은 남자 앞에 고개 저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그래.. 어차피 마음먹고 나온 거 마음을 열고 남자를 받아들이자!
하지만 긍정적인 나에 비해 그의 생각은 다른 듯 했다
“초면에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네?”
“사실 제가 애인이 있는데 어머니가 사실을 몰라서 이런 자리를 만드신 것 같습니다”
“아..네..”
“제가 어머니께 미리 말씀 드려야 했었는데 제 실수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네..”
“지유씨도 하루 빨리 좋은 인연 찾으시기 바랄께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네.. 그럼.. 살펴가세요”
이런, 개떡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역시 난 아직 결혼 할 운이 없는 거야
마음을 열어도 남자가 달아다는데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그렇게 하여 나는 선 자리에서 5분도 되지 않아 퇴짜를 맞게 되었다
이걸 어쩌나.. 집에 일찍 들어가면 또 난리 치실 게 분명한데
“벌써 퇴짜 맞은 겁니까?”
오랜만에 보는 강민한의 모습이었다
그는 항상 내가 생각지도 못할 때 나타난다
“뭐예요.. 언제부터 있었던 거예요”
“한지유씨가 퇴짜 맞기 1시간 전부터 있었습니다”
“강민한씨도 선 보러 오신거예요?”
“아니요 전 회사일로 거래처 사람들과 미팅을 하러 왔습니다”
“미팅?.. 후.. 선이든 소개팅이든 미팅이든 다 토 나오겠어요 웩”
나의 하이개그를 이제는 이해해줄려나 싶었지만 강민한의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그럼 전 이만”
“잠시만요 강민한씨 지금 할 일 없으면 저랑 같이 노실래요?”
또 그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싫어요? 싫음 마시고요.. 에휴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얼마나 시간 때울 사람이 없었으면 강민한씨 한테 부탁을 한건지.. 나도 참 안됐다
내 나이 27, 내 주위에 친구들은 하나 둘씩 시집을 가기 시작했다
지금 달콤한 신혼에 빠져 있던지.. 배가 불룩하게 나와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길 기다리기도 하고
하물며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기도 한다
또 일에 미쳐 열심히 일을 하기도 하며, 애인과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또 나 처럼 선을 보러 다니는 친구들도 있다
호텔에 벗어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시간을 어디서 때울지 생각 중 이었다
제일 한가해 보이는 신은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나 지금 일해”
“왠일이야.. 일도 하고”
“넌 어딘데”
“나 선 보고 5분만에 퇴짜 맞고 거리를 방황중이시다”
“너도 참 안됐다 내가 지금 서울이 아니고 대구라서 너랑 못 놀아주겠다”
“대구? 멀리도 갔네.. 아무튼 필요할 땐 찾아도 없다니깐”
“너무 많이 방황하지 말고 들어가라”
“그래 끊는다”
제일 한가해보이던 너 마저 나를 버리는 구나
“한지유씨”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 건너편에서 강민한이 뛰어 오고 있었다
“강민한씨..”
그는 뛰어왔는지 숨이 가빠보였다
“뛰어왔어요?”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빠릅니까”
뛰어 온 그의 모습을 보며 난 어리둥절 해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그는 약간 뜸들이며 말하였다
“한지유씨가 같이 놀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랑 같이 놀겠다는 거예요?”
“싫습니까?”
“네? 아니..아니요”
시간을 때워야 하는 나였기에 말 없는 강민한 이였지만 혼자보단 둘이 같이 있는게 좋을 거란
생각에 그와 함께 기나긴 낮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