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아나운서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아나운서들의 직장생활은 남들과 다를 것이다’라는 생각인데, 아나운서실의 풍경은 일반 직장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대부분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하고, 지각하면 윗사람에게 야단을 맞고, 방송 펑크를 내면 경위서도 쓴다. 하는 일이 방송이란 것과 시청률에 따라 울고 웃는 결과가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이 좀 다를 뿐이다.
보통 직장 여성들처럼 초년병 시절에 화장실에서 찔끔거리며 우는 것은 아나운서들도 마찬가지. 뉴스를 잘 못해 선배에게 지적을 당하거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맡고 싶은 프로그램을 다른 동료에게 빼앗겼을 때, 화장실에서 우는 일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 아나운서 생활 25년째인 나는 딱 한 번, 화장실에서 홀로 운 적이 있다.
1994년 여자 아나운서 최초의 프로야구 캐스터라는 타이틀을 얻은 나는 2000년 들어 야구 중계를 그만두고 심한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목표의식과 성취감에 목말라 있던 나는 고민 끝에 여성 최초의 골프 캐스터라는 타이틀에 또 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2년여 동안 골프 공부에 몰입했다. 내가 골프 캐스터를 준비하자 여자 후배 몇 명도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자 관심을 보였고, 당시 팀장은 공평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골프 중계 오디션을 제안했다.
두 달 후로 오디션 날짜가 잡혔다. 나는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하며 골프 테이프가 낡아지도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가장 고참이었던 나는 오디오 면에서는 아무래도 내가 유리할 것이란 자긍심과 함께 야구에 이어 또 하나의 신천지에 내 이름을 새겨넣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여자 아나운서 여섯 명이 오디션에 참가했고, 나는 생방송 골프 중계에 임하듯 현장감 있게 능숙한 진행으로 오디션을 치렀다. 오디션이 끝나자 지금 중계를 해도 무방하겠다는 동료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나는 어깨가 으쓱해 ‘윤영미 아나운서, 프로야구에 이어 또다시 여성 최초의 골프 캐스터 되다’라는 신문 1면의 헤드라인을 상상하며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결실을 성급히 맛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내가 아닌 후배가 선정된 것이다. 이럴 수가. 어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나? 2년여 동안 힘겹게 준비하며 기다려왔는데, 그리고 모두들 내 중계가 가장 능숙하다고 칭찬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내 진행이 가장 매끄러웠는데….
나의 실망감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발표가 나자 나는 곧장 화장실로 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느낌은 서서히 통곡으로 변했고,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가장 서럽게 울었다.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 탓에 매서운 아나운서 선배들의 질책에도 단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내가 초상이라도 난 듯 너무도 서글피 울음을 터뜨렸다.
억울했다. ‘내가 나이가 많아 예쁘고 젊은 후배에게 밀려난 것이구나. 아니, 골프에 무슨 나이가 중요한가? 골프 중계는 오디오가 중요한 것 아닌가?’ 하는 혼자만의 독백을 하며 긴 시간 화장실에서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던가.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어떤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왜 꼭 네가 1등이 되어야 하니? 후배에게 좀 양보했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니? 그리고 넌 이미 여성 야구 캐스터 1호가 됐잖니?’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으며 그제야 좀 편안해졌다. 내가 제일 잘했다는 생각도 어쩌면 나의 자만심에서 비롯된 착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1호는 못 됐지만 2호로 방송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골프 공부를 계속했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확신으로. 결국 골프 중계는 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 일을 통해 지는 것도 성장의 한 부분이란 것, 실패의 경험이야말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재산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성숙이란 성공만 갖고는 이룰 수 없는 것이고, 반드시 실패라는 재료가 들어가야만 완성된다는 사실도 절감했다.
나를 넓혀주고 깊어지게 한 그 고마운 눈물, 성공보다는 내면의 성장을 가져다준 그때 그 쓰디쓴 눈물, 그 성숙의 눈물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윤영미 | SBS 편성본부 차장입니다. 1985년 춘천 MBC에 입사해 1991년 SBS로 이직, 25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나운서로 일해왔습니다. 누구보다 활기차고 행복하게 인생을 즐기는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들을 위한 자기계발서 <SBS 윤영미 아나운서의 열정>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