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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아빠가 교도소에 들어가셨어요..

효녀가되고... |2010.10.30 23:15
조회 815 |추천 2

 

아직은 사회초년생인 21살 여자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적어보는 글입니다.

아주 긴 글이 되어버릴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천안에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시골에서 나고자란 아이입니다.

저희가족은 포도농사와 벼농사를 지으며 살았고요.

저희 가족은 증조할머니,할머니,할아버지,아빠,엄마,저 그리고 여동생1명 남동생1명으로

요즘 보기드문 대가족이며 4대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희 엄마와 아빠는 아주 어린나이에 저를 낳으셨습니다.

전라도에 살던 20살의 저희엄마와 충청도에 살던 20살의 저희아빠는 우연한 기회에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해 불같은 사랑을 하셨다고 합니다.

서울상경의 꿈을 포기하고 가족들 몰래 아빠와 동거를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아주크게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벼를 수확해 방앗간에 보내는 돈 보다

직접 방앗간시설이 있는게 좋다고 여기셔서 집옆에 방앗간을 하나 지으놓으셨을 정도로

지역에서도 최부잣집 으로 통할 정도로 잘 살고 계셨고

한 동네에 집을 2채나 있었기 때문에 어른들 몰래 2년 정도를 사시다가

아빠께서 군대에 갈 나이가 되셔서 그때야 어른들에 윗집에서 여자랑 살고있다고

고백했고 그 때부터 엄만 며느리노릇을 하기 시작하셨다고 하십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아빠가 좋아서 따라왔던 엄마는 시증조부님, 시부모님, 고등학생이었던 삼촌, 중학생이었던 고모까지 모셔야 했고 농촌의 험한 살림까지 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수소문끝에 외갓댁 식구들이 엄마를 찾아오셨고 양가 합의끝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때가 제가 4살, 여동생이 2살 때 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외갓댁을 놀러가는게 무서웠습니다.

6남매에서 귀여움을 받고 살던 막내딸, 막내동생이었던 엄마가 너 때문에 고생한다고

이모들이 저를 놀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모들이 더욱 못 마땅하게 여겼던 이유는 저희 엄마가 맏며느리가 아닌데도

맏며느리 노릇을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정말로 저희 아빤 5남매에서 셋째이고 3형제에선 둘째아들 이십니다.

첫째인 큰아빠와 맏며느리 큰엄마께선 서울에서 사시고 계십니다.

 

8남매의 첫째이셨던 저희 할아버지께선 부잣집의 첫째임에도 불구하고 가업인

농사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초등교육만 받으셨지만, 작은할머니, 할아버지분들

께선 고등학교, 대학교육까지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늦은영어공부를 하실 정도로 학구열이 많으셨던 할아버지께선

자신은 첫째아들에게 공부를 맘껏시키겠다고 다심하셨고, 그 결심으로 큰아빠께선

당신 서울 유학을 보내 대학공부까지 시키셨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하고 싶어했던 저희 아빠께선, 서울로 떠난 큰형의 자리를 메꿔야 한다는

명분으로 농사를 물려 받아야 하셨습니다.

 

저희아빤, 분하기는 하셨지만 자신의 음악재능이 그렇게 뛰어났던건 아니라고 스스로

단념하셨고 어른듯의 뜻대로 포도농사, 벼농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큰 아빠께선, 대학까지 졸업하시고 시작하신 건 쌀가게셨습니다.

저희아빠가 수확하신 벼를 가져다가 파시는 것.. 그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불현 듯 큰아빠께선 부동산중개사를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저희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선 큰아빠의 말씀이라면 껌뻑 죽으시는 분들 이셨기 때문에

큰아빠께서 부동산사업을 하시는대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큰아빠께서는 부동산사업의 밑천을 친가쪽이 소유한 땅이셨고

할머니, 할아버지께선 아무반대없이 큰아빠의 손에 땅문서들을 쥐어드렸습니다.

 

저희가족이 최부잣집 이란 딱지를 떼어버린건 큰아빠께서 부동산을 하신지 5년도 채

안되서 였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빠, 큰엄마 네분이서 무얼하시든 저희아빠, 저희엄마는

묵묵히 봄이면 모내기를 하시고, 아침일찍 나가셔서 포도묘묙들을 살피시고

여름이면 포도를 따셨고, 가을이면 벼를 수확하셨고, 가을엔 다음농사를 준비하시며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저희가 농사지을 땅도 하나 둘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농사철이면 항상 품앗이하시는 분들을 10명씩 불러야 할 정도의 규모였던 농사가

엄마와 아빠 둘 만으로 가능한 규모의 농사가 되었습니다.

그 때가 되서야 비로소 저희아빠는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큰아빠께선 인심쓰듯 지금 가격이 오르고있는 지역이 있다면서 그 곳에 부동산을

하나 내어줄테니 지금있는 땅도 다 팔고 부동산사업이나 하라고 아빠를 유혹하셨고

만류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아빠께선 이제 농사가 싫다고 하시며 부동산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신 중학생이었던 저는 어린마음에 아빠께서 정장을 입으시고 트럭이 아닌 승용차를

운정하시는 모습에 아빠가 멋있다며 설레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후회가 됩니다.

저희아빠는 농사꾼의 성격이시지 사업을 하실 칼 같은 성격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건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저희 아빠께선 부동산 중개비를 대신 해 강아지나 지역특산물같은 걸로 잘 받아오셨고,

땅주인이 평당10만원에 내놓은 땅을 평당 8만원에 사려는 사람이 있으면

나머지 2만원은 아빠의 돈으로 채우신 후에 계약을 성사시키시곤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아빠께서 부동산을 하신 후엔 저희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던걸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아빠께선 서로 좋은게 좋은거라며 그런식의 계약을 자주하셨던 것 같습니다.

 

결국 아빠껜 저희가 모르는 빚이라는게 생기셨고 못된사람들의 독촉에까지 시달리게

되셨고 아빠 자신이 없어지시면 저희가족들에겐 피해가 안 갈거라고 생각하신 아빠께선

제가 중학교3학년 때, 스스로 자취를 감추시고 말으셨습니다.

 

갑자기 사라진 아빠때문에, 빚쟁이들은 저희집으로 찾아왔고 어렸던 저와 제동생들을

들먹이며 엄마를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모습을 다 알면서도 당시엔 그래도 돈 좀 벌으셨던 큰아빠께선 그저 아빠가 나타나서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만 하실 뿐 이셨고, 할머니 할아버지께선 도와주고 싶으셔도

더 이상 팔 땅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그냥 보고계실 뿐이 셨습니다.

 

저는 그 때, 엄마가 너무도 불쌍했습니다.

큰엄마께선 (어른에게 이런말 하기 죄송하지만) 정말 얌체셨기 때문에 자신의 몫은

다 챙기셨는데 엄마께선 한 번도 명품백을 들어보신적도 병당12만원하는 화장품을

써보신 적도 없는 엄마가 너무나 불쌍했습니다.

기독교집안이라 제사는 드리지 않지만 증조할머니까지 살아계신 덕에 명절이나

집안행사때가 되면 저희집에 정말 수많은 손님들이 찾아오십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대접 할 음식을 돕는 며느리는 오로지 엄마셨습니다.

큰엄마께선 항상 명절날 당일 아침에 오셨기때문입니다.

작은엄마께서 시집오신 후엔 작은엄마와 같이 하셨지만 큰엄마께선 아니셨습니다.

김장을 담글때도 800포기에서 1000포기를 왔다갔다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여서

어린 저까지 두손을 걷어 부치고 일손을 도울때도 큰엄마는 안계셨습니다.

 

둘째인데로 불구하고 맏며느리 역활을 하는 엄마에게 할머니도 적이셨습니다.

원래 저희엄마는 아이를 셋까지 낳을 계획이 아니셨습니다.

저와 여동생으로 끝을 맺으려고 했지만 할머니께선 큰아빠가 아닌 저희 아빠께

아들을 낳으라고 닥달하셨고 저희엄마께 니가 안 낳으면 씨받이를 들여서라도

아들 얻을꺼라는 슬픈말도 막 하셨던 분 이셨습니다.

하지만 손녀들과 손자들을 차별하시는 분은 결코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미운할머니는 아니셨지만 저희엄마께는 야속한 시어머니셨습니다.

 

아빠가 없어지신 후에도 할머니는 엄마께 야속한 시어머니셨습니다.

여자가 다 참아야한다고, 니가 애비 나타날때까지 애들 잘 키우고 있으면 된다고 하시면서

저와 동생들을 볼모로 삼고 엄마가 혹시라도 집을 나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실 뿐

자신의 아들이 그래서 미안하다, 니가 고맙다 라는 말씀을 해 주신 적은 없으셨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선 내가 동생들을 돌 볼 테니 엄마는 이혼을 해도 된다고 할 정도로 엄마가 안쓰러웠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고 오히려 화를 내시며,

아빠를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던 엄마의 가르침 덕에 저와 동생들은 삐뚤어지지 않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고등학교3학년 초 즈음에, 아빠와 연락이 되었습니다.

못된사람들에게 시달렸던 기억에 사람들을 조금 무서워하게 되셨던 아빠셨기 때문에

몇 개월 정도는 다른사람들에게 아빠가 집에 오셨던 걸 숨긴 채 지내야 했습니다.

누가 오면 아빤 방에서 화장실도 못가식도 숨어계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곧 수능을 앞두고 대학을 가야했던 저 때문에 아빠께선 용기를 내셨습니다.

 

숯을 만드는 일을 하시겠다며 홀연히 타지역으로 가셔서는 여름더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는 불가마앞에서 숯을 만드시며 200만원 남짓의 월급으로 제 학비를

벌어주셨습니다.

 

숙식을 하시며 일하시다가 가끔씩 휴가를 내셔서 집에오시곤 하셨습니다.

그 날도 그런 날 이었습니다.

아빠께서 월요일에 집에 오셨고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여서 밥을 먹었습니다.

다음날 아빠께선 다시 일터로 가신다며 집을 나서셨습니다.

그러다 수요일이었던 그 다음날, 엄마께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아빠께서 교도소에 들어가계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너무나 급작스러워서 놀랬습니다.

 

아빠가 집에 오는 모습을 보고는 아빠게 받을 돈이 있으셨던 분이 아빠를 고소를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빠가 자신의돈을 채워서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고소보다는 합의를 먼저 해 주셨고 아빠를 용서 해 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그래도 과거에 최부잣집 소리듣던 집에 돈이 없겠냐는 생각에 결국 고소까지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일체 가족들에게 숨기고 혼자 합의를 하시려고 하셨던 아빠의 행동에

저희가족에겐 정말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습니다.

 

두살터울의 여동생은 올해 수능을 보고 이듬해에 대학에 입학합니다.

지역에서 명문고 소리를 듣는 여고에서 반에서 1,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동생은 자신의 꿈보다 학비를 걱정해 국립대만 알아보았고, 이번 수시2학기때 집도 가깝고

학비도싸고 미래도 보장 된 사대에 합격을 했고 면접과 수능을 보고 최저등급만 통과 하는 일만 남아있습니다.

 

이 상황을 다 알고계시던 아빠께선 상대의 합의금에 맞춰드릴 수가 없으셨고

자신의 합의금에 맞춰주지 않는 아빠의 모습에 화가나 합의 안 한다고 감옥에 넣어달라고

하셨고, 합의금에 맞춰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아빠의 모습을 괴씸하다고 여긴 판사님께서도 아빠를 바로 교도소로 보내셨습니다.

 

엄마와 부랴부랴 찾아간 교도소에서 아빠를 만나기 전에 아빠앞에서는 절대 울지말자라고

엄마와 약속을 하고 아빠를 만났습니다.

큰 딸에게 못난 모습보이기 싫다던 아빠의 모습에 눈물이 와락 터지는 걸 참아야 했습니다.

면회를 끝내고 나오면서 저는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도소에서 동내의 사서 넣어드리면서도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처벌이라는 개념의 교도소엔 보일러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교도관의 말에

그저 하염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큰아빠께도 이런일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큰아빠께선 그 때 변호사도 선임하시면서 교도소에 들어가신 적은 한 번도 없으셨는데

이번 저희아빠 일에는 큰엄마가 엄마께 전화하셔서 형이6개월뿐이니 그냥 살아도 괜찮다, 그럼 그 돈이랑 퉁치는게 되는거다, 변호사선임해도 무죄확정받기 힘들다 라는 이유를 들며 아빠를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혹시나 합의금이나 변호사선임비등을 도와달라고 할까봐 염려하신 말씀이라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저는 아빠가 창피한게 아닙니다.

정말로 가족들이 너무나 밉고, 엄마가 안쓰럽습니다.

동생의 학비를 위해 학교를 휴학했고 곧 공순이가 되겠지만 저는 엄마나 아빠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주아주 긴 글이 되어버렸네요.. 속은 아주 쉬원합니다.

어쩌면 저희가족의 험담이고 누워서 침뱉기 이지만요....

 

저는 아빠와 엄마만큼 열심히 살 것입니다.

저희 가족을 응원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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