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중국 각 성(省) 박물관에 가 보면 큰 지도가 붙어 있다. 그 지도에는 예외 없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동쪽 끝을 한반도 깊숙한 황해도까지 연결해놓았다. 만리장성이 황해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면 북한 사람들은 굳이 만리장성을 구경하러 중국까지 갈 필요가 없다. 또 남한 사람들도 금강산 관광단처럼 만리장성 관광단을 구성하자고 제안해야 한다. 북한 지역에 만리장성이 있다는데 굳이 중국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유사(有史) 이내 수천년간 한반도 내에서 만리장성을 구경했다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많은 글을 남겼던 조선의 문인(文人)들도 조선 땅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시(詩)나 기행문(紀行文)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공식 견해를 담고 있는『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은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그려놓고 있다.
중국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한사군(漢四郡)에 있다. 중국 고대 한나라[漢國]가 고조선(古朝鮮)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식민통치기구 한사군의 중심지가 낙랑군(樂浪郡)이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고 나머지 군(郡)들도 대체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주장을 지도로 표시한 것이다.『사기(史記)』「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낙랑군 수성현(遂成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이라고 처음 주장한 인물이 일제식민사학자(日帝植民史學者)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다. 이는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적 뿌리가 일제식민사학(日帝植民史學)임을 말해준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아가자 정부가 만든 기구가 고구려사연구재단(高句麗史硏究財團)과 이를 계승한 동북아역사재단(東北亞歷史財團)이다. 동북아역사재단 누리집(홈페이지)의 ‘올바른 역사’라는 항목은 고조선에 대해서 “기원전 3~2세기 준왕(準王) 대(代)의 고조선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은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하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고조선과 위만조선 도읍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곳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평양이었다는 동북아역사재단의 기술(記述)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또 실제로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는 중국사의 영역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가 맞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아니다’는 수세적 방어네 나서야 할 것이다.
이나바 이와기치가 만든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成縣)=황해도(黃海道) 수안군(遂安郡)’ 설(說)의 문제점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주류사학계는 이런 문제점을 외면한 채 해방 후에도 이를 정설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가 동북아역사재단 누리집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는 한국 주류사학계의 뿌리도 일제식민사학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말해준다.
중국 학자들은 중국의 국익을 위해 동북공정을 주장한다. 한국 학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를 위해 동북공정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일까? 그들은 이런 이론이 실증(實證)으로 찾은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반대쪽의 실증이 더 많다.
그렇다면 동북아역사재단은 어떤 견해를 따라야 하는가? ‘낙랑군 평양 설치설(樂浪郡平壤設置說)’,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이 맞다고 생각하는 학자라면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기구에 근무해서는 안 된다. 그 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적하라고 설립된 기구이지, 동북공정에 동조하라고 국민세금으로 운영하는 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학자 개인의 학문적 자유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낙랑군 평양 설치설’의 신봉자라면 개인 연구소를 차려 연구를 심화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낙랑군 평양 설치설’을 신봉하는 학자들이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국가기관에서 국민들의 세금으로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연구를 하는 반면 이와 반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연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이란 것이 있다. 서기 3~4세기까지의『삼국사기(三國史記)』초기기록은 김부식(金富軾)이 조작한 가짜라는 것으로 현재 주류 사학계(主流史學系)의 정설(定說)이다. 이 이론의 창안자 역시 일제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律田左右吉]다. 쓰다 소우키치의 한국 고대사관(韓國古代史觀)은 간단하다. 1910년대 남만주철도회사(南滿州鐵道會社)의 위촉을 받아 쓴『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등의 저서에서 소우키치는 고대 한반도 북부에는 낙랑군(樂浪郡)을 비롯한 한사군(漢四郡)이 있었고 한강 남쪽에는 삼한(三韓)이라고 불린 78개의 소국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래야 한반도 남부에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존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삼국사기(三國史記)』는 이 시기 한반도 남부에 삼한이 아니라 신라와 백제라는 강력한 고대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서술할 뿐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서술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우키치는『삼국사기』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을 창안해낸 것이다. 그러면서 “『삼국사기』상대(上代) 부분을 역사적 사실의 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이 없다”며 마치 여러 학자들의 지지를 받은 것처럼 과장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는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임에도 8·15 광복 후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은 부인하면서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그대로 존속시켜 정설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한국은 대학 내의 강단사학자들과 대학 바깥의 재야사학자들 사이에 역사인식을 두고 집단적 갈등을 겪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재야사학자들은 강단사학자들을 일제식민사학자들의 후예라고 비판해왔고 강단사학자들은 이들을 실증은 없이 주장만 있는 비전문가들이라고 비판해왔다. 같은 사(史)자를 쓰지만 양 진영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전혀 없다. 사(史)에 대한 양자의 출발선이 전혀 다른 탓이다. 어느 진영에 속하든 해방과 동시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만든 한국사 인식체계, 곧 식민사학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이 수행되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학계는 8·15 광복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연구를 진행한 적이 없다. 총론으로는 정체성론(停滯性論) 비판이니 타율성론(他律性論) 비판이니 하는 식으로 식민사학을 비판했지만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과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이 정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보듯이 각론은 식민사학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제식민사학자들의 후예라는 비판은 상당 부분 한국의 주류 사학계가 자초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의 뿌리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한국 주류 사학계의 뿌리를 캐봐야 한다. 한국 사학계의 주류 이론은 두 가지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일제식민사관(日帝植民史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 노론사관(老論史觀)이다. 이 두 사관의 뿌리는 같다. 조선 후기 내내 집권당이었던 노론(老論)의 상당수 인사는 일제(日帝)의 대한제국 병탄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고, 식민지 시대에도 지배계층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가문 출신 중 일부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식민사관 전파에 일조했고 이들이 8·15광복 이후에도 역사학계 주류를 장악한 결과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한국사를 구성하는 주요 관점이 된 것이다.
이율곡(李栗谷)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한 것처럼 조작하고, 효종(孝宗) 군왕의 북벌정책(北伐政策)에 가장 크게 반대했던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북벌론(北伐論)의 화신처럼 서술하고, 노론 당론과는 상극일 수밖에 없는 실학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최근에는 정조독살(正祖毒殺)의 혐의를 받는 노론(老論) 벽파(僻派)가 정조의 우당(友黨)인 것처럼 주장했다. 조선 후기의 역사를 노론의 시각으로 본 결과물들이다.
노론사관과 일제식민사관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다 보니 민족해방 후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식민사학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이 수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 ‘현대사 연구 금지론(現代史硏究禁止論)’이다. 1980년대까지 한국사학계에서는 ‘역사학자는 현대사를 연구하면 안 된다’는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반역사학적(反歷史學的) 명제가 지배해왔다.
현대사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명분이었지만 객관성은 역사학자의 양식과 연구 자세의 문제일 뿐 시기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고대사가 일제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거듭된 공격을 받는 것 자체가 고대사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현대사는 비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청동기시대에야 국가가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한 식민사학의 숨은 의도였던 것처럼 현대사 연구를 금지한 속내 역시 반일독립운동사(反日獨立運動史)를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 연구 금지론’에 따라 역사학자들이 반일독립운동사를 외면하다 보니 대부분 불우한 환경에서 쓸쓸하게 죽어갔고 동시에 반일독립운동사의 1차 사료도 사라졌다. 지금은 반일독립운동사를 연구하려 해도 대부분 사망해 생생한 증언을 들을 방법이 없다.
이 네 가지 문제는 한 꿰미에 꿰어진다.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 ‘노론사관(老論史觀)에 의한 조선후기사(朝鮮後期史) 서술’, ‘현대사 연구 금지론(現代史硏究禁止論)에 의한 반일독립운동사(反日獨立運動史) 말살’은 노론사관과 일제식민사관이 8·15광복 이후에도 한국사의 주류 이론으로 행세하면서 발생한 문제들이다. 두 사관(史觀)의 소유자들이 한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다 보니 국가에서 어떤 역사학 연구 관련 기구를 만들어도 결국은 이들이 차지하게 되어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적하라고 만든 동북아역사재단(東北亞歷史財團) 누리집에 동북공정을 사실상 지지하는 내용이 ‘올바른 역사’란 명목으로 버젓이 오르는 이상 현상이 필연적 귀결이 되는 구조라는 뜻이다. 이 문제는 이제 전혀 다른 인식구조를 가지고 접근해야 할 우리 사회의 담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는 현상의 문제에 집착한 반면 현상을 발생시키는 본질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어왔다. 이 글은 바로 그런 본질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2세들이 앞으로도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으로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동북공정을 포함하는 식민사관은 침략사관(侵略史觀)이고 노론사관은 상대에게 닫힌 폐쇄사관(閉鎖史觀)으로 두 사관이 사진 침략적, 폐쇄적 성격은 현재 동북아시아의 화해와 평화적 체제 구축에도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적 체제 구축의 선구가 되려면 그 시발점(始發點)은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의 극복에 두는 것이 옳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지사(志士)는 1929년에 출간된『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통해 “자기가 확신하는 것이 꼭 다 옳은 것이 아니지만 자기는 꼭 옳은 줄로 확신하는 것이라야 세상에 공포(空包)할 용기가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단재가 확신을 갖고 세상에 공포한 많은 논설들은 식민사관과 대척점(對蹠點)에 있기에 현재 방치되어 있다. 몸은 해방되었지만 정신은 아직 해방되지 못한 역사관, 곧 정신도 해방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커진 몸집에 맞는 큰 정신을 가진 성숙한 대한민국이 절실할 때다.
2009년 8월 천고(遷固) 이덕일(李德溢) 기(記)
1. 한(漢) 제국의 대(對) 고조선(古朝鮮) 침략전쟁(侵略戰爭)
② 국민세금으로 살아 있는 식민사관
한사군(漢四郡) 문제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고조선(古朝鮮)과 한(漢) 제국이 왜 전쟁까지 치러야 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동북아역사재단(東北亞歷史財團)은 누리집에서 고조선과 한나라 사이의 전쟁에 대해 “위만조선(衛滿朝鮮)은 한나라와의 교역과 중개를 통해 실력을 배양시켰고, 이렇게 하여 축적된 군사력과 경제적 능력으로 임둔(臨屯)과 진번(眞蕃) 같은 소국들을 복속시켜 점차 강국으로 부상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을 때 감안해야 할 것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위만조선은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한다는 사실이다. 고조선이 평양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면 고조선이 복속시킨 임둔과 진번 역시 평양 일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또한 평양보다 동쪽이나 남쪽에 있어야지 북쪽에 있어서도 안 된다. 평양 일대에 있던 위만조선이 압록강 북쪽의 만주 등지에 있는 나라들을 복속시킬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도읍 자리에 설치한 것이 낙랑군(樂浪郡)이고 그 근처에 설치한 것이 임둔군(臨屯郡)과 진번군(眞蕃郡)이니 벌써 이 기술 하나로 낙랑(樂浪)·임둔(臨屯)·진번(眞蕃)은 한반도 내에 있어야 하는 셈이다.
한나라가 평양에 도읍하고 있던 위만조선과 왜 전쟁까지 치러야 했는지 동북아역사재단의 설명을 더 살펴보자.
"위만조선의 성장은 당시 북방의 강자인 흉노(匈奴)와 대치 국면에 놓여 있던 한나라로 하여금 불안감을 야기시켰고, 결국 기원전 109년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 동북아역사재단, ‘고조선조(古朝鮮條)’
흉노는 내몽골 북부 일대의 초원과 사막지대를 지배한 대제국이다. 이 설명대로라면 위만조선과 흉노 사이에는 한나라가 지배하는 광대한 만주와 몽골 지역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평양 일대의 소국에 불과한 고조선이 한나라에 불안감을 야기한다는 말인가? 고조선이 평양 일대의 소국이었다면 두 나라가 왜 전쟁을 치렀는지 설명조차 할 수 없다. 북방의 강자 흉노와 맞서고 있던 한나라가 고조선에 위협을 느끼고 전쟁까지 일으키려면 고조선의 위치는 당연히 한나라에 위협적인 곳에 있어야 한다. 평양 일대에 위치한 소국 고조선이 그 주위에 있었다는 임둔과 진번 등을 복속한 것이 어떻게 한나라에 위협이 된다는 말인가? 이런 논리적 모순이 있음에도 동북아역사재단은 위만조선이 평양 일대에 있었다는 고정관념 속에서 이를 입증하는 데 많은 애를 쓰고 있다.
"위만조선은 그 왕성인 왕험성(王險城)이 현재의 평양시 대동강 북안에 있었는데, 이는 위만조선과 한(漢)의 경계 역할을 한 패수(浿水)가 지금의 압록강이라는 점,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는 점, 왕험성 및 조선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열수(列水)가 지금의 대동강으로 비정되고 있다든지 하는 점을 통해서 입증된다." ― 동북아역사재단, ‘고조선조(古朝鮮條)’
동북아역사재단은 ‘입증된다’고 했지만 이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같은 일본 제국주의 추종 단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표현이다. 먼저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경계인 패수의 위치부터 ‘입증’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패수를 압록강이라고 ‘입증’한 인물은 바로 일제 식민사학(日帝植民史學)을 통해 한국의 역사를 축소·왜곡하는 데 선구자 역할을 했던 츠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1873년~1961년]다. 그는 1913년 일제(日帝)에 의해 설립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州鐵道株式會社)의 의뢰를 받아 쓴『만선역사지리연구(滿鮮歷史地理硏究)』「패수고(浿水考)」에서 “패수의 이름은『사기(史記)』「조선열전(朝鮮列傳)」에 한나라 초기 고조선의 북쪽 경계로 기록되었고, 또『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낙랑군(樂浪郡) 속현(屬縣)의 이름으로 기재되었다. 전자는 통상 압록강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했다. 츠다 소우키치의 이 기술 이후 많은 식민사학자들이 패수를 압록강으로 여겼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입증된다’고 쓴 것은 츠다 소우키치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따른 것 뿐이다. 물론 이병도처럼 압록강보다 더 남쪽의 청천강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위만조선의 왕성인 왕험성의 위치, 패수와 열수의 위치, 조선현의 치소’는 과거는 물론 현재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이라는 점’이라고 단정지었지만 이 역시 일제 식민사학이 만든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것에 불과하다. 일찍이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년~1763년)은『성호사설(星湖僿說)』「천지문(天地門)」‘조선사군조(朝鮮四郡條)’에서 “내 생각에는 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인데 그 읍거(邑居)는 비록 요동(遼東)에 있었지만 평양 서쪽 지역도 모두 그 속현이었다”고 썼다.
이처럼 조선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요동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대동강변에 비정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낙랑군시대의 유적』에는 1913년에 이 지역을 낙랑군 초성으로 비정한 경위가 상세하게 실려 있다. 뒤에 서술하겠지만 이 책에도 이곳이 과연 낙랑군의 치소인가 의심하는 대목이 나온다.
"다만 다소 고려가 되는 것은 토성이 협소한 구릉에 얕게 쌓여져 있다는 점이다. 사면이 개활(開豁)하여 하등의 천험(天險)이 없으므로 하루아침에 적군의 공격을 받게 되면 방수(防守)가 지극히 곤란한 상태에 놓인다는 점이다." ― 문정창(文定昌)『고조선사 연구(古朝鮮史硏究)』한뿌리版 (1969년 纂), 291쪽에서 재인용.
조선총독부는 대동강 남안의 토성을 낙랑군 치소이자 그 전에는 위만조선의 왕험성이었다고 비정했지만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도(首都)는 천험의 요새에 정하는 것이 확고한 원칙인데 대동강 토성은 사방이 탁 트여서 도저히 고조선의 수도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 토성을 왕험성으로 만들어야 ‘한국의 역사는 중국 한(漢) 왕조의 식민지로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으므로 그냥 확정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대한민국 정부의 연구기관이 아니라 일본 혹은 중국의 정부에 소속된 기관이라면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고구려사연구재단(高句麗史硏究財團)을 동북아역사재단(東北亞歷史財團)으로 바꾼 것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왜곡에도 대적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런 목적에서 설치하고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연구기관이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에게 가장 불리한 주장을 일방적으로 취택해 ‘입증된다’고 단정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공식 견해대로 위만조선의 도읍이 평양 지역이었다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해 시비하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과거 한반도 북부가 중국사의 영토인 것은 맞지만 지금은 우리 민족의 땅이니 중국에 내어줄 수 없다’고 달리 주장해야 한다.
북한에서 리지린의『고조선연구』가 나온 것은 1963년이다. 북한의 논문은 무조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념적 잣대를 갖고 있다면 남한에서 문정창의『고조선사 연구』가 나온 것이 1969년이다. 문정창이 한때 조선총독부에서 관료로 있었고 재야사학자였기에 인정할 수 없다면 윤내현 단국대학교 교수의『한국고대사신론』이 나온 것은 1986년이다. 그리고 필자가 집필에 참여했던 3인 공동저술『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가 나온 것은 2006년이다. 또한 한일역사공동위원회의 한국 측 간사를 지낸 성삼제 한국 교육과학기술부 학교제도기획과장이 쓴『고조선, 사라진 역사』가 나온 것은 2005년이다. 이 외에도 고조선의 왕성과 그 경역과 관련해서 많은 서적들이 출간되어 ‘낙랑군은 평양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북아역사재단은 대한민국의 견지에서 서술된 이런 주장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묵살하고 중국과 일본 측에 유리한 주장만을 공식 견해로 확정한 것이다. 고조선에 관한 동북아역사재단의 공식 견해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주장과 완전히 일치한다. 일제식민사학자들과 그 한국인 제자들이 계승한 ‘고조선 = 대동강(평양) 일대 소국’이란 구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조금 바뀐 부분이 있기는 하다.
과거에는 고조선이 개국부터 멸망까지 대동강 유역에 있던 소국이라고 주장했는데, 한·중 수교 이후 만주 일대에서 고조선 관련 유물이 쏟아져 나오자 고조선의 중심지가 만주에서 평양 일대로 이주했다는 ‘중심지 이동설’로 포장을 조금 바꾸었다. 식민사학이 약간 변형된 형태로 위장해 한국사의 주류 이론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 출처:{역사의 아침 版}『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2009년 纂)
▶ 해설:이덕일(李德溢)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