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입니다.
무척 깁니다.
저희 가족은 네식구 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 그리고 저.. 저희 가족은 단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국무총리상을 받았을 정도로 능력이 좋으셨지만,
집에는 한 푼 가져다 주시지 않고 항상 주색을 일삼으셨습니다.
상당한 미인이셨던 어머니는
20살의 나이로 칼을 놓고 결혼안하면 죽겠다고 협박하는 사람과 결혼하셨습니다.
그리곤 시골의 아주 변두리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졌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해외로 나가셨고 6개월에 한번쯤 들어오셨습니다.
그 와중에 생긴 저와 저희 언니.. 연년생으로 태어나 어머니께 갖은 고생시키며 자랐습니다.
저희가 세네살무렵 아버지께서 한국으로 돌아오셔서 친가쪽으로 이사갔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안들어오시기 일쑤였고 어머니는 생활비가 없어
식당이며, 택시운전이며 마다않고 일하셨습니다.
어렷을때 기억으로는 항상 어머니 아버지 싸우던 일뿐..
그러다 저희가 중학생무렵 IMF가 터지고 아버지 회사가 부도가 났습니다.
대표이사로 계셨던 아버지는 억대의 빚더미에 앉으셨고,
가져다 준 돈도 없었는데 집안에 있던 10원짜리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가지고 사라지셨습니다.
그래도 가족이었는데...
어머니께서 친가에 저희들을 잠시만 부탁한다고.. 돈벌어오겠다 하셨지만
'니새끼 니가 알아서해라' 라고 냉대하는 친가였습니다.
그렇게 또다시 버림받은 저희는 땡전한푼없이 외가쪽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변두리쪽이라 일거리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처음엔 외가쪽에서 조금씩 도와줬지만 넉넉치 않은 형편은 외가도 마찬가지라
더이상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어린 저희에겐 아르바이트 자리도 내어지지 않았고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셨습니다.
그때 저희 어머니 나이 30대 중반이셨습니다.
더이상은 빛이 보이지 않았기에 저희 어머니는 저희 둘을 놔두고
서울로 올라가 일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온갖 스트레스와 힘든 생활때문에 항상 하혈을 하셨습니다.
너무 몸이 약해져 더 이상 식당일도 못하게 됐고.. 식당에서 알게 된 어느 언니의 소개로
저희 어머니께선 노래방도우미라는 일을 하게되셨습니다.
한번씩 저희에게 내려오셨다 하룻밤 자고 올라가시던 어머니..
항상 얼굴엔 수심이 그득했고 새벽이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셨는지 도우미 일은 2주만에 그만두시고
조그만 운수회사에 취직하게 되셨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조금 안정이 되자 사글세 지하방을 임대해 저희 세 모녀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 저희는 고등학생이었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하며
아버지께서 남기시고간 빚을 갚으며,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자때문에 더 많아지는 빚들..
결국 어머니는 파산신청을 하셨습니다.
그땐 '끝이다' 라는 생각에 몇날 며칠을 저희 모녀 부둥켜 안고 울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시작' 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한창 반항이 심했습니다.
삐뚤어지게 나가지는 않았지만, 고지식하고 융통성없게 당하고만 사는 어머니가 너무 싫었습니다.
옆에서 같이 거들어주지는 않고 밖으로만 돌아다니며 남자친구나 사귀는 언니가 너무 싫었습니다.
집에서 먹는 밥은 항상 마른 밥에 김치 몇조각이 전부였습니다.
언니와 싸울때면 언니는 돈 들어가는 일이라면 정색을 하는 저를 화나게 만들려고
온 집안의 불을 다 켜고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까지 틀어놨었습니다.
그럼 저는 소리지르고 발악하며 불끄고 냉장고문 닫고 다녔습니다.
언니는 또 불켜고 냉장고문 열고..
그런 상황이 너무 싫었습니다.
같이 나눌 수 있는 이가 없다는게 너무 슬프고 힘들었습니다.
내가 우리집을 살리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 과외는 꿈도 못꿨지만 항상 5등 안에 들었습니다.
가방끈이 짧으셨던 어머니는 대학은 어떻게 해서라도 보내겠다는 생각이셨습니다.
언니는 밖으로 돌기만 하다가 수능 전에 마음잡고 공부하더니
지방 국립대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제가 수능볼때쯤엔.. 한 달에 90벌어 생활비 다 쓰고 등록금까지 내기엔 역부족이었던
저희 집안 형편때문에 저는 공부를 포기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어떻게든 입학금은 마련해볼테니 일단 입학부터 하라고 채근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며 재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어느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됐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는게
그 동안 살면서 들었던 의문점들을 한번에 풀어주는게..
'이것이다. 내가 가야할 길은..' 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리곤 조용히 집을 나와 강원도 산골에 있는 절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을 드리고 나서부터 저녁예불을 드릴때까지
밭매고, 나물씻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하루에 5~6시간 잠을 자며 나머지 시간은 밥먹는 시간, 예불 드리는 시간 말고는
말 그대로 노가다만 했습니다.
가족들과 힘들게 살때보다 몸이 더 고단하고 부서질것 같았지만
마음만은 그리 편할 수 없었습니다.
응거리진 코피들을 10분이나 쏟으면서도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경찰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왔습니다.
실종신고가 들어와있다고.. 직접 가야된다고..
그렇게 가족들을 다시 보게됐고,
제가 절에 있는 동안 저희 가족은 예전보다 상황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언니는 마음을 다잡고 공무원 공부를 열심히 했고,
어머니도 성실히 직장을 다니셨습니다.
가족들을 봤을때 '아직은 때가 아니구나' 란 생각에
절을 뒤로하고 가족들이 있는 서울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내가 그렇게 사라졌던 것은 힘든 상황에 대한 '도피' 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돌아와 일자리를 구하고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생활에 전념하자
집안 분위기도 점점 괜찮아졌습니다.
어머니도 40대 초반의 나이에 맞지 않는 많은 주름들이 조금씩 펴질 수 있었고
예전의 그런 모습은 어디갔는지 엄마를 위하고, 저를 따뜻이 바라보는 언니의 모습에
다행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절로 다시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와 언니의 행복해하는 모습,
그리고 내가 사라질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에 차마 발길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께서 요새 만나는 아저씨가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저씨를 만나뵙지만, 저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가식적이고 사악함을 숨기고 있는 느낌..
하지만 티낼 수 없었습니다.
저희를 여태 키워오시며 갖은 고생하셨는데.. 사랑하는 분을 만났다니..
감히 뭐라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저씨와 살기로 하고 저희는 제가 돈을 벌고 있으니
언니는 공부를 계속하기로 하고 분가를 결심했습니다.
어머니와 그 아저씨는 결혼식을 동거한지 1년만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결혼식 피로연 후, 아저씨는 돌아가셨습니다.
결혼식날 운명을 달리하다니..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새벽에 전화를 받고 달려갔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셨습니다.
아저씨께서 결혼식날 돌아가신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어머니께서 체포되셨단 말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이게 무슨일인지..
알고보니 1년여동안 어머니께서는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하셨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저희들... 제 자신이 이렇게 한심스럽고 ..
정말 미울 수 없었습니다.
그 아저씨와 살면서 병원에 입원했던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교통사고라고 하셔서
정말 그런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도, 저희도 서로 서울 외곽 반대편에 살고 있어 왕래가 잦진 않았지만
그래도 전화는 일주일에 한번은 꼭 하고 있었습니다.
전화하면 왜 그렇게 애처로운 목소리로 "우리 00야 00야 사랑한다" 라고 하셨는지
못난 불효자는 이제야 알게됐습니다.
폭력으로 코뼈가 부러져 응급실에 실려간적도, 온몸에 멍이드는건 두말할 것 없고
한 달간 무릎을 절뚝거리며 다녔던 이유도..
화장실 대야에 처박혀서 밟혔던 물고문이 있었단 사실도.
그 이후에 이어지던 성폭행도..
어찌..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눈 뜨면 밥먹고, 일하고 돌아와 씻고 다시 눕고..
운명이란게 뭔지, 인생이란게 뭔지, 삶이란 무엇인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더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 바라는건 구치소에서 새우잠 자고계실 어머니 대신 제가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간절 하다는 겁니다.
소설 잘썼죠?
ㅋㄷㅋㄷ 리얼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