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혁을 위한 신학 논제 17개 (10, 15번 글에 디오니소스, 마리아 관련 나옵니다)
교회 안에서 실종되었던 예수를 다시 찾는 일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김준우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1.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지 십여 년이 지났다. 이것은 군사독재 정권이 1960년대부터 시작한 경제개발의 저곡가-저임금 정책과 도시화-산업화 과정으로 인해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급속도로 해체되고, 전통적 가치관이 혼란을 겪는 가운데,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착취, 고향을 떠난 뿌린 뽑힌 사람들의 사회 심리적 소외감에 편승하여, 남한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 될 만큼 급성장한 한국교회가 1980년대부터는 민주화 투쟁을 거쳐 소비사회로 진입하게 되어, 체제에 대한 비판정신과 여가문화가 점차 확산됨으로써, 1990년대부터는 교회성장이 정체되고, 교회성장주의의 폐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30여 년 동안 계속된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교회성장주의가 초래한 개교회주의, 대교회주의로 인한 교인쟁탈전, 무리한 교회 건축, 해외선교사 파송 경쟁, 교회의 사유화와 세습, 상명하복식의 비민주적 권위주의, 교회내 여성 지도력의 부재, 교단분열과 교단장 선거를 둘러싼 억대의 금품살포와 파벌주의 등의 외적인 문제들, 그리고 한국교회의 신앙적인 측면에서 일반적인 기복신앙과 내세주의가 초래하는 온갖 폐해로 인해,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고 교회 본연의 사명을 망각한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특히 일부 성직자들과 기독교인들의 타락과 비리로 인해, 교회가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한 것에 대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기 시작한 때문이다. 더군다나 2000년 이후 우리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분야는 일정부분 민주화/투명화 되고 있지만, 대형교회들은 여전히 "마지막 남은 성역"으로서 비민주적 권위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신자들의 정직한 질문을 봉쇄하고, 비판정신을 압살하고, 자주적인 사고능력을 박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탈권위주의에 반대하며, 국가보안법 철폐, 사립학교법 개정, 과거사 진상규명법 등 각종 개혁정책에 반대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혈안이 된 반개혁 세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2. 한국의 개신교회가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개혁을 더욱 시급한 과제로 만들고 있다. 한국의 17개 주요 개신교단이 각각 정부에 보고한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인 수는 1995년의 1,450만 명에서 2001년의 1,282만 명으로, 6년 동안 약 11.6%가 감소하였다. 이처럼 급격한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은 젊은 층과 고학력자가 이탈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한국사회의 대졸자 비율이 74%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학력자와 젊은 층의 이탈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현재 농어촌의 몰락 속도와 도시 교회의 노령화 추세로 볼 때, 교회개혁은 한국교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전세계적인 탈기독교 시대에 서양의 주요 교단들은 교인수가 매 10년마다 절반으로 줄어드는 추세에 있어, 한 세대가 지나면 제도적 교회의 죽음이 현실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국교회보다 더욱 훌륭한 교육시설, 교재, 교사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교회가 임종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더 이상 성장주의 신학과 현재의 교회 구조로는 이 근본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며, 이 근본적 위기에 대한 진지한 원인분석과 철저한 대책을 통해서만 교회개혁이 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분명해졌다.
3.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모범적 사례는 16세기 종교개혁운동과 1세기 예수운동이다. 16세기에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제도적인 구조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오직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정치경제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일차적으로는 "복음의 재발견"이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1세기의 예수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유대교의 하느님 이해와는 전혀 다른 하느님 이해에 근거한 "복음의 발견" 때문이었다. 즉 교회의 제도적인 구조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개혁의 원동력과 추진력이 되는 내면적인 개혁, 즉 신학적인 개혁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가 당면한 사회적 신뢰성 상실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신학적인 위기, 그 지적인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해야만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위기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신학교육의 혁신 없이, 최근 신학대학교 총장들이 한국교회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영성교육과 정직성을 강조하고, 한국교회의 원로들이 죄책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교회의 쇠퇴 추세에 대응하기조차 미흡한 것으로 판단된다.
4.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신학적 위기의 본질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집으로 돌아오던 예수의 부모들처럼(누가 2:44), 예수가 교회 안에서 실종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처럼 예수 없는 교회는 결코 기독교의 교회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이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위기의 뿌리이다. 즉 예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믿으라고 한 새로운 비전 하느님 나라를 보고 믿기보다는, 예수의 손가락, 즉 예수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즉 한국교회를 비롯하여 전 세계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선포해왔던 복음은 주로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이 해석한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 신화"였지, "예수의 복음," 즉 예수 자신이 가르친 복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처음 제자들의 가르침에 근거했지, 예수 자신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를 예수의 제자들의 가르침과 후대의 교리들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교회가 선포해왔던 원죄의 교리와 예수의 보혈에 의한 대속적 구원의 교리는 예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주로 바울의 가르침인가? 이 세상(cosmos)과 인간의 육체(sarx)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예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인가? 사회적으로 힘없는 약자들에게 노예의 도덕, 즉 굴종과 체념을 가르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정치권력과 결탁한 교회 지도자들의 왜곡인가? 기독교인들의 탈정치화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이처럼 "예수의 복음"을 다시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누구의 제자들인지를 확인하는 정체성의 물음이며 신앙고백의 정직성의 물음인 동시에 교회의 본질에 관한 물음이다.
5. 한국교회가 복음으로 선포해왔던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 신화"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독생자로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시고 세상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여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언젠가는 재림하실 분으로서, 예수 자신, 곧 메시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분이다. 전통적으로 이렇게 고백해왔던 "그리스도 신화"는 예수의 의미에 대한 고대 유대인들의 한 특정한 해석이며 신화적 표현이었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억압과 성전 지배체제의 착취에 맞서서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의 질서에 정반대되는 통치질서, 즉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가르치고 실행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처럼 예수가 목숨을 바쳤던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사에서 신자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로 내세화되거나,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로 신령화되거나, 제도적 교회가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되어버림으로써, 탈정치화되고 비역사화되었다. 따라서 예수 자신이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졌다든가, "피의 공로에 의한" 대속의 교리를 가르쳤다든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는 결코 가르친 바 없으며, 그렇게 가르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제자들이 뜻밖에 경험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예수의 삶 속에서 발견한 하느님만의 성품과 능력과 구원에 대한 체험과 감격을 자신들의 전통적인 희생제사 제도와 속죄양 제도에 입각하여 고백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해석하게 되었고, 예수가 하느님의 독생자로서 신성을 지닌 분으로 점차 신격화시키고, 고대 사회의 높은 영아사망률 때문에 영아세례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원죄 교리를 발전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자 그리스도 신화"를 만들어나간 것이 교회의 정통주의가 되었던 것이다.
6. 이처럼 전통적으로 교회가 선포해왔던 복음이 예수 자신이 가르친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복음," 즉 "그리스도 신화"로 둔갑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적 적합성과 당시 그리스 로마 문화의 신인(divine-man) 영웅들과의 경쟁 속에서 그 선교적 타당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오늘날에는 그 전통적 복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 신화"의 동정녀 탄생 교리와 육체 부활 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교리,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인한 대속의 교리 등은 결국 현대인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이 이해하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없는 복음은 더 이상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의 복음이 될 수 없다. 신앙고백은 개인과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에 결정적인 요인이기 때문에, 신앙고백에 정직하지 못한 경우, 기독교 신자들의 자기정체성과 행동, 교회의 행태는 신앙과 상관없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존 캅의 지적처럼({교회 다시 살리기},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 정직한 신앙고백만이 교회에 대한 헌신과 교회의 본질 회복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7. 오늘날 한국교회의 관습적 신앙단계에서 매우 일반적인 예수상, 즉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대한 신화적-문자적 고백은 창조과학만큼이나 반지성적일 뿐 아니라 심각한 윤리적 폐해를 초래한다. 교회에서 흔히 가르치는 것처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삼박자) 축복을 받고, 또 죽은 다음에는 영생을 누린다고 가르치는 마당에, 교인들이 매우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는가? 온갖 비리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는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비기독교인들보다 못지 않은 이유는 한국교회가 이처럼 "예수 이름으로" 은연 중에 이기주의와 탐욕을 가르친 때문은 아닌가? 또한 세계적으로 1980년대 이후 경제불황 속에서, 특히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라는 치열한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들어, 기독교의 모든 주요 교단들이 급속하게 몰락하는데, 유독 가톨릭 교회와 오순절 교단과 복음주의 교단만 교세가 성장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유산자들에게는 현세에서 자본의 무한 축적과 이윤의 무한 증식을 도모하게 하고, 무산자들에게는 내세에서의 영생을 약속하는 "예수에 관한 복음"은 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 사회에서 주문만 외우면 복을 내려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거나, 현재의 착취와 경쟁, 박탈감을 견딜 수 있는 "민중의 아편" 기능을 충실히 감당하기 때문이 아닌가?
8. 또한 언젠가 재림하여 마지막 심판을 통해 이 세상의 온갖 악을 청산할 예수는 교인들에게 마지막 심판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원수들에 대한 피의 보복과 전쟁의 화신으로 둔갑되지 않았는가? 상당수 평신도들이 "진노와 복수의 하느님/예수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된 배경에는 기독교의 대속의 교리가 가르쳐왔던 전통적인 하느님 이해, 즉 자신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독생자의 "보혈"마저 요구하는 하느님의 잔인성, 그 피에 굶주린 하느님의 모습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지 않는가? 멜 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이 끔찍한 모습으로 그리는 하느님의 모습은 결코 예수가 믿고 가르쳤던 "아빠" 하느님의 자애로운 모습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일부 성직자들은 이런 "진노와 복수의 하느님"을 이용하여 교인들을 율법주의와 교회중심주의로 옭아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궁극적으로 지옥에 대한 공포심과 죄의식은 아동기의 네거티브 통제 방식일 뿐이지, 성숙한 인간을 위한 교육방식은 아니다. 환경파괴 문제에 대해 가장 무관심한 집단이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 역시, 예수 재림을 통한 신자들의 휴거를 어서 속히 고대하는 희망이 이 세상 현실에 대한 무책임성을 조장한 때문이 아닌가?
9. 결국 "예수에 관한 복음"은 결과적으로 "예수의 복음"을 왜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배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스도 신화"가 특히 로마제국의 제국 종교가 된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교리,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절대성에 입각하여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와 종교 제국주의를 초래하고, 그리스도의 직분을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로 설명함으로써 그 대리자를 자임하는 사제들의 권위주의와 교회 계급주의, 사제중심주의 등이 초래된 것은 예수의 섬김과 평등주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배반한 것이다. 기독교 2000 년 역사에서 "예수 이름으로" 저질러진 온갖 만행들, 예를 들어, 유대인 학대와 재산탈취, 여성 억압,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종교전쟁, 노예제도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 유색인종에 대한 정복과 착취 등의 만행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특히 아메리카 제국의 보수 기독교 집단인 네오콘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침공과 점령, 그리고 한국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을 사로잡고 있는 친미반공주의와 타종교인들에 대한 배타주의적 멸시와 차별은 예수를 잘못 믿어 생겨난 결과들이다. 지난 연말 동남아에서 수십만 명의 인명 피해를 냈던 쓰나미 재앙에 대해 어느 감리교 목사가 "이방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한 것은 목회자가 어떻게 "예수 이름으로" 하느님을 능멸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수십만 명의 이교도들의 목숨을 이처럼 파리목숨처럼 여기고 죽게 만드는 하느님은 기독교의 "그리스도 신화"가 낳은 괴물이지,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과는 전혀 반대되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이처럼 타종교인들에 대해 차별과 적개심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배타주의는 정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배반한 것이다. 즉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마태 5:45)을 가르친 예수는 타종교인들에 대해 적개심과 증오심을 가르친 바 없다. 따라서 기독교의 일반적인 배타주의는 결코 예수의 가르침은 아니다. 아니, 기독교의 일반적인 배타주의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되는 주장이다. 교회가 예수를 배반하고 적그리스도가 된 가장 대표적 사례가 바로 타종교인들에 대한 배타주의와 종교 제국주의다. 기독교가 역사상 가장 종족학살을 많이 자행했던 폭력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이며 가장 비영성적이며, 실제로 윤리적이라고는 거의 말할 수 없는 신앙이 되어 버린"(랭던 길키) 근본적 이유는 예수의 복음을 배반한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리스도 신화"의 역사적 폐해들이 너무 엄청난 것이어서, 존 캅이 결론짓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유태인들, 가난한 사람들, 여성들, 유색인종들, 학자들, 동식물들에게 결코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나쁜 소식"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기독교의 정통적인 교리들, 즉 "예수에 관한 복음"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그 배후에 놓인 역사적인 교리화 과정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예수의 복음"을 다시 찾을 수 없다.
10. 더군다나, 오늘날에는 기독교의 정통적인 "그리스도 신화"의 거의 전부가 고대 지중해 지방의 밀의종교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와 똑같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그리스도 신화"에 매달려왔던 기독교의 절대성과 독특성, 진정성마다 부정되는 현실이다. 기독교의 독특성은 이제 더 이상 전통적인 "그리스도 신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있다. 즉 예수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초기 제자들의 해석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특징적 면모들에 근거해야만 한다.
11. 그 동안은 역사적 예수를 찾는 방법을 알지 못했었지만, 1980년대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특히 [예수 세미나]의 학자들을 통해 실종되었던 예수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는 자료 문제 때문에 복음서들 배후의 역사적 예수를 알 수도 없으며,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탐구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예수의 비유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예수 당시의 상황과 복음서들에 대한 학제간 연구, 새로운 문서들의 발견,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핵심적인 전통 교리들의 생성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실종되었던 예수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특히 예수의 가르침의 진정성 여부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그 배경과 상황, 즉 유대인 전통의 종교적 배경과 로마제국의 지배 상황과 종교문화적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복음서들의 예수" 배후에 있는 "예수의 복음"을 규명하여, 예수에 대한 초대교회의 해석된 복음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가르친 복음을 해명하고 그 복음에 충실하고자 한다. 초대교회의 예수 해석("복음서들의 예수")이 예수 체험("예수의 복음")에서 비롯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 연구는 초대교회 당시에 "메시아 마케팅"(로버트 펑크)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예수의 복음"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12. "예수의 복음"은 예수 자신의 영적인 경험과 제국의 착취, 사회적 종교적 모순에 대한 경험에 근거하여 그의 스승이었던 세례요한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것이다. 기원전 6세기부터 계속되어왔던 강대국들의 식민지 지배체제 속에서, 국가 회복의 꿈이 계속해서 수포로 돌아가던 절망적 상황 속에서, 세례요한은 또 다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며 금식하면서 준비했던 묵시종말론적 예언자였다. 그러나 "예수는 희망을 사랑으로 바꾸고, 미래의 종말론을 현재의 해방으로 바꿈으로써, 스스로를 종교와 묵시사상으로부터 해방"시켰다(토마스 쉬한). 예수 세미나는 예수를 세례요한과 같은 묵시종말론자가 아니라, 유대교 신비가로서 인습적 지혜를 뒤집어엎는 전복적 지혜의 교사이며 사회적 혁명가였다고 주장한다.
13. "예수의 복음"은 예수 자신의 하느님 체험에 근거한 복음으로서, 특히 사제들과 희생제사의 중재 없이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 체험과 사회적 약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특별히 돌보시는 정의와 자비의 하느님에 대한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는 복음이다. 즉 성전체제가 가르쳤던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그에 입각한 사회종교적 차별에 맞서서, 그런 차별을 무색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정의에 근거한 예언자 전통의 복음이다. 따라서 예수의 복음은 로마제국의 세계화 앞에서, 살인적 폭력과 착취, 성전체제의 억압과 배제에 맞서서, 황제의 나라와 그 통치가 아니라,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의 대안적인 삶의 질서를 보여준 것이다. 즉 예수는 로마제국의 세계화라는 브로커 체제의 연고주의와 불의한 착취구조, 그로 인한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에 맞서서, 또한 성전체제의 "거룩의 정치학"이라는 차별과 배제의 구조에 맞서서, "함께 아파하는 삶의 정치학"(마커스 보그), 곧 인간의 무제약적 존엄성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브로커 없는 나라"(크로산)를 가르쳤고 실행했다. 예수가 가르친 비유들의 이런 체제전복성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탕자의 비유, 큰 잔치의 비유, 포도원 품꾼의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등에서 "내부인들," 곧 자신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고 그렇지 못한 "외부인들"에 대해 멸시하며 차별했던 자들이 마지막에는 그 자격을 박탈당하는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로버트 펑크). 또한 예수가 실천한 개방적인 밥상공동체, 평등주의는 "협력적 사회라는 복음"(아이슬러)의 공동체 운동이며, 원수들에 대하여 우리들 속의 증오심마저 뿌리뽑는 "비폭력의 복음"(월터 윙크)이다. 예수의 복음의 바로 이런 반제국주의적 성격과 반성전체제적 성격 때문에,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선 사람들이 성전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었으며, 로마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을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통치 질서가 우리의 인간성을 극대화하는 길이며, 공동체의 평화를 실현하는 진리임을 믿고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14. 이런 "예수의 복음"에 근거한 "예수에 관한 복음," 그 "그리스도 신화" 가운데 우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독생자)"이라는 고백은 구약에서처럼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예: 왕, 예언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표현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출발하여, 점차 생물학적인 표현(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하느님)으로 오해되었고, 마침내는 형이상학적 표현(삼위일체의 제2격인 성자)으로 오해되었다. 즉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 =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지명된 시점 역시 바울에게는 "부활 때"(롬 1:4), 마가에게는 "세례 때"(1:11), 마태와 누가에게는 "잉태 때", 요한에게는 "태초에"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초대교회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지명된 때가 앞당겨졌다는 사실은 예수에 대한 신격화 작업이 서서히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교리는 예수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야 한다.
15. 또한 동정녀 탄생이 문자적으로, 마리아의 자궁 속에 단 한 방울의 정액조차 들어가지 않은 상태로 예수가 임신되었다는 말인가? 복음서 기자가 이처럼 문자적인 의미로 기록했다는 말인가? 동정녀 탄생이 문자적으로, 산부인과적인 의미에서 사실이라면, 고대세계에서 예수 이외에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주장된 인물들, 예를 들어, 플라톤, 네로, 석가모니 등도 신성을 지녔다는 뜻인가? 동정녀 탄생은 인간 예수의 삶 속에서 하느님만의 성품과 능력과 구원을 경험한 제자들의 놀라움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의 교리는 예수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인간성이 극대화된 상태"(존 쉘비 스퐁 감독)를 위해 분투 노력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이며,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확증이다.
16. 예수의 "영혼 구원"은 제1 차축시대(800 BCE-200 CE) 이후 종교의 공통적인 구원론이었다. 즉 페르시아의 짜라투스트라,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인도의 고타마 붓다, 중국의 공자, 노자, 장자, 그리스의 여러 철학자들이 이 시대의 정신적/종교적 거인들이었다. 이들이 모두 그 이전 시대의 원시종교의 특성들, 즉 인종적-부족적이며 일원론적이며 제의적인 자연종교들의 한계를 절감하고, 개인적으로 "시공의 세계를 초월하여 영원을 음미"하고,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영원하며 초월적인 "저 세상"에서의 해방과 구원을 추구하게 된 것은 고대 제국들의 무자비한 정복전쟁과 권력집중적 지배체제로 인한 민중들의 가중된 고통과 직결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제1 차축시대 이후의 역사적 종교들이 지향했던 영원하며 초월적인 "저 세상"에 기초한 신화는 기독교의 근본이 되어, 성경은 저 세상으로부터의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저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다시 저 세상으로 올라가고, 신자들은 죽은 후 저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신화를 낳았다. 그러나 로이드 기링이 {기로에 선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자세하게 분석한 것처럼, 제2 차축시대(1600-1800 CE)를 지나면서,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 종교학, 성서학 등의 발전을 통해, 비판의 핵심은 "저 세상"에 있었다. 따라서 제2 차축시대 이후에는 예전의 역사적 종교가 세속적 종교로 바뀌며, "저 세상성"은 "이 세상성"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기독교가 전통적인 이원론적 세계관과 영육 이원론을 극복하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구호를 "이 세상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로 바꾸며, 이 세상에 대해 책임 있는 통전적인 신학을 형성하기 위해 그동안 무시해왔던 몸의 신학, 땅의 신학, 세계의 신학을 발전시킬 단계에 접어들었다.
17. 오늘 우리의 상황은 예수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화와 사회적 빈부격차의 심화, 종교적 차별과 사회적 약자들의 절망감이 매우 깊은 현실이다. 즉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세계화라는 현실에서, 초국적 자본의 지배와 주변 제국들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직면한 상황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및 독도 영유권 주장, 그리고 미국의 대북 개입전략 등 제국주의에 대처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예수의 복음의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분명하게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서의 하느님은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을 가장 방해하는 세력은 제국들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세상 제국들의 지배와 착취에 맞서서 개인의 생명과 공동체의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하느님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성서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제국주의를 찬양할 수 없으며, 제국의 필연적인 멸망과 제국의 전쟁신학의 폭력의 가면을 벗기고 그에 저항하는 과제를 맡고 있다(월터 윙크). 예수는 제국의 정복과 폭력과 지배와 착취에 정면으로 맞서서, 섬김과 나눔과 비폭력과 협동을 가르쳤다. 사회적 경쟁과 배제, 차별과 무관심에 정면으로 맞서서, 예수는 서로 의존하고 품어 안을 것을 가르쳤다. 종교적 자만심과 증오심에 정면으로 맞서서 하느님의 자비에 기초한 사랑과 자비를 가르쳤다. 극심한 취업난과 높은 실업률,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의 악화 속에서 인간의 자아실현보다는 취업을 위한 비인간화 현실에서 예수의 복음의 핵심인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모든 인간, 특히 사회적 약자들의 무제약적 존엄성과 서로 간의 섬김과 나눔, 협동과 함께 아파함의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구현할 때이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예수의 복음"을 정직하게 이해하고 그 복음에 충실할 때,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으며,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성을 회복하여, 교회의 쇠퇴를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형평성에 공헌하며 민족사의 가장 큰 과제인 통일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본인은 이 열일곱 개 신학논제를 한국 개신교회의 대문들 위에 걸어놓고, 교회개혁을 위한 신학적 논의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2005년 4월 30일
김준우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