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간 가짜 인생산 '번개 반점'의 김대중씨
"내 이름으로 신화만들어 갈 것"
▲ 9년여동안 남의 이름을 빌려 타인의 신분으로 살아온 '번개 배달원' 김대중씨
1990년대 말 고려대 안암캠퍼스에 다닌 학생들에겐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번개처럼 빠른 자장면 배달서비스로 ‘번개 배달원’으로 불린 조태훈씨(38). 그는 이후 ‘번개 반점’을 차렸고 수많은 기업체와 대학을 다니며 마케팅 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중학교 퇴학 학력의 그에게는 ‘신지식인’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그랬던 그가 9년여동안 최근 남의 이름을 빌려 타인의 신분으로 살아온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안겼다.
그와 함께 그의 ‘성공 신화’도 무너져내렸다. 사람들은 ‘사기꾼’이라며 그를 손가락질 했고 수첩을 빽빽하게 채웠던 강의 일정도 거의 취소됐다. 검찰은 수년간 소득세를 포탈한 혐의로 지난 18일 경찰에 입건된 그에 대해 불구속 조치를 내렸다. 광주 서부경찰서에 입건됐던 그는 19일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도장을 판 일이었다. ‘김대중(金大中)’이라는 본명이 새겨진 2만원짜리 뿔도장을 앞에 두고 그는 울어버렸다.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아서, 그리고 더는 불안감에 쫓기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나를 찾게 돼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남의 이름을 빌렸기에, 사기를 당해도 하소연하지 못했고 결혼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21일 “이제 지난 날은 모두 잊기로 했다”고 했다.
- 남의 주민등록증을 손에 넣게 된 계기는.
“1994년 서울 을지로의 한 중국집에서 배달원 생활을 했다. 함께 배달원을 하던 사람 중에 조태훈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는 배달원들이 ‘도망’가는 일이 잦아 주인이 주민등록증을 ‘맡아 두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날 조씨가 가게 돈을 들고 달아나버렸다. 주인에게 내가 얼마나 꾸중을 들었는지…. 그 때 그가 놓고 간 주민등록증을 간직한 것이다. 훔친 것이 아니다. (조씨를) 다시 만나면 흠씬 패줄 생각이었다.”
▲ 고려대 후문 근처 중국음식점에서 배달원으로 일할 당시 김대중씨
- 그런데 왜 ‘조태훈’으로 둔갑했는가.
“하필이면 을지로의 중국집이 망해버렸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게 된 나는 주민등록증이 필요하게 됐다.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나는 예비군 소집에 응하지 못해 1993년 주민등록증을 말소당한 상태였다. 나는 그의 주민등록증을 신분증으로 사용했다. 정말 악의는 없었다.”
- 무려 9년이 흘렀다. 그 후라도 자수할 수 있지 않았나.
“고려대 근처 중국집의 ‘번개 배달원’으로 유명해지면서 고려대 경영대에서 강의를 하게 됐다. ‘명예강사’ 위촉장도 받았다. 나는 위촉장에 ‘조태훈’이라는 이름을 적어넣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나 유명해져 있었다. 적발되면 무조건 징역을 산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사실을 밝히라’며 설득했지만 나는 ‘조금만 더 있다가…’ 하면서 차일피일 미뤘다.”
- 남의 이름으로 사는데는 불편도 많았을텐데.
“경찰에선 이런 얘기까진 못했는데. (그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 큰 아들(7)을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재작년에야 출생 신고를 했다. 아들도 아내의 호적에 올렸다. 통장도 만들 수 없었다. ‘번개 반점’을 낸 뒤 사기도 많이 당했다. 그렇지만 하소연 할 수가 없었다. 조사 과정에서 내가 누구라는 것이 발각될까봐 두려웠다. 밤에 아파트 복도에 발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내려앉을만큼 조마조마하게 살았다.”
- 이름을 되찾은 기분은.
“인터뷰 끝나고 바로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을 살릴 것이다. 결혼 신고도 하고 아들 둘(7,2세)도 내 호적에 올리고…. 강사를 하면서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지 못해 강사료도 많이 떼였다. 어차피 학생과 군인에게는 무료로 강의를 했으니까 돈이 아까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 이름으로 그들 앞에 서고 싶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난 중학교도 못 다녔지만 ‘번개 신화’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오늘부터는 내 이름으로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내가 강연에서 수없이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말라, 쓰러지지 말라’고 외쳤는데, 내가 여기서 쓰러지는 것은 ‘위선적’인 일이다. 강연을 들어주고 걱정해준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다.”
(박민선기자 sunrise@chosun.com )
입력 : 2003.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