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피나콜라다
다음날 나는 Google 을 통해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DJ Sharehl.. 그냥 재미로 검색해본 것이었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놀라웠다. 나는 수많은 동영상과 기사를 통해 그를 찾아 볼 수가 있었다. 실력이 있긴 있는 놈인가 보다.. 나는 갑자기 그에게 무작정 끌리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나는 Zara에 들러 드레스를 고르며 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Hello!”
그의 섹시한 목소리가 내 귓가로 짜르르하게 전해왔다.
“나야.. 재키.”
“오.. 섹시걸.. What’s up?”
“음.. 뭐해?”
“mixing 작업 중이었어. 넌 뭐해?”
“쇼핑..”
“Cool. 내 CD들어봤어?”
“응. 너무 좋았어.”
“정말? 몇 번째 곡이 제일 좋았어?”
“다 좋아!”
“하하하..”
그가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무척이나 섹시했다. 나는 다시 그에게 무작정 끌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대화가 끊긴 틈에 나는
“오늘… 볼래?”
하고 그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오늘?”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응.”
“정말, 나 만나는 거야?”
“응.”
“Ok, baby. 오늘밤에 너희 숙소 앞으로 가서 전화할게.”
그는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귀여운 자식. 뉴욕에서 멋진 인기 DJ 남자친구하나 만들어 두는 것. 이거 꽤 근사한 일이지 않은가?
나는 전화를 끊고는 그를 위한 검정 드레스를 사 들고 룰루랄라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검정 드레스를 차려 입고 말끔히 화장까지 마치고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밤 10시가 지나도록 그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Hey, What’s up?”
곧 무덤덤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내가 토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응.. 이제 나가려구.”
“뭐? 시간이 몇신데!”
“조금만 기다려 곧 갈게. 30분이면 도착할거야. 도착하면 연락할게.”
“알겠어.”
나는 맥없이 전화를 끊고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함께 저녁 먹는 것쯤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나?
‘그는 참으로 바쁜가 보다,’ 이렇게 나를 위로하긴 했지만 역시나 힘이 쭉 빠지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따라라라라]
30분 후 전화가 걸려왔다.
“Hello!”
“나야.. 도착했어.”
“응.”
그의 전화에 난 당장에 기분이 좋아져서는 폴짝거리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차에 앉아 내가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차에 올라앉자 그는 나를 보며 끈적한 미소를 지었다.
“Wow, look at you. You look so sexy!”
“고마워.”
그는 내게 짧은 키스를 하고는 차를 몰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데?”
“어디 가고 싶어?”
그가 내게 되물었다.
“음.. 뭐 영화 보는 건 어때?”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차를 몰 뿐이었다.
“어디 가는데?”
“잠깐 저기 들렀다가.”
그는 말을 얼버무리며 계속 차를 몰고 있었다.
“음악 들을래?”
그리고 그는 R&B풍의 끈적한 음악을 틀었다. 나는 그 음악에 취해 바깥을 바라보며 그의 차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가 차를 멈춘 곳은 나무가 우거진 어두운 길가였다. 뉴욕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할 정도로 외진 곳.. 우리는 맨하탄을 벗어나 있었다.
“So.. what’s up?”
그가 뜬금없이 내게 또 인사말을 해왔다. 여기 사람들.. 부담스러울 정도로 인사말이 많다.
“Nothing. What’s up with you?”
“음.. I missed you so much. Did you?”
우린 겨우 하루 밤의 몇 시간을 보냈던 사이.. 그리고 그는 수많은 클럽녀들에게 둘러싸여 일하는 DJ.. 하지만 나는 그의 짧은 말에 바보같이 마냥 설레고 있었다.
“Of course. 근데 왜 이렇게 늦었어?”
“아.. 오늘은 믹싱 작업하랴.. 미팅하랴.. 너무 바빴어.”
“Ok.”
잠시 정적이 흐른 후,
“한국사람들은 흑인 싫어해?”
하며 그가 뜬금없는 질문을 해 왔다.
“그런게 어딨어.”
“한국에 가 보고 싶다. 니가 사는 곳에 가 보고 싶어.”
“다음에 와. 내가 구경시켜줄게.”
“와.. 정말?”
“당연하지!”
“나.. 니가 너무 좋아.”
그리고 그가 나를 안았다. 그의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넌 너무 부드럽고 따뜻해. 계속 이렇게 안고 있고 싶어.”
그는 나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의 따뜻한 가슴과 단단한 근육.. 그리고 좋은 향기.. 나는 어느새 그에게 취해가고 있었다.
“뒤로 가자.”
갑자기 그가 제안했다.
“왜?”
“여긴 너무 불편해. 너랑 더 가까이 있고 싶어.”
우리는 뒷 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가 내 품으로 무작정 파고 들었다.
“니 몸이 좋아. 너무 섹시해.”
그가 내 가슴에 얼굴을 부벼댔다.
“잠깐만..”
“넌 너무 예뻐.. 넌 너무 섹시해..”
그는 끊임없이 내게 달콤한 말을 쏟아 부어대며 내게 파고들었다.
슬프도록 달콤한 음악과 그의 속삭임.. 그리고 부드러운 그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모든 방어막이 서서히 풀려갔고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어느새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에이 그냥 즐기지 뭐.. 라는 사만다적인 생각과 함께 그래도 이러면 안되는데 하고 맞서는 나의 도덕 관념.. 하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오.. 너는 정말 굉장해!”
내 귀에는 그의 환호섞인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순간 움직임을 멈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왜 그래?’ 라는 나의 물음이 나올 틈도 없이 동그랗게 눈을 뜬 내 얼굴에 자신의 그것을 사정없이 뿌려대기 시작했다.
“꺅!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내 피나콜라다 맛이 어때! 하하하.”
그날 밤 그의 피나콜라다맛은 내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이후 몇 일간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고 나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한 순간이나마 그런 변태 놈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내 자신이 한심할 뿐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들른 그의 My space (싸이월드와 비슷한 커뮤니티 서비스)에서 나는 그만 넉 다운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갤러리에는 클럽에서 그와 내가 함께 얼굴을 맞대고 찍은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올라와 있었고 그 밑에는 ‘My first Korean bitch’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나를 단순한 하룻밤의 상대로 대한 것은 다분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감히 나를.. 어떻게..
그 사진을 발견한 순간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길가의 차 안에서 그런 식으로 나를 대했다는 그 기억과 내 사진을 그런 식으로 인터넷에 올려 놓았다는 현실에 온몸이 떨려왔다. 니가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었겠다! 나는 당장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Hello!”
그의 태평한 목소리가 내 가슴속 휘발유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사진 봤어!”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사진?”
그는 뜬금 없다는 듯 물어왔다. 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Your myspace!”
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Ok.. 그래서? It’s just kidding.”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태평스러웠다. 나는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워!”
“Ok.”
My God.. 그의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어떻게.. 어떻게..”
흥분한 건 나 하나였다. 하지만 머릿속에 가득 찬 단어들이 제멋대로 꼬여 한마디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이봐.. 나 지금 바쁘다구. 나중에 내가 연락할게. 끊어.”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끊어? 엿 먹어라는 말 한마디 못했는데 끊어? 분노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순간만큼 영어가 절실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욕지거리들을 종이에 적어 중얼중얼거리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퍽, 마더퍼커, 피스 오브 쉿, 애솔, 배스털…”
[따르르르… 따르르르..]
하지만 그는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나쁜 놈… 눈물이 솟았다. 죽어라 이 나쁜 자식아! 으앙… 나는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다음날 들른 그의 마이스페이스에 나의 사진은 삭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쁜 놈. 어떻게든 복수를 해야 직성이 풀릴 것이었다.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를 만나야 복수를 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더냐? 몇 일 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I miss your Pina colada so much..]
그리고 놀랍게도 즉각적인 그의 답장이 날아왔다.
[I miss you too. 오늘 밤 갈게. 만나.]
세상에나.. 얼마나 나를 우습게 봤으면 이런 답장을 보낼까 하는 생각에 나는 다시 치가 떨렸다. 어쨌든 나는 그 분노의 힘을 바탕으로 복수의 준비에 돌입했다. 나는 Macy’s백화점의 드레스 코너로 달려가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드레스를 구입하고 피나콜라다 한 통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마치고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나 정말 할 수 있을까? 심장이 쿵쾅쿵쾅뛰었다.
[따라라라]
전화기가 울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여보세요.”
“Hey, baby. 나 왔어.. 나와.”
“알겠어.. 금방 나갈게.”
나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피타콜라다 한잔을 손에 들고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숙소 밖으로 나오자 힙합뮤직이 울려 퍼지는 그의 검은 지프가 보였다. 곧 차문이 열리고 운전석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웃고 있었다.
“오.. 너무너무 섹시해!”
그는 나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나는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빨리 타.. 오늘은 내 스튜디오로 가자구.”
나는 말없이 웃으며 피타콜라다를 한 모금 마셨다.
“Hey sexy, 빨리 안타고 뭘 마시고 있는 거야?”
나는 피나콜라다잔을 꾹 쥐었다.
“이거? 니 것보다 더 맛있는 피나콜라다. 한번 맛 볼래?”
나는 그의 얼굴에 질퍽한 피나콜라다를 힘껏 뿌리고는 부리나케 숙소로 줄행랑을 쳤다.
“What the fuck!”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숙소로 뛰어들어온 나는 문을 잠그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해냈다! 내가 당한 것에 비하면 약하지만 어쨌든 해냈다는 성취감에 나는 환호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로 뛰어든 나는 그가 보낸 몇 개의 문자를 확인했다. 그는 나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꽤 흥분한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나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무턱대고 그를 따라 나섰던 나의 몰지각함을 간과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 나를 지키는 건 오직 나 뿐이지.
뉴욕의 두 번째 경고였던가?
여기는 뉴욕... 나는 아직 이곳의 이방인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뉴욕을 알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