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魯迅,)
중국의 문학가·사상가.
본명 : 저우수런(周樹人)
별칭 : 필명 루쉰
주요저서 : 《광인일기》 《아큐정전(阿Q正傳)》 《고향》 《야초(野草)》
1들어가며
"루쉰은 중국문화의 기수다. 그는 위대한 문학가였을 뿐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그가 사망한 이듬해 마오쩌뚱은 이렇게 루쉰을 평가했다. 이후 그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그는 마오쩌뚱주의의 문학적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중국의 개방과 관계하여 루쉰에 대한 또 다른 평가들이 내려지고 있지만 중국 현대문학과 문화에 끼친 루쉰의 영향은 더욱 부각되며 중국 대륙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식 발음대로 한때는 노신으로 알려진 그는 대표작 아큐정전으로 소개되곤 한다. 루쉰은 의사 자격증을 가진 의사는 아니었지만 그는 한때 중국과 민중에 대한 열정으로 의학을 선택했고, 마찬가지로 중구과 민중을 위해 의학을 버렸던 사람이다. 여기서 그를 소개하는 것은 격동기 중국에서 의학도의 꿈을 품은 그가 왜 문학의 길을 택했고 그리고 그 길을 어떻게 갔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2. 출생과 문학의 길
루쉰은 1881년 9월25일 중국 저장(浙江省)성 사오싱(紹興)현에서 명문 사대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쩌우쑤런(周樹人). 조부는 북경에서 한림원 관리였고 부친도 수재(秀才)에 급제한 선비로 생활은 풍족했다. 그러나 그가 13세때 조부가 과거시험 부정사건과 연루되어 투옥되면서 루쉰의 가족은 농촌으로 피신하고 반년 후 부친은 중병에 걸리고 만다. 조부의 옥바라지와 부친의 중병으로 집안은 몰락하고 그때부터 루쉰은 아버지의 약값을 대기 위해 전당포와 약국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16세에 부친이 사망하고 18세에 동생이 사망하는 곤궁을 겪다가 강남육사학당 부설 광무철로학당에서 광업공부를 하면서 다윈의 진화론, 토마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 등 서양 학문을 접하게 된다. 22세에 정부지원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간 그는 일본의 새로운 학문과 의학을 접한다. 의학이 일본의 유신에 큰 힘이 되었음을 알게 된 그는 아편과 질병의 늪에 빠진 중국 민중들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당시 과학 및 신문명과 동의어로 인식되던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26세가 되던 해 세균학 강의를 듣던 루쉰은 한 장의 사진을 접한다. 당시 환등기로 진행되던 세균학 강의시간에 루쉰이 접한 사진은, 러일전쟁 중 중국에 진주한 일본군이 러시아 간첩이란 죄목으로 중국인을 총살하는 장면이었다. 환호하는 일본학생들과 희생자를 바라보는 동포들의 얼굴에 나타난 무기력과 무관심을 접하고 그는 심한 절망과 분노 속에 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해 버린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들 무슨 소용인가. 마비된 영혼, 마비된 정신과 노예근성이 중국의 국민성으로 자리잡고 있는 한 중국의 미래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마비된 영혼과 정신을 치료하는 길은 의술이 아니라 바로 문학을 통해 가능하다고 그는 믿었다.
3. 중국 신문학 운동과 루쉰 문학
청(淸) 말기, 서구 열강의 중국침략에 따라 형성된 중국인들의 민족의식은, 중화주의적 전통세계관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아편전쟁(阿片戰爭) 이후 부분적인 개혁으로 치유될 수 없을 만큼 중국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신해혁명으로 무너진 황국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열망했던 공화정이 아니라 와해된 체제의 틈을 타 각지에서 할거한 군벌(軍閥)들의 혼전과 일본과 구미열강의 각축전이었다. 중국 현대문학은 이러한 시점에서 자기모순에 대한 발견, 자기문화에 대한 부정을 통한 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절망과 반항의 길목에 루쉰도 서 있었다. 그는 이민족의 지배를 물리치거나 정치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 중국의 뿌리깊은 병근이 치유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의학교를 중퇴한 후 동경으로 나온 그는 문화운동 잡지의 발간을 추진하지만 무산되고 두권의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 발간도 실패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귀국한 그는 항주와 소흥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다음해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민심이 뒤숭숭해지자 학생들을 모아 무장연설대를 조직하기도 한다. 얼마 후 혁명당 군대가 입성했지만 혁명은 봉건의 암흑 속으로 가라앉고 보수화된 혁명당과 대립하던 루쉰은 산회초급사범학교 교장자리를 그만두고 임시정부가 있던 남경으로 떠난다.
혁명으로 제도는 바뀌었으나 혁명정부와 군벌이 타협하고 개혁의 움직임은 더욱 억압받았다. “유학 시절에 형성된 적막이 하루하루 성장하고 있어서, 큰 독사처럼 그의 혼을 감고 떨어지지 않았던"(<외침喊>의 서문) 시절, 루쉰이 겪었던 절망은 당시 지식인들의 공통된 절망이기도 했다. 정치적 활동이 봉쇄당했으므로 그들의 에너지는 내면을 향했고 1910년대에 이르러 폭발 점에 도달한 반항의식은 5.4운동을 통해 표출된다. 우리민족이 '3.1'독립만세운동을 벌였던 바로 그 해, 뻬이징에서 일어난 5.4운동은 일본의 산뚱반도 할양과 이를 허용한 군벌에 대한 항의시위를 넘어 중국 고전문화에 대한 총체적 반성으로 이어진다. 이때 서구 근대사상으로 통하는 통로이자 반항운동의 기지로 자리잡고 있었던 잡지 <신청년>은 서구의 민주주의와 과학을 사상적인 기치로 하고 반봉건, 개성해방 등의 구호를 실천논리로 세웠다. 이는 유가(儒家)사상을 근간으로 한 중국의 정치철학, 생활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후스는 <문학개략에 대한 소견>을 통해 종래 지식인의 전통 문체였던 문언(文言)을 폐기하고 구두어인 백화(白話)를 쓸 것을 주장했고, 천뚜슈의 <문학혁명론>은 신문학이 고전문학의 상투성을 버리고 근대적 정신을 담을 것을 부르짖는다.
이 와중에 태어난 루쉰의 첫 백화 단편소설 <광인일기>는 문학의 승리적 기념비였다. 광인일기는 너무나 새로워서 그 의미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포착되기 어려울 정도로 색다른 작품이었다. 정신착란자의 눈을 빌어 루쉰은 중국사회를 아이를 잡아먹는 식인의 사회로 규정하고, “아이를 구하자”는 주인공의 절규를 통해 암울한 봉건적 사고가 지배하는 절박한 중국의 현실을 고발한다.
5.4운동에 이어 국공합작 북벌군의 북진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5.30사건'이라는 노동운동을 배경으로 신문학운동이 확산되면서 문학단체들이 속속 등장한다. 루쉰은 어느 단체에도 깊이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신문학의 중심적 존재가 되어 있었고 이 때 나온 <아큐정전>은 그의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했다. 복합적으로 조합된 농민 형상인 아큐는 자신의 현실적 실패를 늘 '정신승리법'이라는 자기 기만술에 의해 덮어버린다. 아큐는 결국 혁명의 와중에서 혁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혁명당을 가장하다 도둑의 누명을 쓰고 총살당한다. 루쉰은 아큐의 이 어처구니없는 비극을 통해, 민초들의 정신적 마비를 해부하고, 그들에게 정신적 낙후성을 고착시킨 전통적 사회와 의식구조에 대해 비판하면서 동시에 왜곡된 혁명 과정을 비판한다.
그 이후 나온 <외침喊>(1923년)과 <방황彷徨>(1926년)은 중국 현대소설의 초석을 세우는데 기여한다. 소설에서 그는 값싼 낙관이나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의 희망은 절망에 대한 반항이며, 부정적인 모습의 민중은 비판의 대상이다. 그들은 인혈(人血)만두로 폐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고 처형당한 사형수의 피에 만두를 찍어 먹을(약藥) 정도로 미개하고 천박했다. 루쉰은 그러한 우매는 봉건적 질서의 해악이 민중의 영혼 깊이 스며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민중은 봉건사회를 타파하려는 혁명에 대해 무관심하고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또 이들을 계몽해야 할 지식인들도 모두 긍정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몰락하거나, 희생당하거나, 보수로 돌아서거나,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거나, 의연히 계몽자로서 실천의 길을 걷는 다양한 지식인상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들을 통해 루쉰은 중국의 앞날이 희망찬 미래가 아니라 넘어야 할 가시밭길이 첩첩이 가로막힌 험로임을 암시한다.
1926년 이후 중국 사회는 대혼란기로 접어든다. 국공합작 북벌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했으나 재분열되어 1937년 2차 합작까지 수차례의 내전을 겪는다. 루쉰은 아모이(厦門)과 광저우(廣州) 등지를 떠돌며 강단에 섰으나 혁명세력 내부의 퇴폐와 국민당의 반공 쿠테타 등을 목격하면서 비판적 글쓰기를 강화한다. 1927년 다시 상하이로 가기까지 2년 간 깊이 고뇌했던 그의 생활과 사상을 보여주는 것은 산문시집 <들풀(野草)>과 산문집<아침 꽃을 저녁에 주으며(朝花夕拾)>, 서신집 <두 곳의 편지(兩地書)>등이다. 이중 <들풀>은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데 소설보다 작가의 정신활동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거론된다.
샹하이 시대 루쉰의 투쟁방식은 소설이 아닌, 잡감(雜感)이라고 이름한 수필 형식의 단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잡감은 시보다는 구체적이고 소설보다는 뛰어난 기동성을 갖고 있어서 단검처럼 번쩍이며 적과 동지, 사랑과 증오, 좌절과 희망, 과거와 미래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반봉건 반식민지라는 어둡고 견고한 ‘무쇠 방’에 갇혀 있는 대륙의 혼을 일깨운다. 그는 보수적 우파 지식인들의 현실에 대한 안일한 태도 뿐 아니라 자기를 소시민 작가라고 비난하는 젊은 작가들에 대해서도 서슴지 않고 비판한다.
일제의 침략이 더욱 거세고, 국공합작이 깨진 후 작가들에 대한 국민당의 탄압이 강화되자, 문학의 이념성을 비판했던 루쉰도 좌익 운동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고,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정신적 리더가 된다. 그러나 내전의 중지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일치저항을 주장하는 여론이 높아지던 1936년, 일제에 대응하기 위해 어떻게 문단의 통일을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던 중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5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4. 마치며
그의 삶은 숨 가쁜 중국 근대사의 한복판을 걸어간 삶이었다. 루쉰의 고뇌와 애증은 근대중국의 고뇌와 애증이었으며, 루쉰이 남긴 수많은 글들은 당시의 중국을 가장 정직하게 증거하는 것들이었다.
루쉰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생애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최대의 교훈은 ‘전투적 지식인의 초상’이란 말로 집약될 수 있다. 암울한 근대중국의 격동 속에서 적과 동지에 대해 모범이 되어 보여준 루쉰의 준엄한 삶은 사이비 지식인의 위선과 허구를 가차없이 들추어내고 있지만 그러한 그의 삶을 일관하고 있는 동력은 다름 아닌 양심이었다. 이웃에 대한 관심과, 흙에 더부살고 이웃에 더부살고 조국과 민중에 더부살 수 밖에 없는 ‘더부살이’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그의 양심의 근간을 이룬다. 루쉰의 모든 업적도 이 양심의 소산이었고, 문학적 천재도 이 양심의 승화였고, 불굴의 전투성도 이러한 양심의 실천이었다. 그렇게 양심은 루쉰의 모든 고뇌와 달성(達成)의 원천이었다.
"우리에게는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동시에 타인의 희생을 저지할 권리도 없다. 이 희생의 선택이라는 문제는 혁명가의 사회참여와도 아무 상관이 없는 개인적인 것이다."
"젊은이가 늙은이의 임종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늙은이가 젊은이의 사망기사를 써야 하는 아이러니"를 통탄하고 사람들의 무감각에 절망하면서도 그것은 “더 큰 재앙을 자초하지 않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무감각”이라 인정하는 솔직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목 잘린 여성 혁명가의 나신을 구경하기 위하여 몰려가는 군중들에 대해서 그는 적들을 향한 것보다 더 심한 분노와 혐오를 표출하기도 했다.
“민족혼”이란 세 글자가 묵서된 백포(白布)가 관 위에 덮임으로써 그의 생은 끝났지만 그의 삶은 우리에게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 있어서 자칫 간과되고 경시되기 쉬운 인간적인 토대를 상기시킨다. 그렇게 근대중국의 격동을 정면에서 감당하며 지켜온 그를 통해 우리는 오늘을 사는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봐야 할 이유들을 발견한다.